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강한듯 강하지 못한 그녀.
태완과 헤어 진후 그녀의 예상대로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J&I사로 빗발치게 전화가 왔다.
나윤은 김 이사의 재촉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태완의 매니저가 된 이상 그 모든 일을 허투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그에 걸 맞는 스타일을 만들어야 했고, 그가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집을 마려해 주어야 했다. 다행이 자신의 빌라에 그가 거주할 공간이 생겨 두말 하지 않고 서둘러 계약을 했다.
“뭐야. 그럼 내일부터 조단씨가 이 빌라에서 생활한 다는 거야?”
“어. 그렇게 됐어. 어차피 내가 운전을 못하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지.”
“그건 그렇다. 참, 너 오늘 방송국 갔었냐?”
샤워를 하고 나온 은지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은지의 귀에 까지 태완과 그녀가 방송국에 들렀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건 아무래도 소문 쟁이 박PD의 덕이리라.
“소문이 거기까지 났냐?”
“그래. 여기 소문 이래봤자. 부천님 손바닥인 걸 모르냐?”
“하긴. 그런데 좋게 났어. 나쁘게 났어?”
나윤의 질문에 은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가 건 내는 시원한 맥주 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시원스레 한 목음 마시며,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건 냈다.
“당연히 좋게 났지. 아니다 아주 날 리가 났다는 거 아니냐. 게다가 내가 너랑 친구란 걸 알고는 한석이 놈이랑 촬영하는 네네 너랑 연결 좀 해달라고 잡지사 기자들이 나를 들들 볶더라”
“벌써 그 정도야?”
탁!
은지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야! 그 정도가 뭐냐? 너 아무래도 나한테 한턱 단단히 쏴야 할 걸”
“하하 그건 나한테 바라지 말고, 캐스팅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당신이 직접 김 이사에게 말해보시지요.”
“허~ 그런가.”
“그래 그 짠돌이를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건 너 뿐이잖아.”
“누가 그래. 나도 그 사람이 때론 겁난 다고.”
나윤은 은지의 너스레를 가볍게 웃어넘기며, 늘 당당한 그녀가 김 이사처럼 깐깐하기 이를 대 없는 남자를 짝사랑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남자에게 사랑고백쯤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 텐데....... 거기다 맘에 드는 남자와의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나윤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낮에 태완의 갑작스런 키스를 떠올렸다.
“저기 송양.”
“왜”
나윤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은지의 시선을 피하며,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들키지 않고, 질문을 하기위해서 잔머리를 굴렸다.
“왜 불러 놓고 말을 안 해. 싱겁기는.......”
“혹시 말이야. 남자한테 키 키스 받으면서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감미로운 말이 뭔 줄 알아?”
은지는 맥주를 마시다 말고, 무척이나 심각하게 키스에 관하여 물어오는 나윤을 바라봤다. 무언가 그녀의 주변에 변화가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나윤의 눈을 보는 순간 그냥 가끔씩 시나리오 소재로 물어 오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란 것쯤은 그녀와 5년을 살아온 것에 대한 정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왜 물어? 혹시 너 내가 모르는 남정네랑 키스라도 했냐?”
“풋!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시나리오에 좀 넣어 볼까 싶어서.”
‘핏, 시나리오 좋아 하시네.’
거짓말이 서툰 나윤을 바라보며, 웃음기 머금은 은지의 입술 끝이 보기 좋게 위로 말렸다.
“글쎄. 우선은 그런 말은 없다는 거 쥐. 적어도 내 경험으로 봐서는 그리고 대게 키스를 하면서 감미로운 말을 늘어놓는 다는 건 아주 초짜거나, 아주 베테랑이란 말인데........ 거기다 남자들이 란 족속들이 키스를 하기 전에 ‘사랑해, 너 뿐이야’라는 말을 남발하긴 하지만 키스를 하는 도중에 입술을 붙인 상태에서 절대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거 쥐. 왜냐......”
은지는 나윤의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바라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순진한 애가 뭘 알겠어. 너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난 잘 모르지만, 아무튼 너의 단단한 껍질을 깨고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선 반드시 베테랑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느릿하게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남자들은 여자를 얻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지. 하지만 그 목마름 치던 키스가 끝나면, 자연스레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인식하는데 뭣 하러 키스도중에 감미롭게 외치겠냐? 그리고 그만큼 남자들은 허겁지겁 여자의 입술을 시간낭비하지 않고 먹어치우거든. 그게 바로 남자의 본능이라는 거 쥐. 움 하 핫!”
“우와~ 대단해.”
“뭐가?”
“너의 남자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이다. 내가 볼 때 넌 딱 멜로의 정석인데.......”
“누가 아니라니.”
“히히 송양 이번 기회에 작업의 정석이라는 주제로 에로물 한편 집필해보지 그래”
“야! 집어 쳐! 난 너처럼 집에만 틀어박혀서 몇 날 며칠을 궁색하게 살긴 싫다. 지금 내 모습이 아주 맘에 든다고”
나윤의 생각도 같았다. 그녀 송 은지만의 자유로운 스타일은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녀에게 너무도 잘 어울렸고, 나윤의 은둔자 같은 생활 또한 남들이 뭐라 든 너무도 자연스레 그녀의 일부가 된 생활이었다. 누가 뭐라 그래도 두 사람의 취향이 너무도 다르다 해도 그건 각자의 개성이며, 서로가 가장 존중해주는 부분이었다.
“우리 너무 오래 같이 살았던 거 아닐까?”
뜬금없이. 느닷없이. 나윤이 지나가는 말로 한 말임에 틀림없지만, 왠지 은지는 그녀의 말이 듣기 싫었다. 아니 서운함이 가슴속 깊이 묻어났다.
“왜. 이젠 지겹냐?”
“핏, 송양 화났냐. 누가 지겹데....... 사실 난 너한테 제일 감사하고 있는데.......”
나윤은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을 너무도 가볍게 뱉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이런 성격을 뭐라 하지 못한다. 그 만큼 아픔이 많은 아이란 걸 이제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버린 은지만이 알아줄 뿐이었다.
“그런 소리 집어 쳐. 닭살 돋는 다. 그리고 평생 이렇게 살기는 좀 그렇지 않냐. 난 너한테 벗어나서 시집이란 걸 가보고 싶은 피 끓는 청춘이란다.”
“뭐시라. 그렇게는 안 된다. 나두고 혼자만 잘 살라고.”
“하하하 그만 그만해. 간지럽다.”
은지는 그녀의 간지럼에 못 이겨, 소파위로 들어 누웠다. 그녀들만의 행복한 저녁이 그녀들만의 우정어린 모습으로 빌라 안을 가득 메웠다.
“네 슬픔이....... 얼마나 큰지 언젠가는 말해 줄 거지.”
나윤은 그날 저녁 설핏 잠든 그녀의 등 뒤에서 은지의 잔잔한 한마디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작은 감동을 받았다. 은지는 그녀에게 있어서 나윤의 모든 걸 유일하게 믿어준 가족이었고, 형제였다. 늘 사랑하리라 마음먹었던 잠든 친구를 바라보며, 행복한 꿈을 꾸었다.
덜컥!
그녀가 전화를 받는 사이 그가 어느새 빌라에 도착했다. 그를 향해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뭐가 그리 심각한지 인상까지 쓰며, 그녀가 오래도록 통화를 한다.
“그래서요............ 아니요. 필요 없어요. 그만 됐어요.”
딸깍!
전화를 끊고 나서도 오래도록 너무나 심각한 표정의 그녀. 태완은 그런 심각한 표정의 그녀를 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가 무슨 일로 통화를 했는지 모르지만, 평소 보이던 그녀의 밝은 표정이 사라진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기만 했다.
“오래 기다렸죠.”
그러나 그녀는 마치 조금 전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차를 주었다. 물론 그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그녀가 말한 일회용 다방커피였지만, 그런 것 따윈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태완이 신경 쓰이는 건 그녀에게서 보았던 조금 전의 심각한 표정이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 봐도 돼?”
“아뇨. 안돼요.”
그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을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정색을 하며 거부하고 나섰다. 그녀의 표정을 조심스레 다시 한번 살피던 태완은 그녀의 뜻대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밋밋한 커피가 오늘따라 더욱 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나갈까요?”
“나 아직 덜 마셨는데..........”
그는 아직도 나윤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나 보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가 억지로 마시고 있는 커피 잔을 놓지 못하는 모습이 그저 미련해 보이기만 했다.
“좋아 하지도 않으면서....... 그만 나가요.”
태완은 왠지 자꾸만 서두르려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직도 궁금한 조금 전의 일을 핑계 삼아 그녀를 붙잡았다. 나윤은 그의 손을 거칠게 때어놓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자신에게 집착을 하는 사람은 오래전에 자신을 버린 가족들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며, 그가 하려는 말을 거침없이 잘랐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오늘 하루 종일 발품을 팔려면 정신없을 거라고요.”
나윤은 미치도록 바쁘게 일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이런 날은 그것이 약이 되고, 치료가 되기 마련이란 걸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태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윤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자 따가운 5월의 햇살이 주는 아픔에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다. 그 순간 그녀의 감정 속에 갇혀 지내던 눈물이란 놈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흐르고 말았다.
‘젠장. 그깟 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태완은 그녀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 갈수록 그 생각은 확실해 졌다. 태완은 그녀가 울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가슴 한곳이 뻑적지근하게 아파오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조금 전의 표정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까지 그를 동시에 괴롭히는 것처럼 그렇게 가슴이 뻑적지근하게 아팠다.
‘그녀의 일이야. 내가 간섭할 것의 성질이 아니라고, 엄연히 거절당한 주제에.......’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그로써는 아마도 당연한 방어였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조용히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을 접을 채 그녀가 원하던 대로 그냥 그녀의 감정을 무시하기로 했다.
J&I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기획실을 들렀다. 기획실은 그간 캐스팅 건에 대한 보류로 인하여 잠시 미루어졌던 일들이 임태완이란 새로운 신예를 만나면서 다시금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좀처럼 조바심을 내지 않던 김 이사까지 내려와 기획실의 직원과 홍보실의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모두들 이번 고비를 잘 넘겨봅시다. 그렇다고 너무 치칠 정도로 하지는 말고, 이 실장 직원들 저녁은 거뜬하게 먹이고, 알았나?”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사님 염려 마십시오.”
“아~ 오랜 만에 일하려니 손이 근질거리네.”
김 이사는 직원들을 격려하고 나오던 중 그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이네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싸늘하게 하고선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물론 태완은 비서실의 묵직한 소파에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들어가 버렸다.
탁!
“이게 뭐예요?”
“보면 알거 아니야.”
나윤은 김 이사가 무심하게 던져 놓은 서류더미를 펼쳤다. 그 속엔 비서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남자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었다. 태완의 이런 저런 사생활이 이렇게 나 많이 노출 되었는지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사실인지 확인 할 수도 없는 수많은 염문설의 모습들이 액자처럼 스크랩 되어있었다.
“이게 뭐 잘못 됐기라도 했나요?”
“이봐. 우린 영화를 투자하는 투자자라고, 그런데 저런 망나니를 스타로 만들자고!”
“그래서요. 설혹 이게 사실이라도 난 전혀 문제 될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조잡한 합성사진을 누가 믿겠어요. 아~ 물론 이렇게 정교한건 합성이 아니겠죠. 하지만 그게 뭐요. 그가 즐기는 표정이 아니라는 것쯤 단번에 알 수 있는데요.”
“이런 사실을 타 영화사에서 알면 우리 일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것 같아?”
“그래도 난 겁 안나요. 오래전 내가 처음부터 당신을 찾아 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난 그래도 겁 안난다구요.”
그녀의 말에 석재는 졸지에 겁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망할 여자 같으니라고, 누굴 졸장부취급이야.’ 그는 애써 침착함을 찾기 위해 무턱대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그보다 한발 앞서 여지없이 담배를 두 동강 내고 말았다. 마치 오래전 기억속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갔다.
“이거야 원 내 사무실에서 내 맘대로 담배도 못 피우다니.”
“잊으셨어요. 제가 천식이 있다는 거. 쿨럭~”
그녀는 꽤나 심각한 상황에도 잘도 웃어넘기려 하고 있었다.
“거짓말. 네가 누구보다 건강하다는 걸 내가 모를 까봐. 이 사기꾼”
“하하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듣기 거북하니까. 돈 벌어 주는 사기꾼도 있데요?”
석재는 그녀의 태평함을 닮고 싶었다. 그녀의 외소 한 외모를 보면 그 어디에도 여유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건만, 도대체 저 유유자적한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에너지일까.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당신 같은 여자는 사업을 하면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나, 그녀는 정말 말 같지도 안은 말을 한다며 그에게 단번에 면박을 주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여유와 넘치지 않는 교만은 사업을 하는 그로써 무척 부러운 면이었다. 하지만 이번일은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 함부로 결정지을 것이 못된다는 게 석재가 걱정하는 바였다. 만약 밖의 저 남자를 방치했다간 상대팀에게 좋은 먹잇감을 고스란히 제공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고집 앞에 저 신념에 찬 눈빛 앞에 감히 그가 그녀를 거절할 수 없음을 어떡할까.
“그럼 할 수 없군. 난 당신의 소원을 들어 줄 수밖에........ 그 밖에 할말은?”
“네. 저야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삐~
“네 이사님”
“우리 스타를 방으로 모셔요.”
석재의 ‘우리스타’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빈정대는 말투 같이 느껴졌으나, 그 스스로 그녀의 일에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리고 더불어 그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오래 기다렸죠.”
태완은 하루 중 그녀에게 들은 두 마디가 지루할 정도로 똑같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가 들어서자 그녀가 무언가를 서둘러 김 이사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을 봤으나 일부러 모르는 척 해버렸다.
“자. 그럼 이로써 우리의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석재와 태완은 서로의 친필 사인을 담은 계약서를 나눠가지며, 악수를 했다. 나윤이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지독히도 남자다운 그들이 억센 손을 맞잡으며, 서로에 대한 확신을 다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이 왠지 모를 뿌듯함에 가슴이 찡해졌다.
“오늘밤 축하주 어때요.”
그녀가 기분 좋게 파티를 말하자 두 사람 다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쩜 저리도 닮았을 까. 멋지다.’ 나윤은 자신이 선택한 멋진 두 사람의 어깨에 뿌듯한 감정을 담아 가볍게 팔을 올려놓으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론 그녀는 오늘처럼 가슴 벅찬 날 펑펑 울고 싶어지는 이유를 몰랐다.
나윤은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올라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태완이 갑자기 화난모습으로 그녀를 말렸다. 그녀의 손목을 부여잡고, 화난 듯 제어하는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말 못할 슬픔으로 인해 초조함을 들어냈다.
‘뭐지? 뭐가 그렇게 당신을 초초하게 만드는 거야.’
태완은 화가 난 듯 나윤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겨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취하지 않은 그녀의 영혼이 처음엔 강하게 그를 거부했지만, 이내 스스로 포기하듯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집에 가기 싫다.”
30분 동안 아무런 말도 없던 그녀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왜?”
결국 태완은 그녀의 한마디에 하루 종일 참았던 질문의 고리를 던졌다.
“아~ 배고파! 우리 저기 가서 2차 할래요?”
태완의 질문을 피하고 싶었던 나윤은 눈앞에 보이는 포장마차로 그의 시선을 끌었다.
태완은 나윤을 뚫어 져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엄청난 양을 먹는다는 김 이사의 핀잔에도 그녀는 2인분의 스파게티를 게 눈 감추듯 뚝딱 해치워버렸다. 거기다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면서도 그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저렇게 태연히 버티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먹고도 배가 고프다고?”
“네”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태완을 향해 그녀가 헤실 거리며, 대답했다. 태완의 눈에 ‘네’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웃는 표정이 마치 빈껍데기처럼 느껴졌다.
“문제를 그냥 덮어 두기만 하는 건 잘못된 일이야.”
나윤은 태완의 무거운 말투에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온몸을 움찔거렸다. 생각 같아선 ‘당신이 뭘 안다고’ 이렇게 큰소리로 맛 받아 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에게 들키는 것이리라.
“당신이 왜 그런 소릴 하는지 모르지만 때론 덮어두려는 게 아니라 그냥 묻어두는 게 상책 일 때도 있어요.”
나윤은 빌라에 차를 세우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서둘러 자신만의 영역으로 숨고 싶었다. 아니 하루 종일 마음 졸이며, 있었던 자신을 마음 편하게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완이 차에서 내려 그녀와 함께 빌라 앞까지 왔다.
그녀가 태완에게 돌아서 잘 가라는 인사를 할 사이도 없이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그녀를 덮었다. 나윤의 그림자위로 검은 실루엣이 겹쳐지자 그녀는 너무 놀라 뒷걸음 치고 말았다.
그리고 검은 실루엣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들어 내 자 그녀의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다. 하루 종일 안절부절 못했던 두려움이 마침내 실체를 들어 낸 모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랜 만이다. 강 나윤”
남자의 험악한 얼굴과 함께 술에 취한 말투가 그녀를 주눅 들게 했다. 나윤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뒤로 한발 두발 물러서고 말았다.
‘겁먹지 마. 그는 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남자의 험한 눈빛을 고스란히 견뎌내는 나윤의 시야에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남자의 커다란 등이 보였다.
태완은 그녀 앞으로 갑자기 나타난 술에 취한 남자를 보는 순간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남자의 모습이 마치 나윤을 헤하려는 것처럼 위험하게만 보였다. 게다가 그가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다는 것을 기분 나쁜 느낌으로 알아버렸다.
“누구십니까?”
“풋~ 그런 네놈은 뭐냐? 오호라 이년이 이제는 어린고 돈 많은 놈하고만 사귀더니 그러는 넌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태완은 그녀에게 뿐 아니라 자신에게 조차 함부로 말을 하는 상대방의 말투에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녀를 감싸고 있던 우울함이 눈앞의 몰상식한 남자 때문이란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 못하는 거 보니까. 너도 내가 누군지 눈치를 챈 모양이지? 하하하 맞아 저년은 ”
“그만!!!!!! 그만해 제발.”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모든 것을 토할 것 같은 모습으로 악인지 고함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상태로 그녀는 그곳을 그렇게라도 벗어 나고 싶었다.
“이게! 어디다 고함이야!”
철썩!
그녀의 뺨이 시뻘건 낙인으로 인해 서서히 부어올랐다. 그녀의 옆에 있던 그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의 뺨이 상처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으악! 너 이 자식 이거 놔!”
태완은 무식한 남자의 손을 그녀의 여린 뺨을 때린 남자의 몹쓸 손목을 있는 힘껏 비틀어주었다. 태완의 완력에 남자가 거칠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태완은 그녀를 대신해 그를 벌하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당신이 누군지 난 알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해두지. 그녀는 당신이란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여자가 아니란 거.”
“하하 하하하하”
태완의 말에 남자가 미친 듯이 웃음을 토해냈다. 나윤은 남자의 웃음에 두려움이 앞섰다. 차라리 이 자리에 누군가 사라져야 한다면 당연히 바로 태완을 선택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가능하지 않은 소원을 빌며, 그녀의 두 눈이 차갑게 눈물을 쏟아 냈다.
‘제발............ 그만 하란 말이야. 제발’
그녀는 처음으로 비겁한 남자를 향해 애원했다. 그녀를 동정하고 있는 또 다른 남자를 향해 자신의 치부를 들키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라며,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비겁한 남자로 그녀에게 남았다.
“하하하 웃긴다. 강 나윤 넌 언제나 네 옆에 남자들을 잘도 만드는 구나. 이 봐. 적어도 처음엔 나도 그랬지. 너 하나만 바라보며, 웃고, 행복해 하고, 우리 나름대로 즐거웠지 않았나? 그런데 우라질 너 때문에 내 꼴을 좀 보란 말이야. 넌 너만 잘살고 있으면 돼지! 나 같은 건. 널 사랑했던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지! 이봐 형씨! 내가 누군지 별로 궁금하지 않다고 그랬나? 하지만 내 말을 듣고 나면 형씨도 달라질 걸.”
나윤은 적어도 10년 동안 가족이란 명목 하에 다정했던 오누이였던 남자를 바라보며, 증오의 눈빛을 날렸다. 강한 배신감.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증오. 이 모든 게 눈앞의 남자로 인해 생겨났었던 게 다시 한번 자신의 가슴에 떠올랐다.
“그만! 제발 그만해! 허 상욱 더 이상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 당신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 적어도 내가 미치지 않는 이상 당신을 꼭 죽여 버리고 말거야! 으흐흑”
그녀는 미칠 듯이 절규하며, 빌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태완이 그녀를 붙잡을 세도 없이 그녀는 자신만의 영역으로 재빨리 숨어버렸다. 남자의 이름이 허 상욱이라고 했던가? 태완은 차가운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강하게 경고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이 그녀에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아. 그건 하늘이 두 쪽이 난대도 변함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오늘처럼 그녀를 찾아와 또다시 괴롭히는 날엔 내가 너란 놈을 가만 두지 않을 거란 거. 만약 목숨이 두개라면 시험 삼아 확인해 보던가.”
태완은 남자의 충격적인 얼굴을 지나 상처 받은 그녀를 찾기 위해 서둘러 나윤이 숨어든 그녀의 집으로 가기 위해 빌라를 급하게 뛰어올라갔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쾅!! 쾅!! 쾅!!
“문 열어. 강 나윤 어서 문 열라고, 당신이 그렇게 숨는 다고 내가 그냥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어서 문 열어.”
시끄럽게 빌라 안을 울리는 그의 거친 말과 행동에 나윤은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문을 열고 말았다. 어차피 그가 나의 무엇도 아닌데....... 하지만 말할 수 없이 상처 난 자존심이 그를 밀어 내야 한다고 아우성을 쳐댄다.
“그만 가요.”
상처 입은 그녀가 힘없이 그를 밀어 낸다. 태완은 나윤의 몸을 안으로 밀며, 그녀가 또다시 밀어내기도전 거침없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듯 그녀를 격하게 끌어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했다.
나윤은 멋대로 두 방망이질 치는 가슴 속 두려운 울림보다. 그녀의 상처가 더 컷 나보다. 슬픔이 그녀를 먹어 버린 듯 그녀의 얼굴이 빛을 잃고, 너무나 외로워보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그냥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마음껏 위로나 받아.”
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온몸에 긴장이 풀리듯 그녀를 힘없이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녀를 위로하던 그의 손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안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느낌이 어찌나 좋던지 마치 그녀가 그의 연인이라도 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번엔 그가 그녀에게 일회용 커피를 건 내 주었다. 물론 자신의 것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지독히도 맛없는 커피를 마시느니. 참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녀가 김이 모락거리는 커피 잔을 들어 서서히 아픔을 이겨내려 한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태완은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내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분명히 저 예쁜 입술로 그가 모르길 바라는 자신의 치부를 들어 낼 터인데 그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어떤 여자라도 그에겐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허나 아무래도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그녀에게만 향하고 있는 관심이 두렵기만 할뿐이었다.
“난 당신이 어떤 여자든 과거의 당신을 알고 싶지 않아. 강 작가님 우린 우리의 미래만 생각합시다. 나도 당신도 과거는 없어. 중요한건 현재라고, 난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해. 당신은 어때?”
나윤은 할말이 없었다. 그녀의 현재는 과거만큼이나 아픔이 많았으니까. 갑자기 자신들의 미래를 물어오는 태완과 눈이 마주치자 나윤은 태완이 어서 빨리 돌아가 주기 바랐다. 그가 돌아가고 난후 어김없이 그녀의 꿈속을 찾아오는 악몽을 꾸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그를 그의 동정어린 표정을 더 이상 보기는 싫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과거나 미래가 없어요. 그리고 현재도 그냥 살아갈 뿐이죠.”
그냥 살아갈 뿐이라는 차가운 그녀의 말이 태완의 빈 가슴을 시리게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나에게도 과거를 지우고 싶었고, 그래서 현재의 내 모습을 생각할 엄두도 못 냈지. 하지만 당신이나 나나 현재를 멋지게 잘 견디고 있잖아.’
한순간 태완의 눈이 그녀를 보듬어 주는 것처럼 아름답게 빛을 바랬다.
이 밤이 지나 그녀의 과거를 모조리 아는 그날 과연 저 남자의 눈빛이 여전히 아름답게 그녀를 봐 줄 수 있을지 그녀의 생각이 괜한 걱정으로 깊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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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5월 5일 입니다.
부모가 되신 분들에게는 거의 죽음인 계절 5월
부모노릇하랴. 자식노릇하랴.
5월은 푸르른게 아니라 하늘이 노레질 정도로 정신없은 계절입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일요일 까지 아무생각없이 즐거운 연휴되시라고....
아랑이 5편 올렸습니돠.....
행복한 주말되세요. ^^**
참, 리플 추천 감사 감사 드려요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