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날 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우리엄마야."
결국 선주가 원하는 대답을 회피한 추림은 조금전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자신에게 사랑하는 여자는 현재 어머니가 유일했으므로...
추림이 선주를 놀린 것이다.
"뭐야?"
그러자 당연한 반응이 선주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추림을 결코 미워질 수 없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 이야기 하나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지만 추림은 담담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그럼 추림은 여자 친구가 없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나랑 사귀는게 싫은거야?
내가 너무 뻔뻔하게 느껴지니? 아니면 이상형이 아닌거야?"
노골적인 말들이 서슴없이 흘러 나왔고 그 원색적인 발언에 아주 당연한 모습이었다.
두 무릎을 모으고 앉은 자세로 선주가 따지듯 물었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는
담배를 입에 문 추림이 머리를 잠시 흔들었다. 담배연기가 폐로 가득히 몰려들자
현기증이 일은 것이다. 추림의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을 바라본 선주가 손을 모아
가슴에 대며 어쩔줄몰라했다. 추림은 분명 병자인것이다.
"선주씨?"
추림이 정색한 음성으로 선주를 호명하자 갑자기 근엄해진 추림의 말에 선주가
놀랐는지 얼굴을 약간 굳혔다.
"난. 선주씨에게 아주 친한 친구가 되어 들릴 수 있어요. 때론 오빠가 되었다가
때론 동생도 되어주고 그런 사이가 되어들릴 수 있어요. 선주씨가 나의 어디를
마음에 들어서 좋다 아니다를 평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겐 적어도 기회
정도는 주셔야 하는게 정상이라고 봅니다. 또 우린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어요.
각자의 삶을 모르고 있다거나 그러는 것이 아닌 내면에 있는 진정한 당신이라든가
하는거 말입니다. 전 그 느낌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요.
예. 전 섹스한번 못해본 멍청하고 천기같은 놈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상하거나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단지 조금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을 뿐입니다.
섹스의 최초 대상이 누가 되는 것 따위는 상관이 없어요. 어자피 살아가며 경험해야
할 일이라면 아주 근사한 상대인것은 좋겠지요..."
말하는 와중에 선주가 추림의 담배갑을 집어 담배 한개피를 꺼내 입에 물자
추림의 말은 단절되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가끔식 피곤해요. 계속해봐요."
자연스럽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선주의 입술이 동그랗게 말리며 앙증맞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이... 섹스 상대나 사랑의 존재가 선주씨라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대상이거나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일겁니다. 그건 선주씨도 동의할 거예요.
선주씨는 분명 후회할 거예요.
선주씨에게 내가 좋은 것은 단지 내가 전혀 새로운 남자라거나 다른 삶의 종류에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몰라요. 선주씨가 제 집에 서너번 오는동안,
만약 내가 삿된 마음을 먹었다면 아마도 우린 벌써 그런 상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선주씨. 전 아직 삶에 대한 경험이나 다양한 인생의 질곡을 모르고 있어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해가며 살아가야 하고 포기하고 선택하고 강요당하고,
그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쯤은 알아요. 하지만 그 와중에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요. 만약 내가 선주씨를 사랑한다면...! 만약...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
죽는 순간까지 그 사랑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예요. 이해하시겠어요?"
말하자면 추림은 자신을 지켜주었다거나 비겁하지 않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긴 어떤 남자가 멀쩡한 처녀를 둘만의 공간에서 올곧이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친구들이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통해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을
직접 보거나 들어왔다.
'정말 말을 잘하잖아? 똑똑하기도 한 것 같은데...'
내심으로 추림을 그렇게 평가하며 선주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 추림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야릇한 마음이 들었다. 뭐랄까...?
아주 아끼던 물건 같은것이 사라졌다가 어느날 다시 돌아온 기분이랄까?
깊은 상처가 회복되고 난 후의 홀가분하고 새로운 기분이랄까?
그가 해주는 저녁 식사는 생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찬이었다.
겨우 된장찌개와 생선튀김, 반찬 몇 종류에 불과했지만 아주 깔끔하고 정성스러웠다.
남자가 그렇게 요리를 잘할 줄 안다는 것은 한국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것도 보통 음식 솜씨가 아니었다.
겨우 몇년 사회생활을 통해 그 정도까지 솜씨를 발휘한다면 그는 매우 세심한
남자였다. 무엇 하나를 해도 정성과 마음을 다하는 남자고 심려 깊은 사람이라는
것이 식사하는 동안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식사 후, 술자리를 가지며 다시 놀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사회와 경제 정치에 두루 박식했고 국문학쪽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겨우 스무살 남짓한 사내가 지니고 있을만한 깊이가 아니었는데 그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이 놀란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게 아니고 추림은
술자리 내내 이야기의 주제를 끝임없이 만들어 내었고 하나의 주재를 가지고 네개의
논리를 나누어 자신과 미선언니 그의 남자친구에게 과제로 주었다.
말하자면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네명이서 대화해 나가는 토론 형식을 유도해 낸
것이다. 결코 혼자 말하거나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시켰는데,
가끔 필요에 의해 다른 설정이 요구 될때는 그는 그것마저도 융화시켜 버리는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이 사람을 누가 고등학교도 겨우 다닌 남자라고 볼까?
보면 볼수록 신기한 남자였다.
미선언니와 대준씨에게 들었을 때 반신반의 했지만, <재주가 아까운 놈이야.>
막상 보고나니 왜 이제서야 알게 되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뻔뻔해 진 것인데...
자신의 방법이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았다.
자신은 사랑이나 우정 같은 깊은 감정의 이입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중학교때 일본으로 유학갔고 공부에 매달렸으며 고등학교는 문화와 경제의
대국인 미국에서 졸업했다. 두 나라는 현재 세계의 최대 강국이었다.
문화마저 최상위에 달한 나라이므로 인간관계 따위는 아주 단순했다.
섹스는 자연스러웠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알게 되는 동안만 중요시되는 나라였다.
그리 공부에 큰 재주도 관심도 없어 집안에서 원하는 최상위 학벌로의 진입에
실패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한국으로 귀국해 버렸지만 두 나라에서 경험하고
익숙해진 문화와 생활 패턴은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유년과 사춘기 시절을 참 멋없고 삭막하게 보낸 자신은 그래서 서툴렀다.
친구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남녀의 깊은 관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어린아이 달리기 같은 것이었다.
좋으면 좋은가보다, 싫으면 싫은가보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남자들이 다가서면 이상하게 싫어져서 질색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도 본능 같은 것이었나 보다. 마음이 움직여 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거리감이었는지도 몰랐다.
소위 말하는 퀸카쯤 되는 클라스에 속한 자신이었다. 집안 좋고 학벌도 그리 달리지
않는다. 중, 고등학교를 유학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자격이 생겼다.
명지대가 그리 대단한 학벌에 속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일류 대학으로의 진학은
자신이 포기했다.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삶이 그리워 최고라는 길에서 강요당하기
싫은 선택이었다.
추림은 달랐다. 자신의 삶에 소신이 있는 남자였다.
허영끼없고 밝고 명랑했다. 그러면서 굵은 남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호기심과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다가가려 했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떨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남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추림에게 말하고 행동했는데...
<우리 섹스할래?> 너무 잘못되었던 행동이었다. 추림은 한마디로 다른 남자였다.
자기 주관이 명료하고 뚜렷했다.
세상에 이런 남자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위엄도 느껴졌고 그건 곧바로 카리스마가 되었다.
그가 말한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는것과 신뢰와 믿음은 아마도 그가 제일
우선시하는 덕목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남녀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그의 철학적
내면을 형성했을 것이다. 섹스 따위는 이성간에 얼마든지 가능한 행위라고
인정하면서 이성의 감정 이입내에 섹스가 큰 부분을 지니지 않는다는 논리...
사랑한다면 영원하다 싶어하는 순정파 남자!
그러면 자신은 그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대해야 하는걸까? 그게 너무 어려웠다.
'그가 나와 섹스를 하면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니... 바보... 창피해...'
속으로 생가한 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은 아닌지 혹 몰라 고개를 푹 수그렸다가
슬그머니 들어 추림을 보자 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생각이 참 많은 남자였다. 항상 뭔가 생각하고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한번은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물어보니 그가 대답하길...
<저기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라요> 그 알수 없는 말만 들여왔다. 더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생각이 전해지는 듯한 감동이 느껴지는듯했다.
"난 선주씨에게 지금 단하나 줄 수 있는게 있어요."
가만히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져있는 선주의 귀로 추림의
나직한 음성이 부드럽게 들려왔다.
"정말...! 자꾸 요요 할거야?"
언제부턴가 시작된 존댓말이 거슬려 선주가 빽하고 소리치자 추림이 특유의
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저 들어요. 선주씨. 내가 지금 선주씨에게 우정을 드릴께요.
그것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거든 내게 말해요.
어쩌면 나도 그럴지도 모르잖아요?"
".....!"
말 잘하는것이 재주가 아니다. 말을 요령있게 설득력있게 전하는 것이 재주다.
추림은 말에 관한한 재주가 탁월한 남자였다. 그는 욕도 잘하고 때론 거친면도
있었다. 같이 근래에 저녁 식사를 하러 밖에서 만나는 동안 그의 그런면도 보았다.
한없이 자상하거나 부드러운 남자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욕을 하면서도
전혀 꺼리낌이 없었고 눈치따위는 보지도 않았다.
욕하고 난 후 미안하니, 심했다는 둥 하는 말을 했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뻔뻔하고 당연하듯이 행동했다. 할말은 하고, 하고 싶은 행동도 하는 사람이었다.
'기회를 주는건가? 아니면 이게 뭐야?'
"속으로 깊게 생각할 거 없어요. 우린 앞으로 여전히 좋은 친구가 될 거예요.
분명한 것은 선주씨와 내가 남자와 여자라는 사실이고 아직은 서먹한 사이라는
거예요. 이해하지요?"
이건... 신뢰다. 믿음을 가져 보자는 이야기다. 서투른 관계보다는 더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강요가 아닌 본질적인 문제였다.
'날... 믿고있어. 지켜주고 싶은거야... 고마워요 추림씨!'
진한 감동이 느껴진 선주가 추림에게 다가가 덥석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이마에 입을 살며시 맞추었다. 추림은 가만히 있었다. 그는 안다.
그런 행동은 선주라는 여자가 보고 배우고 몸에 익힌 인사법이라는 것을...
똑똑한 여자니 아마도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림의 마음에는
여전히 최선주라는 여자가 낯선 상대로만 여겨지고 있었다.
선주에게 샤넬의 향수 내음이 진하게 후각을 자극해왔다. 추림은 문득, 유미를
떠올렸다. 그녀라면 어쩌면... 고개를 살짝 흔들어 상념을 털어 낸 추림이 선주의
등을 몇번 토닥여 주었다.
* * *
"오늘 즐거웠어요?"
영훈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물어오자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정말 유미씨가 나올줄 몰랐어요. 그때 만나고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전화할까 망설였는데...
다리아프지요? 어디가서 식사라도 할까요?"
큰 키에 힌 피부를 지닌 강영훈은 마치 계집아이 같았다. 이틀전에 전화가 왔고
만나자는 제의를 해 와 유미는 기꺼이 응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마음에 든것은
아니었다. 오빠와 크게 다투고 기분이 안좋은 때였으므로 피하려는 요량으로
선택한 것이다.
오류동에 실외 스케이트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중학교 시절 스케이트를 배우고
선수로 활동한적이 있다는 영훈은 그걸 자랑이라도 하는듯이 죽어라고 달리고 또
달렸다. 별로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하는 유미의 손을 잡아가며 자세를 잡아주고
요령을 알려주고 아주 좋아라했다.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영훈에게서 뭔가 특별한 느낌이 느껴졌다면
몰두했겠으나 그는 처음 볼 때 부터 감정이 없었다. 힌 피부에 커다란 눈을 지닌
미남이었지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딱 계집아이 같았고 이기적이고 성급한
성격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식당을 찾아 들어가 부대찌개를 시켰다.
"유미씨. 제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나요? 하하... 뭐 그냥 궁금해서요."
멋적게 웃음지을 질문을 왜 하는걸까? 솔직하게 대답해 줄까하고 망설이다가
약간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네. 조금은 했어요."
사실이지만 지난 일에 대한 생각일뿐이므로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정말요? 와... 전 많이 생각나던데... 혹시 다른 친구들하고는...?"
역시 이 강영훈이라는 친구는 계집같은 남자다. 바로 칼을 들어 해부하려 들고
있었다.
"몇명이 전화했었요."
"그래요? 누구 누구요? 혹시 추림에게도?"
강한 호기심과 질시가 담긴 질문에 유미는 기분이 조금 상했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다. 남자들은 대개가 저렇다.
여자를 소유물로 단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를 더 열 올리게 하려고 작심한 유미가 입을 열었다.
"강수씨하고 석호씨가 전화 했어요. 여러번 통화했는데 아직 만나지는 않았어요."
그러자 영훈의 얼굴이 눈에띄게 싸늘해졌다. 아마 속에선 열불이 나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추림에겐 연락이 없었나요?"
유미는 그가 왜 그리 추림에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가지않았다.
"아니요. 추림씨는... 몰라요. 전화번호도 모르는걸요."
거짓말이다. 지난 번 석호와 통화하면서 분명 받아 적었고 그의 전화번호만을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아니 아예 외우고 있었다.
영훈의 얼굴이 부드럽게 변하며 웃음을 띄었다. 안심이 되는 걸까? 왜?
"추림씨하고 사이가 안좋나요?"
넌즈시 묻자 영훈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추림하고 가깝잖아요."
".....!"
식사가 나왔으므로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영훈이 소주 한병을 시키고 공기밥도 한그릇 추가시켰다. 가스버너위에서 찌개가
식욕을 돋구는 냄새를 풍기며 맹렬히 부글거렸다.
"한잔 받으세요. 오늘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잔을 두손으로 내밀자 투명한 액체가 잔에 가득 채워졌다.
자신이 직접 따라주려하다가 가만히 있자 영훈이 직접 잔을 채우고 바로 마셔버렸다.
"저기요? 물어볼게 있는데요?"
유미는 소주를 반쯤 마시고 영훈에게 입을 열었다.
"식사부터 하고 얘기하면 안돼요?"
이미 밥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은 영훈이 말하자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배가 조금 고프기도 했다. 이틀동안 제대로 먹지도 않아 상당히 허기져 있는
상태였다. 밥먹는 내내 고개를 단 한번도 들지않는 유미를 영훈이 계속 힐긋거리며
소주를 반병쯤 비워냈다.
"아까 뭘 물어보시려 했어요?"
거의 찌개와 밑반찬이 비워지고 조금 남은 것으로 술 안주를 삼아 소주 한병을 더
시켰다. 작은 포만감이 느껴진 유미는 피곤함이 밀려 왔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 그게... 추림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미안해요. 이런 질문해서요."
당연히 미안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에게 다른 이의 무엇이
궁금하다고 질문하는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유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미에게는 두가지 노리는게 있었다. 하나는 정말 추림이 어떤 남자인지
궁금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별반 마음에 들지 않는 이 강영훈을 멀리 하기위한
장치였다. 똑똑하고 눈치있다면 다음에는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유미가 볼 때 강영훈이라는 이 남자는 속이 좁고 편협했다. 질투가 심하고
은밀했으며 이기적인 성향이 짙은 남자였다. 지난번 통화에서 김석호와는 대조적인
스타일이었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던 굳은 얼굴의 영훈이 입을 열었다.
"추림은... 좋은 놈이예요.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잘하지 못했는데,
무엇이든 다 열심인 놈이었어요.
노는거하며 싸우는거하며 친구들 사이에서 최고로 통했죠! 왜 그런 얘들 있잖아요.
나쁜짓하면서도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는 친구 말이예요. 꼭 나쁜것은 아니지만...
추림이 그랬어요. 선생들도 추림만큼은 아주 어려워했어요.
한번은 중학교때 한 선생이 부당한 일로 학우를 심하게 매로 체벌한 적이 있었는데...
데모를 일으켰어요!"
"누가요? 이추림씨가요? 설마...?"
유미는 영훈의 말속에 질투가 베인것은 뒤로하고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궁금한 것들 중 일부를 알아가고 있는 와중인 것이다.
이쯤에서 당근 하나쯤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유미가 소주병을 들어 영훈에게
내밀자 영훈이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예. 그놈이 그랬어요. 난리도 아니었지요. 어땠는지 알아요?"
"......?"
이젠 자기가 이야기에 몰입하려 하고 있었다. 같은 동창이고 나름대로 친했다고
하니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겨우 열 다섯 살 된 놈이 글쎄 교무실로 쳐들어가서 그 선생에게 대들었어요.
얻어맞았지요.
당연하잖아요. 쪼그만 놈이 건방지게 굴었으니...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요.
체벌을 받은 친구가 추림이 아주 아끼던 놈이었거든요. 선천적으로 소아마비를
앓던 친구였는데 누구도 그 친구를 놀리거나 무시하지 못했어요.
그건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어요. 그 친구가 오해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어요.
어찌 됬는지 알아요? 그놈하고 석호하고 몇명이서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집합시켰어요. 광분한 추림이 선생들에게 항의 하면서 부당한 체벌에 대한
공식사과를 요구했어요. 엄청났지요. 바로 고등학교하고 붙어 있던 중학교라서
그 파급이 커져버렸지요. 선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아이들을 해산시키려 했는데,
추림이 아이들을 선동했어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술 때문인지 당시의 회상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영훈은 그렇게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며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사건일 터였다. 시골 학교라지만 그리 작지 않다고
수연에게 들었는데 정말 사건 중의 사건이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어요?"
유미도 흥분되었는지 술을 단숨에 비어내고 물었다.
"흠... 오전에 시작된 그 일이 오후로 이어지면서 연락 받은 학부모들과 파출소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군내에 있던 강원일보 기자까지 찾아오는 일이 벌어졌어요.
싸움이 일어났어요. 끝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학교측에 추림이 분개해서
그 맞은 친구의 몸을 공개했어요. 소아마비를 앓던 친구의 엉덩이와 허벅지 등짝이
아주 엉망이었어요. 추림이 울며 말했어요. 개돼지도 이렇게 패지 않는데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학교는 더이상 학교가 아니다라고말이예요.
그리고 몽둥이로 학교 창문을 거의 깨트리며 날뛰었어요.
지서에서 나온 순경들이 뜯어 말리다가 몸싸움이 심하게 벌어지고 고등학생 형들이
투입되어 해산시키려다가 사건이 더 커졌어요. 그런데 추림의 사촌 큰형님이란 분이
찾아왔어요. 그 형님이 아주 엄청나게 무서운 분이예요. 너무 유명해서 예전에
신문에도 나고 그랬어요. 혹시 칠공주라고 아세요?"
유미는 뜬금없는 영훈의 질문에 눈만 껌벅 거렸다.
"칠, 팔십 년대에 활동하던 여자 조직 폭력배들을 일컫는 말이예요.
소위 말하는 전국 주먹쯤 되는데...
다 여자로 이루어져 있어요. 말만 들었는데 추림의 사촌 큰 형님이 바로
그녀들의 대부로 알려진 분이래요. 강원도에서는 그분을 감히 어쩌지 못한다는
소리가 있어요. 하여튼... 추림이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있을 때 근처에 사시는
사촌 형님이 오셨어요.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파출소 직원들을 두들겨 패고
집어던진 일이예요. 이만한 칼을 빼들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걷자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 분을 석호놈이 불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어요."
영훈이 손을 옆으로 크게 벌리며 말했다. 그만한 칼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참 말재주 없는 남자였다. 그게 큰일은 맞지만 그렇게 세세하게 말해야 하는건가?
조금 지루해지려 하고 있을 때 영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놈이예요. 부당하거나 옳지 못한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놈이죠.
며칠후에 놈의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는데 보지는 못했어요.
의리있고 음... 소신도 있어요. 한마디로 남자들에게는 참 멋진 놈으로 통해요.
운동 잘하고 성격좋고 친구들 많고...
뭐 그게 사내의 기준이 되는 잣대가 아닐까해요. 사회에 일찍 나오게 된 것도 순전히
재수가 없었던 건데... 추림이 얘들을 참 많이도 도와주었어요.
그놈 무서운 놈이에요. 한번은 친구 한명이 조직세계에 가담했다가
빠져나오려고 해도 어쩌지 못했는데 그 친구를 추림이 구해 주었어요.
결국 그 친구는 쫒기다가 설악산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실족사로 밝혀진
것을 추림이 말도 안된다며 일년을 넘게 파헤치다가 포기했어요.
죽은 친구의 부모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서요... 자꾸 기억나게 해서 괴롭다고
하시면서... 이건 아주 유명한 일인데... 추림이 어쩔땐 부러워요. 용기있고 당차고
두려움이 없어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것 빼면 다들 괜찮다고 말해요. 유미씨?"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영훈이 유미를 불렀다. 잠시 추림을 생각하던 유미는
상념을 뒤로하고 영훈을 마주 보았다. 어느샌가 영훈의 얼굴이 차분하게 변해
있었는데 뭔가 고비를 넘긴 사람 같았다.
"솔직히... 추림을 생각하지요?"
"......?"
부끄럽거나 머슥한것은 아니었다. 그도 추림을 그만큼 인정해서인지 유미의
마음은 차분해져 있었다.
잠깐 만나고 대화했을 뿐인데... 그 추림이라는 친구는 왜 이리 생각나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호기심일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다 그래요. 추림을 좋아하는 여자들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추림은 관심이 없어요.
그 놈을 죽어라하고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이건 정말이에요.
집안은 별반 좋은것도 아니고 공부를 딱히 잘하지도 않았지만... 놈은 똑똑하고
지독한 책벌레였어요. 닥치는대로 읽고 외우고... 어릴때부터 친구들 편지같은 것은
그놈이 다 작성했어요. 아마 친구들치고 그놈에게 대필 받지않은 놈 없을정도로
솜씨가 좋았지요.
그런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친구들이 미팅이다 소개팅이다 하는 자리에 가장
꺼리게 생각하는 친구가 추림이죠. 같은 자리에 있으면 온통 추림뿐이라서...
당연히 싫었지요. 솔직히 내가 더 잘생기기도 한데... 그놈에겐 안되더라구요.
수연이도 그랬어요. 공부잘하고 예쁜 그놈도 추림을 거의 이년넘게 쫓아다녔어요...
나중에 전학가면서 쫑났지만... 유미씨도 추림이 좋은거죠?"
영훈의 말에 유미는 갑자기 반발심이 생겼다. 그렇게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자신도 좋아한다면 그건 가치가 아닌것 같았다. 수많은 이들 중에 하나일뿐인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좋아한다? 왜 그가 좋겠어요? 그냥 궁금했어요. 수연이의 친구이고
수연이가 자주 거론하곤 해서... 호기심일 뿐이죠. 오해하지 마세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지만 어쨌든 그가 자주 떠오르고 강한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것은 맞았다.
"기분이 좀 그렇네요. 아까도 제가 유미씨에게 추림을 물어본것도 그래서에요.
혹 유미씨와 추림이 가까운데 있으니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놈에게 빠진 여자들은... 어렵거든요."
뭐가 어려울까? 나도 그에게 빠질거라고? 웃기는 말이었다. 봐온 남자들이 얼만데...
겨우 한번 본 사람에게 빠지거나 좋아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단호하게 유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절대 아니거든요? 그러니 오해는 마세요.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요."
"네! 그러지요. 사실 조금 갑갑해 지려는 참이었어요. 자 건배해요."
그럴것이다. 앞에 앉은 여자에게 버젓이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하는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다. 조금 미안해진 유미가 밝게 웃으며 영훈이 내민 술잔에 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별반 즐겁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영훈은 다르게 받아들일 터이지만 유미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 그렇게 말했다.
"유미씨. 집에 일직 들어가셔야 돼요?"
영훈이 즐거운지 편안 얼굴로 물어왔다. 유미는 어쩔까 하다가 고개를 도리질 해
아니라는 의사표현을 주었다. 더 기분이 좋아진 영훈이 술을 단숨에 넘기고
헤실거렸다. 아마 지금 영훈은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닐거야.. 그보다 멋지고 잘난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웃겨? 그만생각하자..'
생각이라는 놈은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니면서 부정하려 해도 자꾸 움직이는
벌레같았다. 전혀 다른것을 떠올려도 한쪽에서 슬며시 그가 떠올라 괴물로 변해서
이전의 생각을 집어 삼켰다. 요즘 신경쓰는 일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진 탓이라고 여겼다.
가끔 이럴때가 있었다. 전혀 알지 못하고 가본적 없는 곳을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떠올리고 상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슬그머니 짜증이 치민 유미는 기분전환할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나이트장이나 갈까? 이남자... 마음에 안들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영훈의 눈에서 이상한 열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한 유미는
마음을 정했다. 이 친구를 하루만 이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