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국전기00 제품검사1팀에서 연마검사에 종사하는 <이종철>의 아내 <오길정>의 언니입니다. 제 동생 <오길정>은 지난 11월 18일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이미 떠나버린 생명, 이렇게 글을 올린다고 다시 돌아올 수야 있겠습니까만, 너무나 억울하고 서글프게 죽어간 동생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그 영혼이라도 위로하고 싶은 심정에 그 동안의 과정을 여러분께 호소하고자 합니다.
사연이 너무 절절해서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에 한을 안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가슴 아픈 삶을 불쌍히 여기시어 끝까지 읽어주시고, 다음 세상에서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명복을 빌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 동생은 지난 해 4월 뇌종양선고를 받았습니다. 암세포가 너무 깊이 자라서 수술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저희 가족은 하늘이 무너질 듯 기가 막혔습니다.
서울 중앙병원에서는 동생을 포기하라는 식으로 말을 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담당의사와 상의 끝에 방사선 치료라도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동생은 뇌종양이라는 사형선고보다 더한 상처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누구보다도 가슴아프고 안타까워할 것이라고 믿었던 남편 이종철의 비인간적인 양면성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입원 날짜를 받아 구미에 갔을 때 동생이 회를 먹고싶다면서 이종철에게 사달라고 했더니 먹고싶으면 나가서 사먹으라고 하더군요. 저는 과연 이것이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인가 싶어 어이가 없었습니다. 머리가 아파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생을 데리고 나가 떡과 오징어를 사주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방사선 치료는 통원 치료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구미에서 서울까지 통원치료를 다녀야 한다는 말에 이종철이 직장문제로 고민을 하더군요.
저는 당시 청주에 살고 있었는데, 구미보다는 청주가 서울 다니기 편하고, 환자는 환자고 아이들도 있고 하니 직장은 계속 유지하도록 하라며 제가 동생을 데리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엄마와 안 떨어지려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청주로 갔습니다. 강릉에 사시는 친정어머니가 청주에 오셔서 아이들을 돌봐주셨는데 어머니마저 병이 들어 다시 강릉으로 가시게 하고 아이들은 구미 할머니 댁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려 가면서 저와 동생에게 일주일에 한번은 꼭 데려온다고 약속했고,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처음 몇 번의 약속만 지켜지고 그 다음은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동생은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식이요법과 방사선 치료, 그 감당하기 어려운 과정을 "그만 할래, 먹기 싫어"하는 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꿋꿋하게 치러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참을 수 없었는지, 아이들이 보고싶다며 자꾸 울었습니다. 남편에게 전화로 간곡히 사정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동생을 차마 옆에서 볼 수가 없어 저는 밖에 나가 하늘을 보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차라리 이웃 사람 병 문안 오듯 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병 문안 오신 분들이 치료비에 보태라고 조금씩 주고 간 돈을 기름값이다, 용돈이다 하며 오히려 가져가는 치사한 면모를 보이는가 하면, 하루에 보리차 한번 못 먹고 맛이 이상한 나무뿌리 물을 마시고 구운 마늘 50통씩 죽염소금에 찍어 먹으며 지내는 동생이 어쩌다 맛있는 것 좀 사달라고 먹지도 못하면서 응석을 부리면 남자가 여자의 심부름을 하느냐는 식으로 면박을 주기 일쑤였습니다.
큰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직장 잘 다니고 일주일에 한번 와서 동생한데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고, 위로 전화라도 자주 해주길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동생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매일 눈물로 침상을 적시곤 했습니다. 보고픔과 그리움에 동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구미로 갔습니다.
병세도 점점 나빠져 방사선 치료 34번을 다 받고(방사선은34번이 끝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생과 사를 넘나드는 위급한 상황을 몇 번이나 넘겨야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대체의약병원(옥천병원)에 입원했는데, 급기야는 혼수상태에 빠져 구미 차병원 중환자실로 옮겼습니다. 의사는 이틀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삶의 의욕이 강한 동생은 다시 깨어났습니다.
일반병실로 옮겨졌지만, 의사는 희망을 갖지 말라고 하더군요.
단 1분도 앉아 있지도 누워 있지도 못하며 아프다고 울부짖는 동생을 저와 엄마, 그리고 이종철이 교대로 간호하기로 했습니다.
제부(이종철)가 1개월의 휴가를 내어 교대로 간호한지 3일째 되는 날, 저는 들어서는 안될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주 잠깐 나갔다오는데 제부가 병실 밖까지 들릴 만큼 "어떻게 하라고! 1분도 못 있고 뉘어달라 앉혀달라,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하며 소리소리 지르더군요.
"미진아빠, 미진아빠, 나 좀 어떻게 해줘"하는 동생의 소리를 들으며 병실에 들어간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습니다.
동생은 침대에서 몸을 비틀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의자에 앉아서 딴청을 하고 있더군요.
저는 너무나 기가 막혀 "얼마나 아프면 그러겠느냐" 한 마디 했습니다. 그랬더니 횡하니 옷을 들고 나가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 소식 없이 오지 않더군요.
겨우 이틀, 그것도 낮에 잠깐 간호했을 뿐이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내를 두고 화를 내며 나가서 연락도 없는 남편….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냉정하고 비정할 수 있는 건지요.
밤 새 동생을 앉혔다, 눕혔다 하면서 저도 모르게 원망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동생은 하염없이 울기만 하더군요.
그때까지도 동생은 자기가 시한부 인생인 줄도 모르고 치료만 받았습니다. 저희 가족과 이종철의 가족 밖에 모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종철은 아내가 암선고를 받은 뒤로도 직장에만 충실하게 다녔지, 응급실에 실려 가는 것 한 번 지켜본 적도 없고, 통원치료 한번 같이 간 적도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것도 겨우 이틀인데 그것을 못 참고 나가버린 것입니다.
제 동생은 암보험을 3개나 들어 병원비도 넉넉히 나온 상태였습니다. 저희 집에서 치료하는 7개월 동안 병원비와 약값 이외에는 그 돈을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장사하던 것도 문을 닫고, 암에 좋다는 식품, 좋다는 약이 있다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허둥지둥 달려나가 제 돈으로 그것들을 사다 먹였습니다.
제부가 검소하고 생활력이 강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냉소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왼쪽에 마비마저 온 동생에게, 그 정신도 없는 상태의 동생에게 그 사람은 숨겨놓은 돈이나 누구 빌려준 돈 있으면 말하라고 하더군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가끔 정신이 들 때마다 마치 고문이라도 하듯 말입니다.
이게 8년을 남편이라 믿고 살아온 사랑하는 아내에게 할 수 있는 짓인가요?
동생은 이종철이 없는 틈을 타서 제게 울면서 자기를 저 사람에게 맡기지 말라고 하더군요. 언니가 항상 옆에 있어달라, 보험이라도 들어놓아서 지금까지 버티고 앞으로도 병원에 갈 수 있지 그것마저 없으면 저 사람은 돈이 아까워 나를 버렸을 것이라며 우는 동생을 지켜보
는 제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내는 생과 사를 왔다갔다하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디에서 들었는지 저에게 동생이 죽으면 보험금 얼마가 나오는데 합의를 보자고 하더군요.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남편으로서 아직 죽지도 않은 아내에 대한 보험금을 그 아내의 친정식구들한테 논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시간이 가면서 점점 이종철과 그 식구들(시어머니와 시누이)은 보험금에 눈이 어두워 이쯤해서 포기하고 퇴원시키라는 둥, 집으로 데려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둥, 마치 모르는 사람이 말하는 투로 저와 저의 어머니께 설득을 하더군요.
제가 극구 반대를 하자 화를 내며 그러면 6인실로 병실을 바꾸자고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동생은 관장시켜야 대소변을 볼 수 있었고 여러 번 고통을 호소했을 때입니다.
의사와 제가 6인실 병실을 반대하자 그때부터 제부는 퉁퉁거리고 동생을 돌보는 일도 마지못해서 하는 게 확연히 보였습니다.
제부는 다시 출근을 시작했고 퇴근 시간에 잠깐 얼굴만 비추었고, 저와 제 어머니가 같이 병원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샤워실에서 빨래를 하는데 악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동생은 통증을 못이기고 혼절해서 꼼짝도 안하고 있는데 제부는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못 들었답니다. 물 소리나는 데서도 듣고 나왔는데 어떻게 그 옆에서 안 들린다고 그냥 누워있을 수가 있습니까? 저는 지금 이 글은 쓰면서도 심장이 떨립니다.
동생은 점점 남편에 대한 마음이 서운함과 배신감으로 바뀌는 듯 했습니다. 어느 날 저한테 보험회사에 있는 모든 상속권을 저 앞으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자기 자식들 앞으로 돌려주던지 언니 보증 하에 남편과 함께 아이들 앞으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고, 지금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습니다.
그 가까운데 있어도 토요일 날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도 마지못해 데려오고, 나중에는 제가 데려오고 데려다주었습니다. 그 인간 인상 쓰는 것도 보기 싫고, 동생한테 뭐 애들이 보고 싶냐고 구박하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전신마비가 오고 두 눈이 모두 실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6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법상 퇴원을 요구해 다른 병원을 두 군데 갔지만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그 인간과 상의 끝에 일산국립암센터에 입원을 했을 때 의사선생님들이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최선을 다해보자고 해서 제 동생은 항암 치료를 세 번에 걸쳐 받았습니다.
TV에서 보셔서 항암 치료가 얼마나 힘든지 아실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1주일에 한 번 오기는커녕 전화조차도 일주일에 두세 번밖에 안 했습니다.
동생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도 아이들을 기다리고, 전화를 기다리면서 눈물만 흘려 보는 일들로 안타깝게 했습니다.
이종철의 형제자매는 3녀 2남입니다. 그 시누이 시동생들조차 청주에서 있을 때부터 구미병원, 암센터를 거치는 무려 몇 개월 동안 찾아오기는커녕 전화한통 없었습니다.
동생의 시어머니는 구미에서 암센터로 옮길 때 그만 포기하지 다시 병원으로 간다고 저희 엄마한테 괜한 짓이라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 후로 전화한통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에 대한 동생의 그리움은 증오로 변했으며 시댁 식구들에 대한 서운함이 커져 마음의 병이 더 깊어갔습니다. 그래도 부부의 정이 뭔지 날짜를 물어보고 남편 쉬는 날은 기다리고 있다가 오질 않으면 더 먹지도 않아서 더 아파했습니다.
온다고 해놓고 전화조차 없는 날은 제가 보다 못해 전화를 걸면, 뭘 기다리느냐고, 사정이 있었다고 툴툴거렸습니다.
한번은 병실에 와있는 그의 전화에서 여자목소리가 들리자 밖으로 나가서 받고 왔습니다. 동생이 누구냐고 물으니 딸이라고 둘러댔습니다. 그러면 바꿔주지 그랬냐는 동생의 말에 뭐하러 바꿔주냐며 면박을 주더군요. 시어머니가 암과 싸우고 있는 며느리한테 "너 신랑이 바람 피우면 어떡하려고 자꾸 아프냐"고 하더니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지난 10월 26일 동생이 위급해 보이자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국립 암센터에 8개월 동안 있었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은 2번, 시어머니 시누이들의 전화는 1통밖에 없었습니다.
동생이 죽는다니까 시어머니와 시누이 2명이 새로 만난 남자와 같이 왔더군요. 저희 어머니가 사돈을 보자 20개월 동안 참고 있었던 울부짖음을 토해냈습니다.
8개월 동안 전화한통 없었다가 죽을 때 되니까 올라왔느냐고요. 그 순간 병원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병실에 데려다 주는 시간에 시누이들과 같이 온 남자들이 저희 어머니 손목을 비
틀어 퉁퉁 부었는데 이종철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제가 막내 시누이 뺨을 한대 때렸더니 그 남자가 제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습니다.
주위사람들과 경비들이 와서 싸움을 말렸습니다. 아이들을 놔두고 동생 시댁 식구들은 그냥 내려갔는데, 그 이튿날 이빨이 부러져서 저를 고소한다고 하더군요. 기가 막히다 못해 정말 우스웠습니다.
동생은 무의식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은 지금 당장 죽을지 모르는 아내한테 귀찮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더군요.
동생은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무의식 중에서도 저와 엄마가 부르면 대답을 하고 남편이 부르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2002년 11월18일 오후 6시에 동생은 살며시 엄마 손을 놓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화장을 해달라고 유언을 했었습니다. 엄마와 제가 제부한테 당부를 했습니다.
"젊어서 죽었으니 유언대로 화장을 해주고, 자네나 시댁식구들한테 섭섭한 게 많으니 절에서 49제를 지내줬으면 하네. 그동안의 병원비는 보험금에서 90%는 됐고, 보험금이 넉넉하게 나올테니 먼저 자네 돈으로 지내주게. 그리고 보험금 가지고 애들을 위해서 살게."그는 "그럼요, 그럼요. 다해줄 겁니다." 그랬었습니다.
나중에 어느 절에서 하느냐고 삼오제날 가려고 하니까 알려달라고 하자, 머뭇거리다가 기독교신자라해서 49제는 할 수 없어 하지 않았다며 이제 우리 집 귀신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 동생은 교회에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병원에 있을 때, 돌아다니면서 기도해주는 목사님한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기도 몇 번 받았고 찬송가 조금 틀어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종철, 그 사람이 교회를 한 달 다녔다고 하는데, 그래서 기독교 신자라 할 수 있습니까?
49제에 드는 돈 500만원 아까워서 올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 다 잊고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화장하는 날 동생의 영정사진까지 다 태워버린 사실을 알고 나서는 너무나 기가 막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 8년, 제 동생은 제대로 된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겠다고 노력하며 참 알뜰하게 살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것도 원통한 일인데 그렇게 비참하게 투병생활을 하고 죽어서 영정사진까지 태워 없애버릴 만큼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돈 때문이었을까요? 돈 때문에 8년 동안 아이들 낳아 기르며 함께 산 아내가 암에 걸렸다고 그렇게 가슴에 한 맺히게 만들어서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을까요?
병원비의 90%는 보험에서 냈고, 죽으면 1억이 넘는 보험금이 나오니까 돈 때문에 그랬을까요?
제 글이 감정적이고 일방적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너무나 속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여동생, 누나가 우리 동생처럼 죽어갔다면 어떤 심정이시겠습니까?
이종철, 그 인간, 지금까지 전화한통도 없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