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지?
.... 지금이 몇 시쯤 된 거야?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 나른한 기분.
난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다툼 소리에
반쯤 정신을 차렸다.
민아 - 그러게 왜 그런 장난을 해!
한나 - 아니.... 누가 기절할 줄 알았나....
민아 - 기억이가 얼마나....음... 섬세한데!
한나 - 섬세가 아니라 소심 아냐?
민아 - 아냐! 아 씨.... 적당한 단어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민아와 한나.
왜 민아랑 한나가 지금 내 옆에 있는 거지?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나가자
그제야 쇼킹했던 이전 상황이 쭈욱 떠올랐다.
민아 - 아! 순진! 순진한 거야!
한나 - ..... 얼씨구.
민아 - 왜 또!
한나
- 언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남자는 다 늑대야.
숙맥이고 프로고 간에...
민아 - 아냐! 기억이는 안 그래!
한나
- 아이고 아이고... 믿고 말고는 언니 마음이지만
남자는 원래 본능이 이성을 초월하게 되어있다니까?
두고 봐라 이제... 기억 오빠가 지금은 저래도...
민아 - 아니래도! 기억이는 나중에도 쭈~욱 지금처럼....
어쩐지 계속 누워서 듣고 있기엔
상당히 무안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
민아야... 지금 그게 날 도와주는 말이 아니야....
대화가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수준까지
발전하는 걸 막기 위해
난 한 번 몸을 뒤척거린 뒤 깨어난 시늉을 했다.
기억 - 으음...
민아 - 앗! 일어났어?
기억 - 응...
민아 - 미안... 한나가 장난이 좀 심했지?
기억 - 한나? 아.... 맞다....
난 최대한 방금 일어난 것처럼
기억을 더듬는 시늉을 하며
힐끔 한나의 눈치를 살폈다.
한나
- 무슨 남자가 그 정도로 기절을 해요?
아예 코피까지 팍~ 뿜으면서 쓰러지지?
마지막에 어렴풋이 들었던 말처럼
튜브탑에 핫팬츠는 아니었지만
거의 그만그만한 레벨의 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톡 쏘아붙이는 그녀.
한나
- 그래서 거사나 제대로 치루겠어요?
죽을까봐 겁나서 못 벗겠네.
민아 - 한나야!
한나 - 아씨, 맞는 말이잖아~.
표현이 조금 심하긴 했지만
단번에 내 아픈 부분을 후벼 파는 그녀.
내 최악의 치부를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에
계속 누워있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한심하다...
한참 동안 반박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한 난
우선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기억
- 나.... 나도 좀 씻을게.
혹시 적당한 옷 없을까?
이거 계속 입고 있기는 좀 그런데....
산장에서 일주일을 지내며
여벌이 있는 속옷은 간간히 빨아 입었지만
단벌로 걸치고 간 겉옷은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퀘퀘한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민아
- 아...... 내 옷은 작을 것 같고....
한나야, 추리닝 같은 거 좀 빌려줄래?
한나 - 언니는... 기억 오빠가 내 걸 어떻게 입어?
민아 - 기억이도 마른 편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
한나 - 허리 몇 입어요?
보통 술자리 같은 곳에서 이런 말을 하면
난데없이 격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난 정말, 죽어도 살이 안 찌는 편이다.
체중 중량제에 한약에 별의 별 짓을 다해봤지만
지금도 나는 178cm의 키에 몸무게는 60kg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취미로 복싱을 했던 직후라
진정 뼈와 근육 밖에 없는 몸이었다.
기억 - 보통... 26정도 입는데요.
한나 - 에에엣?! 나랑 1인치 차이에요?
기억 - 27인치 입으세요?
한나 - ....... 농담이죠?
한나가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내 몸을 아래에서 위로 쭉 훑어보는 사이
민아의 표정에 일순 어두운 그늘이 스쳤다.
기억 - 민아야, 또 아픈 거야?
민아 -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 맞다. 오늘은 그냥 놔두라고 했었지....
잠시 후 난 한나로부터 츄리닝 바지 한 벌과
헐렁한 야구 티셔츠 하나를 받아들고
2층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한나 - 응? 왜 그리로 가요? 여기가 더 가까운데.
기억 - 예? 아.... 아니 그게...
한나 - 아~ 언니가 방금 썼던 데니까? 어쩜~
기억 - 아아아니, 딱히 그런 건....
그동안 늘 2층 화장실만 써서 그런지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향하려 하던 난
또다시 한나에 의해 궁지로 몰렸다.
민아 - 한나얏!
한나 - 알았어 알았어~. 편하실 데로 쓰세요~. 네?.
말로는 그래도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그녀.
이제 와서 방향을 바꾸기엔 더 어색한 판국이었기에
난 꿋꿋하게 2층을 향해 올라갔다.
2층 화장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들어왔던 곳이지만
한나의 말을 듣고 난 직후라 그런지
괜시리 긴장되고 묘한 기분이 든다.
아직 따듯한 기운이 남은 습한 공기와
거울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물방울들.
그래.... 방금 전 민아가 이곳에서...
어허!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헤에....
마냥 뒤숭숭한 기분으로 샤워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거실.
어느새 민아는 주방에서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고
한나는 어디서 꺼냈는지 TV에 게임기를 연결해
격투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기억 - ..... 도와줄까?
민아
- 응? 아냐~. 금방 다 하니까
한나랑 게임이라도 하고 있어.
기억 - 그럼 끝나고 설거지는 내가 할게.
민아 - 어머, 정말?
.... 다시금 말하지만
내가 만든 요리라는 것은 높은 확률로
먹는 순간 건강에 유해하다고 느낄 만큼
스펙타클한 맛을 내곤 했기에
난 순순히 주방에서 물러났다.
(혹자는 이것을 ‘똥맛’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나 - 얍! 아싸! 으리얍!
다시 나온 거실엔 화면 속 캐릭터와 하나가 되어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한나가 있었다.
기합소리만 들으면 본인이 싸우는 것 같을 만큼 진지하게.
하지만 그 싱크로율과 무관하게
게임 속 캐릭터는 심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상대를 코앞에 두고도 큰 기술만 써대니
카운터의 밥이 될 수밖에....
한나 - 같이 할래요?
기억 - 아.... 전 그다지.
한나 - 해요~. 이기면 오늘은 더 이상 안 놀릴게요.
방금 전 실신 사태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 뼈저리게 느낀 난
그녀의 근처에도 갈 마음이 없었지만
‘하루 동안의 평화’라는 그녀의 내기 조건은
단번에 마음이 혹할만한 것이었다.
결국 조이스틱을 들고 그녀와 나란히 앉은 나.
‘Round 1. Fight!'
한나 - 진풍~아도~
기억 - 약펀치. 약킥. 약킥.
한나 - 으윽! 소류~
기억 - 약펀치, 강킥.
한나 - 큭! 찹쌀떡..
기억 - 점프 강킥.
아무 사전 콤보 없이 기술부터 쓰고 보는 그녀는
기본 공격만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KO! 기억 Win!'
한나 - 뭐예요! 얍삽하게! 기술로 승부해야지!
기억 - 이것이 기본입니다.
1라운드 내내 통상기에 맞아 쓰러진 그녀는
야금야금 깍여나가는 에너지를 보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런 중요한 승부에
승리가 확실한 전법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나 - 찹쌀떡두~개.
기억 - 가드, 약펀치, 약킥, 약킥, 강킥. 아줌마!
한나 - 깨갱!
‘KO! 기억 Win!'
결국 2라운드도 나의 낙승.
긴 싸움 끝에 드디어 평화를 쟁취하는 순간이었다.
기억 - 됐죠? 약속은 지키는 겁니다.
한나 - 이잇!! 삼세판!
기억 -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한나 - 남자는 삼세번이란 말도 있잖아요!
기억 - 한나양은 여자잖아요?
한나 - 지금 남녀 차별하는 거예요?
기억 -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이미 승패는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 떼쓰듯 억지를 부리는 그녀.
어차피 저녁을 먹으려면 시간도 남았고
이대로라면 절대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선 난
삼세판이라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KO! 기억 Win!'
'KO! 기억 Win! Perfect!'
한나 - 이이씨..... 안 해!
기억 - ..... 그럼 이만.
한나 - 어딜 가요!
기억 - 안 한다면서요?
한나 - 다음엔 이거예요!
한나는 그래도 오기가 남았는지
TV 아래 선반에서 또 다른 CD를 꺼내들었다.
‘KO! 기억 Win!'
'Time Out! 기억 Win!'
한나 -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상대로 ‘적당히’라는 게 없어요?
기억 - 아깐 남녀 차별 하냐면서요?
한나 - 차별하고 배려는 다르죠!
기억 - ...... 억지에요.
한나 - 알아요, 나도!
이젠 거의 울상이 되어버린 그녀.
난 ‘안다니 다행이네요.’ 라고 받아치려던 말을 참고
슬쩍 조이패드를 내려놓았다.
한나 - 뭐예요, 따고 배짱이에요?
기억 - ..... 예? 제가 뭘 땄는데요?
한나 - 알았어요! 벗으면 될 거 아니에요!
기억 - 뭐, 뭐, 뭐 뭘 벗어요? 또?!
한나 - 이잇..... 분해엣~!!
이젠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는 그녀의 꼬장....
이 무모한 처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처음부터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 때 즈음
때 마침 민아가 저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민아 - 짜잔~ 민아 스페셜 돈가스가 나왔습니다~!
기억 - 아, 나이스 타이밍. 밥이나 먹자.
한나 - 어딜가욧!
좋다고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려는 찰나
한나는 앉은 자리에서 옆으로 쓰러지듯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조금 늦었다.
‘주르륵.’
그 결과, 내 허리춤을 잡고 엎어져
츄리닝 바지를 거의 발목까지 끌어내려 버렸다.
민아 - !!!!
한나 - !!!!!
기억 - @#%%@!!!!!
얼마나 놀랐는지 시선도 못 돌리고 굳어버린 민아,
난 너무도 민망한 기분에
차마 밑을 내려다보진 못하고
슬며시 손으로 더듬어
팬티까지 내려가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지금 눈을 내리면 민아의 시선도 따라 움직인다.
기억 - .....
다행히 팬티는 제자리에 있다....
기억 - .... 올려!
한나 - 네?
기억 - 빨랑 올려!!!
난 계속 민아쪽을 주시하며
아직도 내 바지를 잡고 있는 한나에게 소리쳤다.
절대 지금 자세를 바꿀 순 없다...
그제야 주춤주춤 내 바지를 무릎 위까지 올려주는 한나.
밑으로 내린 손끝에 바지가 닿는 걸 느낀 순간
난 재빨리 바지를 허리까지 추켜 입었다.
기억 - ......
민아 - ...,,,,
그 이후로도 해결 될 기미가 안 보이는 분위기.
....... 최악의 사태 발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