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입니다.
허허, 이제 6시간 있으면 출근이군요.
낮잠을 어설프게 자버렸더니
아직도 눈이 또랑또랑...
이 사태를 어찌할지.
======================== 밤 새고 그냥 가야하나 ==========================
연극 준비가 마무리 될 때를 즈음해
학교는 개강을 했다.
보통 이맘때면
저글링처럼 몰려다니며 선배를 벗겨먹으려 드는
신입생들 밥을 사주느라
등골이 휘어야 정상이겠지만....
이미 동기들로부터 소외당해
새내기 배움터나 신입생 환영회마저 놓쳐버린 난
지금까지 후배들로부터
단 한 번의 연락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마 이번 신입생 중
내 존재자체를 아는 녀석도 없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다른 부원들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던 난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홍보연극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
연극부 홍보 공연
=메피스토펠레스의 단검=
공연일시 01.03.XX
주연 : 로맨티스트 안. 프린세스 민아. 닥터 기억.
전체적으로 검은 바탕에
손을 마주잡고 서있는 안군과 민아를
내가 싸늘한 눈빛으로 돌아보고 있는 포스터.
본래 주연에도 사이코 기억이라고 적힐 예정이었지만
그건 좀 불쌍하다는(?) 유니와 회계의 도움으로
간신히 닥터로 고쳤다.
이 포스터를 볼 때마다
=결국 이기는 건 나야=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안군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마치 이 모습이 현실이 될 것만 같은 기분.
이대로... 괜찮은 걸까.
기둥마다 포스터를 붙이며
도서관을 공대로 향하는 길.
건물 중앙에 있는 굵은 기둥에 포스터를 붙이고 있을 때
기둥 반대편에서 아주 먼 옛날에 들어본 것 같은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 - 야, 연극부에서 공연한다는 데?
?? - 그러네, 어?! 이거 기억이 아냐?
?? - 이런 젠장! 이제 좀 살만하다 했더니!
?? - 우리 또 숨어 지내야 하는 거야?
?? - 이럴 때가 아니야! 녀석이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
......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목소리들의 주인공은
지난 연극 때 나에게 티켓을 강매 당했던
친구1,2,3 등으로 불리는 녀석들인 것 같다.
?? - 그게 누군데 그래요?
?? - 그런 놈이 있어, 정말 악마 같은 녀석이....
??
-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사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지.
?? - 00학번 선배예요?
?? - 아, 나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 01학번 신입생들도 같이 있는 건가.
그것 참 잘된 일이로군.
신입생들과 오붓한 첫대면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난 주변을 지나는 인파에 숨어 녀석들에게 접근했다.
친구1
- 보나마나 이번에도 칼을 들고 쫓아와서
한 장에 5만원짜리 티켓을 강매할 거야.
기억 - 그럴 수가...
친구2 - 시범 케이스로 두세 명은 죽을지 몰라.
기억 -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놈이..
친구3 - 너희들도 조심해! 딱 이렇게 생긴.....
일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친구3의 손가락을 따라 나에게로 향했다.
......... 반가워, 친구들.
친구3 - 으아아악!! 기, 기억아!
친구1 - 하. 하. 하. 하. 오. 랜. 만. 이. 네?
나를 보자마자 혼비백산해서
후배들 뒤로 숨는 녀석들.
내가 어쩌다 이런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는 몰라도
딱히 슬퍼하거나 화낼 일은 아닌 것 같다.
친구2 - 그... 티켓 팔러 다니는 거야?
친구3 - 이, 이번에도 오천 원인가?
친구1
- 이런, 기억이가 주연이라니
이거 안 살 수가 없겠는 걸?
친구2
- 그러게, 아무래도 깔끔하게
2 장은 사야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이전에 자기들끼리 한 말이 있어서 그런지
순순히 티켓을 사겠다고 나서는 녀석들.
이 기세를 몰아 조금만 협박하면
자기들도 후배들 앞에 험한 꼴은 보고 싶지 않을 테니
한 사람당 세 장씩은 팔 수 있을 것 같지만....
기억
- 안타깝게도... 이번 연극은
신입생 모집을 위한 거라 무료다.
쿡쿡쿡쿡.... 다음을 기약하지.
난 그렇게 녀석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포스터를 마저 붙이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내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흠칫 떨던 녀석들의 반응.
쿡쿡쿡.... 나쁘지 않은 걸.
그리하여 연극 당일.
김씨 - 오징어! 땅콩! 콜라, 사이다, 팩소주 있어요!
허씨 - 꽃! 사탕! 맥주병! 마음대로 던지세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입구 근처에 진을 치고
장사판을 벌이고 있는 김씨와 허씨.
바가지로 폭리를 취하는 게 아닌데다
새치기를 막아주는 효과도 있었기에
회계는 그들의 장사를 허용하고 있었다.
연출 - 덩치 분장 끝났지? 박군 이리 와.
박군 - 저 아직 옷 입어야 하는데요.
연출
- 넌 인마 좀 빠릿빠릿하게 못하냐?
빨리 옷 갈아입고, 어깨 이리 와.
분장을 비롯한 준비가 한창인 무대 뒤.
시끌벅적한 바깥에 비하면
오히려 대기실 안이 더 차분한 느낌이었다.
민아 - 기분 어때?
기억 - 음.... 괜찮아. 넌?
민아
- 난 너무 두근거려.
이렇게 큰 데서 공연하는 건 오랜만이거든.
신입생 홍보라는 명분과
무료입장이라는 엄청난 어드밴티지로 인해
이번 연극엔 엄청나게 많은 수의 관객이 몰렸고
공연장 또한 그에 부족하지 않은 대강당이었다.
만약 이 강당이 가득 찬다면
800 명이나 되는 사람이
우리 공연을 보기 위해 왔다는 소리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얼마 안 되겠지만...
기억 - 잘할 수 있을 거야.
민아 - 응....
난 가만히 옆에 앉은 민아의 어깨를 안아
내 몸에 기댔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난 민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뒤
등 뒤에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민아 - 저기.... 기억아.
기억 - 응?
민아 - 아.... 아냐. 아무것도.
그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을 생각하기엔...... 어쩐지 피곤하다.
머리가 너무 무겁다.
공연을 바로 앞에 두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마음.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자리한
미혹에서 비롯한 회의감이었다.
민아 - ..... 분장해줄까?
기억 - 나야 고맙지.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는 그녀의 제안.
그녀는 곧 분장사에게로 가
메이크업 베이스를 포함한
기본 화장품 몇 가지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가 꼼꼼하게 베이스를 먹이는 동안
난 잠시 망설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기억 - ..... 나랑 연극할 때 무슨 생각해?
민아 - 응? 무슨 말이야?
기억
- 그러니까.... 내가 연기하는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어?
아니면 같이 연습하는 동안이나...
민아
- 음..... 글쎄. 딱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기억이는... 음.... 검은색 같아.
검은색이라..... 별로 좋은 이미지는 아니다.
물론 난 검은색 옷을 즐겨 입고
검은색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건 단지 색깔을 맞춰입는 게 귀찮아서일 뿐...
그 색 자체가 주는 인상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검은색은 탐욕스러운 색깔이다.
모든 빛을 집어삼킨....
민아
- 왜... 흰 바탕에 글씨를 쓰면
노란색이나 연두색 같은 건 잘 안 보이잖아?
그런데 기억이가 있으면....
그런 색깔 하나하나가 다 돋보여.
그림에 윤곽선을 그려놓은 것처럼
모든 게 굉장히 선명해져.
그래서 난... 기억이랑 연기하는 게 굉장히 즐거워.
기억 - ..... 그렇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그녀의 감상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오름차순으로 Sort 된 것 같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네가 즐겁다면.... 그걸로 됐어.
회계 - 오.... 기억이, 느낌이 팍 사는데?
분장 - 그러게요, 더 손 볼 것도 없겠는데요?
민아가 한 분장을 보면서
저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역할이 역할이니 만큼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연출
- 앞으로 기억이 분장은
그냥 민아 네가 전담하는 게 낫겠다.
러브러브 파워 메이크업! 하면서...
민아 - 아이 참, 뭐예요 그게~.
연출 - 하하.... 그런데 너 왜 아직도 맨얼굴이냐?
민아 - .... 아차!!
내 분장을 해주는 데 열중해서
자기 분장을 잊어버린 민아는
서둘러 분장사에게 뛰어갔다.
그래도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잠시 후, 연출의 멘트와 함께
무대의 막이 올랐다.
연출
- 레이디기디기디기딕엔디스~
엔 줴루줴루줼줼줴룰 뭬~엔.
웰컴 투 아월 쀄스뛰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