아.... 점점 생활 사이클이 뒤틀려가고 있습니다.
건강에 이상신호가 바로 바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모쪼록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 아 유 폐인? ===================================
탁자 짧은 면에 내가 앉고
긴 면에 민아가 한나가 나란히 앉은 구도.
이젠 민아가 사이에 앉은 탓에
옆으로 눈을 피하고 있을 수도 없다.
난 묵묵히 앞에 놓인 음료수 잔만
염력으로 움직이려는 듯 쏘아보며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했다.
민아
- 시장에 반찬 사러 갔더니
오늘 마트가 세일이라고 해서
거기 들렀다 오느라고 좀 늦었어.
일찍 올 것 같으면 전화를 하지...
기억 - 아.... 응.
민아 - 둘이 있는 동안 무슨 일 없었어?
기억
- 으응.... 뭐... 아무 일도.
그건 그렇고, 떡국은 먹었어?
불안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적당한 곳으로 화두를 돌리려는 찰나
민아 옆에 앉아있던 한나가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내며 한 마디를 보탰다.
한나 - 흐음... 아무 일도 없었던 거구나.
민아 - 응?
한나 - 아냐, 아무것도.
....... 오... 주여.
그녀는 날 보며 장난을 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이미 민아로부터
나에 관해 제법 많은 정보를 전해 들었고
내가 여성에 대한 면역이 약하다는 걸
방금 전 실험을 통해 확신......
기억 - 푸헙! 쿨럭!! 켁....켁...
민아 - 꺄악? 괜찮아?
한나 - 킥....
힐끔 한나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문제의 브래지어를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고 있었다.
다행히 나와 한나 사이에 앉은 민아는
나를 향해 돌아앉아있어 보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갑자기 돌아보면
어떻게 하려고 저런 짓을....
난 민아가 건네준 티슈로
옷에 튄 음료수를 슥슥 닦아냈다.
워낙 단단히 얹힌 탓에
연신 켈룩켈룩 기침을 해대며
주변을 수습하고 있을 때
한나가 티슈 몇 장을 빼들고 불쑥 내게 다가왔다.
한나 - 아유, 줘 봐요. 닦아줄게요.
기억 - 노노노노!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아주 괜찮아요. 쿨룩.
민아 - 왜 그래? 어디 아파?
기억 - 아니, 그냥, 사레가 좀....
지금의 내 처지는 뭐랄까....
고양이를 친구라고 데리고 온 비둘기 앞의 생쥐 꼴이랄까.
비둘기는 방긋방긋 웃으며 고양이를 소개해 주지만
애처롭게 떨고 있는 내 눈엔
고양이의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난 역시나 바짝 긴장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쳐다보면 꼭 뭔가 일이 터진다.
물론 지금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민아 - 기억아, 아까부터 계속 왜 바닥만 보고 있어?
기억
- 응? 아..... 그..... 이.... 아무래도
동생.... 이..... 패션이.... 좀 부담스러워서.....
민아의 말에 이때가 기회다 싶었던 난
그녀의 힘을 빌려 고양이 목에 방울을 채우려 했고
한나의 복장상태를 쭉 훑어본 민아는
점잖게 한나를 타일렀다.
민아
- 음.... 내가 봐도 좀 그렇긴 하다.
한나야, 아무리 집안이라도 손님도 있는데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
한나 - 싫어. 더워.
민아 - 이잇, 얼른!
한나 - ...... 피.
나이스 민아!
민아의 언니파워가 발동하는 순간
한나는 김샜다는 듯 토라진 소리를 내며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
그 순간, 그녀의 뒷주머니에서 떨어지는 브래지어.
민아 - 응?
기억 - 으아앗?!
‘훽!’
민아가 뭔가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눈길을 돌린 순간
난 초인과 같은 순발력을 발휘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내 쪽으로 돌렸다.
민아 - 어어?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민아.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난 더듬더듬 그녀에게 말했다.
기억 - 새....... 새해 복 많이 받아.
민아 - 난 또 뭐라고.... 놀랐잖아...
기억 - 아.... 그게.. 나중에 깜빡할까봐.
민아 - 그래, 새해 복 많이 받아.
그 사이 한나는
소파 위에 떨어진 속옷을 주워 손으로 툭툭 턴 뒤
셔츠 속에 감추고 방으로 들어갔다.
휴.........
적어도 한 고비는 넘긴 건가.
한나가 방으로 들어간 후
민아는 내 얼굴을 슬쩍 살핀 뒤
웃는 얼굴로 물었다.
민아 - 한나 예쁘지?
기억 - 아....뭐.... 응.
민아
- 왠지 불안한데.... 괜히 소개시켜 줬나?
남자들은 한나 같은 스타일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더라.
기억 - 아아냐, 난.....
민아 - 그래? 왜? 좋잖아, 키도 크고.....
기억 - 난..... 그냥 네가 제일 좋아.
민아 - 피-.
조금은 뻔한 내 대답에
그녀는 싫지 않은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잠시 후
한나는 면티에 청바지를 입고
거실로 돌아왔다.
둘 다 몸에 좀 붙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방금 전에 비하면 예복이다.
민아 - 그봐, 훨씬 보기 좋잖아.
한나 - 거긴 아직 겨울이란 말이야.
민아 -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지.
한나 - 여긴 나시티를 입지 말라고 법으로 되어있어?
민아 - 그런 건 아니지만... 관습헌법이야.
한나 - 얼씨구?
자신의 무기 하나를 봉인당한 게 못내 불만인 듯
한나는 민아에게 볼멘소리를 해댔다.
민아 - 이제 여기서 지낼 거니까 빨리 적응 해야지.
기억 - 풉! 쿨룩... 쿨룩...
민아의 말에
난 또다시 음료수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해댔다.
이건 또 웬 계란으로 개 잡는 소린가....
한나
- 어머? 왜 갑자기 그래요?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고 하니까 그래요?
내가 무슨 뭘 어쨌다고?
기억 -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켈록.....
한나
- 아아~ 둘만의 시간을 방해할까봐 그러는 구나.
걱정하지 마요, 때 되면 적당히 비켜줄 테니까.
제가 또 분위기 하나는 잘 파악하거든요.
민아 - 한나야~.
한나의 이야기가 점점 직설적으로 변해가자
민아는 대체 왜 그러냐는 듯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심통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민아의 제지에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곧 민아와 어깨를 맞붙이고 앉아 나를 보고 물었다.
한나 - 우리 둘이 보니까 어때요? 닮았어요?
기억 - 에? 음..... 조금요.
한나 - 그래요? 쿡....
솔직히 말하자면
한나와 민아는 자매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눈매나 표정이 조금 닮은 감은 있지만
이미지 자체가 너무도 극명한 대조였다.
토끼랑 여우랑 가져다 놓고
닮은 구석을 찾는 기분이랄까?
한나 - 진짜로 닮은 것 같아요?
기억 - 웃는 얼굴이... 조금....
한나
- 흠... 뭐, 그렇다니 그런 거겠죠.
그건 그렇고, 오빠 누구랑 되게 닮은 거 알아요?
기억 - ..... 누구랑요?
한나 - 쿡... 있어요, 그런 사람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민아의 어깨가 작게 흠칫했다.
그녀의 말엔 나 또는 민아를 당황하게 하는
어떤 키워드 같은 것이 숨어있는 것 같다.
한나
- 남자라고는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
뜬금없이 남자친구가 생겼대서 어떤 사람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까 이유를 딱 알겠네.
민아 - 한나야 그만해.
한나 - 왜? 틀려?
민아 - ........
묘한 웃음을 지으며 민아를 바라보는 한나와
어금니 뒤쪽에 작은 경련이 이는 민아 사이엔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나가 말한 ‘누구’ 라는 건 누굴까.
적어도 민아의 옛사랑 같은 건 아닐 것이다.
갑자기 남자친구가 생긴 이유를 알겠다는 걸로 미루어보면
민아가 좋아하는 연예인과 닮은 건 아닐까?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닌 걸로 보아
그 연예인이 무명에, 추남에, 마약중독이었다던가....
..... 그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점점 위험해져가는 분위기에
난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리려 한나에게 물었다.
기억 - 저... 그런데 지금 나이가?
한나 - 열아홉이요.
기억 - ...... 정말요?
한나 - ... 미국나이로.
그래도 스무 살인가....
하긴.. 민아가 스물 하나니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다.
한나 - 그리고 이제 그냥 말 놔요. 명색이 형부인데.
기억 - 어? 혀, 형부는 무슨....!!
한나 - 싫어요?
기억
- 아니, 그게 싫다고 하기 보다는
아직 상호간의 협의와 의견 수렴이 필요한 그런...
한나
- 언니, 상호간의 협의가 필요하다는데?
어떻게 할까? 그냥 형부라고 불러?
민아 - 으으응?!
불똥은 어느새 민아에게로 튀어갔다.
그러라고 하기도, 하지 말라고 하기도 애매한 난제.
한나에겐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재주 아닌 재주가 있는 듯 했다.
민아가 잠시 말을 망설이는 사이
한나의 타겟은 다시 나로 돌아왔다.
한나 - 둘이 어디까지 갔어요?
기억 - 엑?
한나
- 키스는 예전에 했다고 했으니까....
으음..... 그 다음이 애매하네?
기억 - 그...그런....
민아 - 얘, 얘, 얘, 얘가....!!
한나
- 어머나? 둘 다 왜 이렇게 정색을 해?
혹시 끝까지 간 거야?
이후에도 우리는 한참동안
한나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발언에
혼비백산해서 끌려 다녀야 했다.
긴장과 경악 속에 초토화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문 앞으로 마중을 나온 그녀가
나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민아 - 미안, 원래 장난이 좀 심한 편이라...
기억 - 아냐, 뭐..... 허허, 나름대로 즐거웠는걸.
민아 - 다음부터는 그러지 못하게 따끔하게 혼낼 게.
기억 - 어이구~ 잡아먹히지나 마라.
민아 - 쿡..... 그래도 내가 언니인걸.
기억 - 이제 한나랑 같이 사는 거야?
민아 - 응, 대학은 여기서 다닐 것 같아.
기억 - 그렇구나...
.... 설마.
순간 불안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지만
싫은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