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손바닥만한 소포를 앞에놓고 남자는 열어보지도 않은채 몇시간째 노려보고만 있었다. 단정한 필체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글씨를 태워 버리기라도 할듯 남자의 시선이 그럴수 없이 뜨거웠다.
'보내는이 : 송찬미'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여자의 이름에 못박히듯 박혔다. 그리고 이내 결심이 선듯 조금쯤 거친 동작으로 소포의 포장을 벗겨냈다.
곱게 쌓여져 있던 포장을 벗겨내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작은 상자안엔 남자의 예상대로 아파트 열쇠와 통장이 들어있었고 네모 반듯하게 접혀있는 편지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무엇일까? 아직 내용도 확인하지 않은 편지를 보는순간 남자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종이를 펼치자 남자가 기억하고 있는 여자의 예쁜 글씨가 남자의 눈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 나의 영원한 포세이돈 당신….
철썩이는 파도가 아름다웠던 겨울의 바다에서 처음 당신을 만났습니다.
겨울바다가 그리워 일행도 없이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난 바다를 닮은 당신을 운명처럼 사랑하게 되었지요.
아마 그때부터 였을겁니다. 사랑…. 그 지독히도 뜨겁고, 끈질기에 떨어지지 않는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
절대로 내것이 될수없는 당신을 참 많이도 욕심내고 홀로 갈무리 했지요. 아무리 사랑한다 외쳐도 당신의 마음한켠 내어주지 않았던 냉정한 당신…. 그래도 당신을 볼수있는게 좋아서, 당신의 따뜻한 가슴에 안겨 듣던 당신의 규칙적인 심장소리가 좋아서, 감미로운 음악처럼 내 귓속을 파고들던 당신의 목소리가 좋아서, 내게 끝임없이 상처주던 당신을,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평생을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 당신의 숨겨진 여자가 된다 하더라도…. 세상으로 부터 쏟아지는 끝없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라도 나 그렇게 당신곁에 머물길 원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있는 사랑이 누구에게도 축복받을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당신 에게로만 향해있는 사랑이란 줄을 잘라내지 못하여 무던히도 아파하던 내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당신의 옆에 있길 바라던 내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않았던 잔인한, 잔인한 당신….
그런 당신을 많이도 원망하고 많이도 미워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리석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당신을 끝끝내 용서하고 마네요.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당신….
외롭게 당신을 사랑하던 날 그래도 조금쯤은 기억해 주세요. 좋은 기억은 아니더라도 문득 스치듯이 떠오르는 하나의 추억으로 당신의 옆에 바보같은 내가 머물렀음을 기억해 주세요.
이제 당신을 떠나 긴 여행을 가려합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며 내 가슴에 아직도 자리하고 있는 당신을 끝끝내 털어내지 못하고 마음에 품고 떠나려는 저를 조금은 가엽게 여겨 주세요.
부디 안녕히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
마지막….
찬미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마지막을 알려왔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성민의 입술이 심술궂게 비틀렸다. 그리고 남자의 억센 손아귀에서 여자의 애절함이 묻어있는 편지가 보기 흉하게 구겨져가고 있었다.
'그래, 죽어라! 네가 죽어 없어지길 나또한 바라고 있었다! 나에게 넌 아무것도 아니니까! 넌 단지 내 정욕을 풀어낼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런 네가 건방지게도 내게 사랑을 요구했다. 내 발치에 엎드려 마치 구걸하듯이…. 주인에게 관심받길 바라는 더러운 개처럼! 그러니 송.찬.미. 내 눈앞에서 내 가슴속에서 더이상 질척거리지 말고 제발 죽어 없어져라!'
성민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찬미의 편지가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되는것처럼 휴지통 속으로 쳐박아 버리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인터폰을 눌러 강실장을 찾았다.
"찾으셨습니까."
어느새 그의 앞에 강실장이 서있었다.
"방배동 아파트 정리하세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한순간 성민의 눈빛이 사냥감을 쫓는 굶주린 매처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사장님!"
갑작스런 성민의 지시에 늘 단정하기만 한 강실장의 목소리가 한음 높아졌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사람의 숨겨진 여자, 찬미를 그 또한 알고있었다. 지금은 그녀와 헤어졌다 하여도 그녀가 살고있는 곳 방배동 아파트를 정리하라 말하고 있는 성민을 그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었다.
"더이상 길게 얘기 않합니다. 오늘 중으로 정리 하세요!"
화염(火炎)을 머금은듯한 성민의 눈동자가 더이상은 아무것도 그 어떤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듯 검붉은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두남자 사이에 어둠처럼 무겁고, 짙은 안개처럼 습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강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보세요."
강실장의 목소리에 성민이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두꺼운 카펫이 깔려있는 그의 사무실 바닥이 모든 소리를 흡수해 버리듯 발소리 조차 없이 강실장이 사장실을 빠져나갔고 성민은 홀로 남겨졌다.
그의 머리속이…. 그의 가슴이…. 무언가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왔다.
너때문이 아니야! 네가 걱정되어서, 정말로 죽어 없어질까 두려워서 그런게 아니야! 그래,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불안함은 한때 나에게 무한한 쾌락을 안겨준 너에대한 내 마지막 동정심때문이다.
단지 그것 때문이다!
.
.
.
남자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처럼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춰지는 도시또한 온통 검은빛의 어둠뿐이었다. 그 칠흙처럼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을 뚫고 남자의 눈이 마치 날카로운 매의 부리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열쇠 하나가 온 세상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라도 되는것처럼 열쇠를 쥐고있는 남자의 손에 잔뜩 힘이실려 있었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려 차를 몰고 미친듯이 이곳으로 달려왔을까? 그녀가 더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는 다는걸 알고 있으면서 무엇때문에 난 여기에 서있는 것인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굳게 닫혀있는 아파트의 문을 바라보며 남자는 오늘아침 부터 이곳을 찾은 그 순간까지 스스로에게 묻고,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그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것을 남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나운 맹수의 으르렁 거림처럼 남자의 뜨거운 몸속을 돌고있는 또다른 그가 남자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라고….
철컥!
닫혔던 문이 열리고 처음 남자가 느낀것은 이곳을 찾을때마다 느껴지던 따스함이 아닌 뼈속까지 시려오는 차가움 뿐이었다.
남자는 신발도 벗지 않은채 익숙한 동작으로 거실의 불을 켰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남자의 눈이 갑자기 쏟아지는 밝은 빛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남자의 귓속으로 들리는 목소리 하나….
'늦었어요. 오늘도 힘드셨죠?'
갑작스러 그 목소리에 아직 밝은 빛에 적응되지 못한 남자의 눈동자가 번쩍 떠지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이 빠른속도로 험하게 일그러졌다.
성민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현관문 앞에서서 고운웃음 입에물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받아들며 찬미는 그렇게 말했었다. 늦었어요. 오늘도 힘드셨죠….
삼년을 늘 한결같이 지겹도록 똑같은 말만 반복하던 찬미였다. 이젠 그렇게 말해줄 그녀가 없는데도 아직도 그의 귓속으론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늦었어요, 오늘도 힘드셨죠? 라는 맑디 맑은 그녀의 목소리가….
그것을 느끼는 순간 성민의 마음이, 그마음의 주인인 그를 배신한다.
찬미, 아름다운 그녀를 난 아직도 원하고 있다고…. 도대체 넌 지금 어디에 있는거냐고….
남자의 정직한 마음이 늑대의 울부짓음 처럼 울부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