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마주치지 말았으면... 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은 다행으로 다가온다.
이대로 택시를 타고 집에 갔더라면, 아주머니의 질문공세와, 어쩌면 바른 정신으로 계실지 모르는
엄마의 놀라움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더운 바람이 피부에 와 닿자 긴장이 풀리고 굳었던 어깨도 조금씩 풀어지는거 같다.
쟈켓을 벗으라던 예후의 말은 꽤나 유혹적이었지만 살에 들러붙은 블라우스가 신경쓰여 여전히
밍기적 거리는 중이다.
하지만 한번 따스함을 맛본 피부는 더 많은 것을 원했고, 더 나아가 나로인해 꿉꿉한 기분이 들게했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어차피 저 남자는 운전에 열중해있다.
꽉꽉 막히는 퇴근시간,, 조금의 틈만 보여도 비집고 들어오는 이 교통 난에 나까지 신경쓸 겨를도
없지 싶다.
겉옷을 벗고 뒷자석에 편히 기댔다.
무시무시한 눈빛 공격과 경고를 보낸 이후로 대화가 없었다.
이대로 집까지 아무 말 없이 가면 좋으련만…
앞만보며 깜박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니 졸음이 밀려온다.
오늘로 두번째 만남인 신원미상의 남자 앞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나무라고,,
절로 감기는 두 눈에 힘을 주어보지만,,, 몇번의 시도끝에 어느 순간 생각의 끈이 끊어지며 점점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마도… 온 몸을 녹여주는 따스한 바람 때문이리라…
이 여자 큰일날 여자다.
모르는 남자 앞에서 이렇듯 무방비하게 잠들어 버리다니…
참..나.. 어이가 없다.
차를 부드럽게 주차시키고,,, 그녀를 깨우기 위해 손을 들다가 아직 촉촉하게 젖어있는 머리 때문에
멈칫 해야만 했다.
옷은 거의 말라 가는듯 보였지만, 숱 많은 긴 머리를 말리기엔 차안의 열기가 부족했나보다.
어떤 이에겐 버거울 만큼 뜨겁기만 한데…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어 팔뚝까지 걷어 올리고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거지…?
어렴풋이 짐작은 해보지만,,, 자신이 상상하는 그런 일은 아니길 바란다.
그렇다면 자신의 전의가 사그라 들 것이므로…
처음 의지완 달리 매몰차게 대하지 못하는 자신을 느낀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무슨 일을 꾀하는 지 모를 여자인데…
한 해의 겨울을 나서 인지 희게 변해버린 피부와 꼭 감긴 채 기다란 속눈썹으로 그늘을 드리운 두 눈...
오똑한 콧날과 앙증 맞은 입술과 길고 가는 목…
점점 더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자신을 이리도 유하게 만드는 원인을 찾아 헤맸다.
분명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는 인물은 아니다. 아니, 한 눈에 시선을 사로 잡는 미모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당대 최고의 아름다움은 아니지 않은가…?
하민이의 마음까지도 쥐고 흔드는 그 무언갈 열심히 찾고 있는데 뒤척이며 눈을 뜬 그녀와 마주쳤다.
한 순간 동공이 커 졌다가.. 눈을 굴리며 낮게 무언갈 중얼거린다.
"제가.. 흠흠…흠... 얼마나 잤죠?"
잠에서 깨어난 목소리는 약간 허스키 했다.
"한시간쯤."
"세상에!!! 미쳤지...미쳤어…아니!! 왜 안 깨운거에요??!! 도대체 내가 자는 동안 뭘 한거죠??"
"이봐요. 당신. 말을 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생각하고 내뱉으면 안되는거요? 내가 자라고 부추겼나?
매번 만날때마다 남의 시간을 잡아 먹는게 누군데!!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은 나라고!"
"미안해요. 나 자신에게 화가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
나 답지 않게 만드는데 모자라 할 말까지 잃게 만든다.
이렇게 금방 사과 해 버리면 대체 무슨말을 한단 말인가…?
"휴.. 소리를 지르려던게 아닌데.. 나도 참.. 아이같이 행동했군."
뒷자석에 있던 그녀의 가방을 건네며 머쓱하게 대꾸했다.
가방을 받아든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왜? 뭐가 잘못됐나?"
"더... 할말 없나요?"
"글쎄… 무슨 말을 기대하는거지?"
"음… 뭔가 굉장한 발언을 기대했는데… 아니면 말구요. 어쨌든 태워다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더 이상
볼 일 없겠죠? 그럼, 안녕히 가세요."
예후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서서히 차를 출발 시켰다.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다고…? 글쎄… 과연 그럴까…?
피로를 느끼며 집으로 들어서던 란아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엄마가 아주머니의 머리를 휘어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네이년!!! 니가 뭔데!!! 니 까짓게 뭔데!!!! 내놔!!!! 내 남편 내놔!!! 내 놓으란 말야!!!!!!!!!!!!"
"아!!! 아아악!!!"
"엄마!!!!!!!"
신발이고 뭐고 벗을 겨를도 없이 달려가 엄마의 손아귀에서 아주머니의 머리카락을 분리하려 했다.
하지만 어찌나 세게 잡고 있는지… 도무지 여자의 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엄마!! 왜이래!! 왜 이러는거야!! 이거 좀 놓고 얘기하자. 응?? 엄마.. 엄마!!!"
"아아~!!!! 악!!! 아이구.. 란아야!"
"아주머니! 죄송해요. 조금만 참으세요! 엄마!!! 이러지마!!! 왜 이래!!!!"
"란아..? 란아니…? 흐흑,,,, 글쎄… 글쎄 이년이 니 아빠를 꼬드겨서 딴 살림을 차렸지 뭐니!! 내가..
내가 이렇게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너!!! 이년!!! 얼른 내 남편 못내놔???!!!! 엉???!!!"
"엄마!!!! 엄마, 정신 차리자.. 응? 엄마.. 우선 이 손좀 놓자.. 응? 아니야.. 이 아주머니 간병인
아주머니시잖아. 잘봐… 응? 그래.. 옳지… 그래 엄마… 잘봐.. 아주머니 알지? 응?"
"누..구…?"
"자… 잘 봐바. 아니지..? 자..엄마.. 우선 들어가서 좀 쉬자.. 응?
"으…응."
방금 전까지 길길이 날뛰던 사람과는 달리 온순하게 변해버린 엄마를 방에 뉘이고 밖으로 나와 보니,
멍하니 앉아계시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해요."
이런일을 당하시고도 계속 계시진 않을거야..
눈 앞이 캄캄해 진다.
지난 날… 5년여의 입원 끝에 나아지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 자신의 의지 없이는 그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는 걸…
언제까지고 병원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한 달에 네번 밖에 볼 수 없는 현실에도 진력이 났었다.
그래서 강행했던 일인데…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다해도 주변에 해를 끼치거나 한번도 사람에게 해코지 한 적 없던 엄마였다.
하지만 이런일이.. 한번 두번 세번… 계속 반복되다 보면… 어떻게 될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에 다녀와야 겠다.
"란아야… 엄마가… 많이 힘드신가 보다."
"… 죄송해요. 정말.. 너무 죄송해요. 이런 일을 당하시게 하고…."
"괜찮아. 처음에야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왔지만,,, 너희 엄마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고,,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이해해."
"휴… 아주머니… 정말… 너무 …. 너무 감사해요."
"괜찮대두….아이구.. 삭신이 다 쑤셔서 오늘은 집에 못가겠다. 아들내미한테 오늘은 자고 간다고
전화해야겠네. 나는 좀 들어갈께."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며 아주머니는 들어가셨고…
나는… 그 후로도 한참을 앉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없을 악몽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월차를 내고 아침 일찍 엄마와 병원으로 향했다.
여러가지 검사를 하더니 엄마와 대화를 나눈다.
매번 똑같은….
차라리 다친거라면 점점 나아지기라도 할텐데….
그런 모습 보면서 희망이라도 생길텐데…
언제쯤이면 나아질런지…. 아니 나아지기는 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일찍부터 서둘러서 인지 몹시 피곤하셨나보다.
엄마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의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럼…다시 입원을 해야 한다는 건가요?"
"네. 현재로선 그수밖에 없네요. 망상적 장애까지 겹쳐져 매우 혼란스런 상태고 수면장애까지
보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어제 같은 발작이 언제 또 일어날 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면회는 제한이 없는 건가요?"
"우선.. 지난번과 같이 일주일에 한번으로 합시다. 경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구요."
입원 수속을 하고, 잠들어 계신 엄마를 바라보다 언제쯤 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에 있었고,,,, 어느덧 내 방 침대에 누워있다.
이럴 때 일수록 더 기운내야 한다는 걸 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지만 억지로 일어나 어제 저녁부터 비어있던 뱃속에 음식을 밀어넣었다.
좀 전보다 훨씩 맑아진 머리로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우선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당분간 입원하게된 엄마의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집안의 모든 이불 빨래를 시작했다.
다음엔 청소…
열심히 청소기를 돌리다 쇼파 밑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가방을 발견했다.
아.. 어제 정신이 없는 바람에 버려뒀었지.
그사람… 분명 뒤져봤겠지…?
혹시 민망스런 물건이라도 들었었나 해서… 자리에 앉아 내용물을 확인해 나갔다.
그러다 지퍼 안쪽에 자리잡은 기분나쁜 물건을 발견했다.
세상 어떤 사람이 이걸 기분 나빠 하겠냐만은….
흥!!! 필요 없다 했을텐데.. 그대로 넣어뒀다 이거지…?
신경질적으로 통장을 잡아빼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고 심지어는 한쪽 볼을 꼬집어야만 했다.
"아!!!"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정말 100억이다.
아무리 두 눈을 비벼보고 볼을 꼬집어 보고 숫자를 거듭 세어보아도 변함없는 100억이다.
이럴 수는 없어.
첫 장을 들춰보니 예금주가 한란아다.
하!!! 참…
어느 은행이야?
아무런 서류도 없이 턱하니 내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다니… 돈의 힘인가…?
잠깐… 잠깐… 생각을 해야해…
100억…?
정말로 이 큰 돈을 나한테 줄 만큼 김하민이 대단한 존재야…?
그 사람은 대체 누구지…? 김하민과는 어떤 관계야…?
다시한번 100억이라는 숫자를 쳐다보자 침이 꿀꺽 넘어갔다.
돈 앞에 나약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이 돈이면… 이 돈이면…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 돈으로 세상에 못 할 일이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 김하민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통장의 무게가 100톤쯤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거… 엄청난 일에 휘말려 버린거 아냐…?
탁자위에 고스란히 올려진 통장을 노려보기만 2시간째다.
그동안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김하민은 만들어낸 이유이고,, 조폭의 세계든 어디든 돈 세탁쯤으로 나한테 넘어온거 아닌가…?
언제 어느 순간 우리집으로 쳐들어 오는건 아닌지…
저걸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만지기조차 겁이났다.
하다 하다 생각해 낸 것이 은행으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엄지와 집게로 조심스레 집어드는데,,, 그 사이로 무언가 툭 떨어진다.
????
고개를 숙여 자세히 보니.. 핸드폰 번호와 [정 예 후] 이름 석자만 달랑 적혀있는 명함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이… 아니 그 이름이 어찌 그리도 반갑던지…
내 손가락은 어느새 그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몇번의 신호음이 가고… 드디어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이봐요!!!! 지금 어디에요!!!??? 당장!! 지금 당장!!! 그때 그 커피숖으로 와요. 알겠어요???!!!!"
흥분으로 소리치다 대답도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그리고 가방에 그 빌어먹을 통장을 쑤셔넣으며 집을 나섰다.
"딸랑~ ♬"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들어섰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나를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온다.
해가 붉은 노을을 배경삼아 멋지게 퇴장하는 지금… 그 노을의 여파가 저 남자에게도 미치나보다.
지금 막 그림에서 걸어나온 사람인 듯….
키는 그 때보다 더 커보였고,, 걸음걸이는 마치… 먹이를 노리며 다가서는 사자와 같이 유연하고
절제되어 보였다.
자리에 앉아 씨익 웃어보이는 그 때문에… 지금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생각해 내야만 했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줄 알았는데..?"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거만하게도 묻는다.
"네.. 그랬죠. 이 통장이 내 가방에 들어있다는 걸 몰랐을때는…!!!"
탁자 위에 소리나게 통장을 올려 놓으며 눈 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대체 뭐가 문제지…?"
"하!! 참.. 뭐가 문제냐고요??? 몰라서 물어요??"
"분명 당신이 100억이면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이봐요!!!그건!! 당신이 날 화나게 하니까 그냥 내 뱉은 말이라구요!! 대체… 당신 누구죠? 이게.. 이돈이 당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금액인가요!!??"
"아~ 화나서 그냥 뱉은 말이라 이거군… 몰랐소. 하지만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지…
당신이 김하민에게서 떨어진다는 각서를 나에게 넘겨주면 쓸 수 있게끔 해 놨거든.. 이를테면 미끼지..
어때..? 군침이 좀 도나?"
"이보세요. 정예후씨..? 대체 몇번을 말해야 알아 들을 건가요? 난 그사람과 엮일 생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고요. 이런 돈!! 저한테 줄 이유가
전혀!! 없는거에요. 아시겠어요? 당신 지금, 헛다리 짚는거라구요!"
"당신이 설사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안돼. 난… 돈은 믿어도
사람은 안 믿거든."
정말 고집불통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제 말을 믿겠어요? 단! 돈은 안되요."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 들었다.
한참을 마주보던 남자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대단한 자존심이군.. 좋아..그렇다면 사표를 쓰는건 어떤가..? 그만한 일자리는 다시 잡아주지.
원한다면 더 높은 지위를 줄 수도 있어."
"대신.. 당신 감시하에서 말이죠?"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당신.. 대체 누구죠? 이렇게까지 해서 절 차단하는 이유가 뭐에요?"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야. 예스. 노우로만 대답해."
"아뇨? 난 이유를 알아야겠어요. 그리고 결정해요."
"돈 아니면 더 높은 지위를 택하라고 했을텐데…? 너무 기어오르면 떨어지는 수가 있지. 다시는
올려다 볼 생각도 못 할만큼 짓밟힐 수도 있어..그때가서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걸 모르나..?"
섬뜩한 목소리로 시선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