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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오르다 -12화- (당신을 알고.. 사랑을 알고..)

점심이슬 |2006.05.07 12:37
조회 530 |추천 0

 

 

12화. 당신을 알고 사랑을 알고..




석철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때까지 인희는 매일 석철과 함께 아침, 저녁을 먹었다. 출장 간 영식에게 연락을 해 봤지만 도저히 올라올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인희에게 석철을 부탁했다.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일찍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고 바로 석철의 집으로 가서 석철이 옷 입는 것을 도와주고 아침을 차렸다.


석철은 셔츠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낑낑대는 석철을 보면서도 도저히 그의 가슴을 마주하고 서있을 용기가 없었다. 몇 번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그의 앞에 섰을 때 석철 또한 매우 놀라서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 하나 겨우 셔츠의 단추를 다 채웠을 때 또 다른 벽이 인희를 당황시켰다. 인희의 친부는 용접공이라서 매일 아침 작업복을 입고 출근했었다. 그리고 새아버지는 농사꾼이라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양복을 차려 입었고 넥타이는 늘 엄마의 몫 이었다. 인희는 제대로 본적도 없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렸고 허둥대는 그녀의 모습에 석철은 그만 포기해야 했다.


살짝 벌어진 셔츠의 깃은 평소와는 달리 여유로워 보이고 단단한 석철의 목선을 더욱 강조해서 남성미를 물씬 풍기게 했다. 그날 출근을 하자마자 인희는 인터넷으로 들어가 넥타이 매는법을 습득했고 다음날부터는 직접 석철의 넥타이를 매주었다. 매번 얼굴이 빨갛게 익을 때로 익어 터지기 일보 직전에다가 손은 덜덜 떨어서 몇 번이나 손에서 타이를 놓치곤 했다.


석철을 챙기는 일은 열흘 뒤 영식이 출장에서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며칠동안은 일찍 눈이 떠져서 아침잠을 설쳤다. 그럴 때면 석철의 넓은 어깨가 생각나고 셔츠 아래에 가려진 단단한 가슴이 떠올랐다. 그런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인희는 혼자서 실실 웃기까지 했다.


석철은 전화를 받고 있는 인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일을 하다 막히거나 통화 중에 상대방의 말이 길어지면 아랫입술을 쭉 빼는 습관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귀여움이 묻어나서 학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희의 얼굴은 나이보다 앳돼 보였지만 어두운 표정이나 차분한 행동들 때문에 얼핏 보면 서너 살은 족히 더 많아 보였다. 가끔 회사를 방문하는 손님 중에 인희를 꽤나 맘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인희의 곧게 뻗은 종아리나 가슴 등에  노골적으로 시선을 던졌고 그때마다 석철은 화가 치밀어 올라 교묘하게 그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석철은 지난 열흘 동안 행복이란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했다. 마치 부부의 평범한 일상처럼 아침상을 마주하고,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주고, 함께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애기 나누고, 잘자라는 인사로 하루를 마무리 하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이런 것들이 행복이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평생을 갚아도 값을 수 없는 그런 짐을 짊어진 자신인데... 인희로 인해 풀어지는 응어리들로 이제는 욕심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서로 어색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아침을 먹었다. 삼일 째 되던 날 용기를 내어 계속 무더워 지는 날씨에 대해 얘기했고, 티비에서 연신 떠들고 있는 곧 다가오는 하계 올림픽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녀가 그나마 유일하게 보는 스포츠가 축구라고 했다. 아빠가 너무 좋아하셔서 그녀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대학에 오면서 본적이 거의 없지만 나이가 있는 선수들은 꽤 알고 있다고 또 기본적인 룰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으면서 석철은 인희와의 사이가 조금은 가까워 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면서 수줍은 미소를 짓고 넥타이의 매듭을 마무리 하며 살짝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무척이나 석철의 가슴을 심란하게 했다. 이것이 행복이라면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영식의 복귀로 그만 접어야 했다.


우성건설은 9월 초부터 분양에 들어갈 아파트 공사 마무리로 전 직원이 매일 같이 야근을 해야 했다. 영식은 가끔씩 ‘이놈의 팔자는 어찌 된 건지 바캉스도 한번 못 가보냐’며 투덜댔다.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일에 매달린 직원들이 안쓰럽고 미안해서 해보는 말이지만 내심 하루라도 시간을 내어서 바닷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영식의 투덜거림으로 유난히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9월부터 중산층을 대상으로 전원생활을 강조한 아파트가 1차에서 전권이 다 분양되는 기념을 토하고 회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 덕에 부서별로 진행되는 회식자리에 참석하느라 인희와 석철은 무척이나 바쁜 나날을 보냈다. 두 사람은 기획실 회식을 참석했다가 꽤 거나하게 취한 영식을 데리고 나왔다. 이번 공사는 거의 영식이 기획하고 마무리를 해서인지 본인 스스로도 감격스러워 했고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영식이 먼저 자리를 뜨자 직원들은 대신 석철이 끝까지 함께 할 것을 원했고 할 수 없이 인희가 영식을 데리고 먼저 돌아왔다.


9월의 끝자락에 부는 바람의 선선함이 피곤함을 씻어 주었다. 인희는 영식의 제안으로 잠시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영식이 늘 인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곁에서 보살펴 주었지만 이렇게 단둘이 나란히 앉아서 얘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영식은 말이 없었다. 무릎위에 팔을 얹고 머리를 숙여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을 때 영식이 입을 열었다.


“나는요.. 정말 형을 사랑하거든요. 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예요. 내 목숨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그런 형인데 ... 형은 나에게 아버지고, 어머니고 형제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데 내 마음이...”


“형은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차라리 형을 그때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쯤 형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잘 해 내고 있었을 텐데..  나.. 나 때문이예요. 그때 내가 그냥 죽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그런 일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흐흐흐... 흐흐흐...“


“인희씨 정말 미안해요. 그 모든게 다 나 때문이예요. 그러니까 형.. 우리 형.. 용서해 줘요... 인희씨도 행복해 져야해요.. 아... 기억이란게 깊은 땅 속에 묻어두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으면 좋을 텐데.. 정말 미안해요.. 정말...  흐흐.. 흐흐흑..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자신이 불행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랄 수 가 없대요. 내가 먼저 행복해야 주위의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고 그래야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대요.”


인희는 행여 영식이 술주정으로 자신에게 부담을 준다고 생각할까봐 얼른 위로의 말을 건냈다.


“인희씨는 지금 행복한가요?”


“글쎄요..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고 좋아요. 시골에 혼자 계시는 아버지 때문에 맘이 아프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 하시면서 지내시니까 다행이다 싶어요. 가끔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도 있구요. 그리고 이렇게 나를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실장님도 있구 그리고...”


인희는 석철의 이름이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요즘 자꾸 내 생각만 하게 되요. 난 정말 그러면 안되거든요... 흐흐.. 흐흐흐.... 그럼 정말 내가 나쁜놈 되거든요. 흐흐흐.... 인희씨가 우리 형한테 잘해 주면 안돼요? 아니다 그러지 마요.. 그럼 내 마음이... 아.. 씨.. 그래 나는 안돼요.. 형이 먼저.. 행복해지고 그다음이 나지... 아직도 가끔 악몽에 시달리는 형을 두고 내가 무슨 면목으로... 아... 흐흐흐... 흐흐..”


영식은 흐느끼듯 웃었다.


‘악몽....? ’

인희는 영식의 말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 할 수 없었다.


“그만 일어 나는게 좋겠어요.”


인희는 영식의 팔을 잡고 일어섰다.

순간 영식이 비틀거리면서 인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실장님 ...”


“잠깜만요.. 아주 잠깐만.. 마지막으로 잠시만... 흑흑..”


낮은 흐느낌에 어깨가 떨려왔다. 인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지만 힘들어하는 영식이 너무 안쓰러웠다.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그였지만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남동생 같았다. 그래서인지 인희의 몸도 낯선 남자의 접촉에 전혀 아무런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늘 밝게 웃어주던 영식의 눈물이 가슴 아플 뿐이었다.


석철은 그 자리에서 그만 굳어버렸다. 술에 취한 영식을 혼자서 데리고 나간 인희가 불안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회식자리를 빠져나왔다.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직원들을 뿌리치느라 제법 많은 양의 벌주를 받아 마시고 나서야 올 수 있었다. 인희가 걱정이 되어 맘 졸이며 달려왔건만 이건 또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가로등 밑에서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상황은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영식의 머리가 인희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랬다. 석철이 먼발치서 바라보기엔 영락없이 영식이 인희에게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석철은 너무 화가 나서 곧장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분을 삯이지 못하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고 재킷을 벗어 내동댕이 치고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말 영식과 인희가 그런 사이란 말인가.. 내 손길에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냉정하게 거부하던 그녀가 그렇게 쉽게 영식에게 맘을 열어줄 줄이야...‘


석철은 가슴 깊이 아련하게 저려오는 통증이 견디기 힘들었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창가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초라한 그믐달이 그의 벗이 되어 줄 뿐이었다.


‘후~ 우~  난 자격이 없지...’


그의 눈에 잔잔한 눈물이 머금었다.


인희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이 들었다. 요즘 들어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석철이다. 사고이후로 석철은 인희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었다. 사소한 배려들도 잊지 않고 늘 그녀와 함께 모임에 동반했었다. 생각보다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젠 석철과 좁은 차안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하루 종일 인희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업무지시 외에는 일체 말을 걸어오는 일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자신을 동반했을 법한 모임에도 아예 같이 가자는 말조차도 꺼내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함께 먹었던 점심도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석철에게 혹시 자신이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혼자서 애만 태웠다. 게다가 영식도 기획실 회식 이후로 잘 웃지도 않고 가급적 자신과 마주치는 걸 꺼려했다. 남자가 술에 취해 여자 앞에서 울었다는 건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서 그럴 거라는 배정의 말대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오늘도 아침부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성난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섰다. 씩씩거리며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왠만해서는 잘 흥분하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따르르릉..


“나 김만도요. 강사장 연결 해봐요”


김만도 사장은 늘 건내던 느끼한 목소리의 안부도 거른 채 다급하게 석철을 찾았다.

곧 이어 석철의 성난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전 절대로 그렇게는 못합니다. 아예 저를 밀어내고 뜻대로 하십시오.”


석철은 더 이상 통화하다가는 자제력을 잃을 것 같아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어제 갑자기 김만도에게서 연락이 왔다. 평소와는 달리 초초한 목소리로 만나자는 그의 말에 왠지 찝찝한 기운이 묻어났다. 그리곤 느닷없는 부탁을 석철에게 했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을 했지만 김만도는 끈질기게 석철을 닦달했다.


‘화연각’에게 기다리겠다는 말을 인희가 전해왔다. 석철은 할 수 없이 재킷을 걸치고 회사를 나섰다.

김만도가 즐겨 찾는 중국요리집 ‘화연각’을 석철은 아주 싫어했다. 보통 기름에 튀기거나 볶음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사장이 장삿속에만 밝아서 아첨이 아주 심했다. 게다가 여종업원에게 함부로 대했다. 노골적으로 특정신체부위를 쳐다본다거나 슬쩍 엉덩이를 스치듯 만진다거나 은밀하게 만남을 요구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석철이 목격하거나 주위로부터 들은 뒤로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 작자였다. 그 뒤로 꼭 이 곳에서 김사장을 만나면 그는 석철에게 곤란한 부탁이나 청탁을 하곤 해서 더욱 거리껴지는 곳이 되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사장이 느끼하고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석철을 맞이했다. 석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김만도 사장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람.. 얼굴 좀 펴게..”

“......”


“이거야 원 마음이 쓰여서 소화가 제대로 되겠는가 그려..”


“제 의사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내 충분히 잘 알지 그래서 이렇게 부탁 하는게 아닌가..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소정이 아주 똑똑한 애네..  자신이 맡은 일은 충분히 잘 해 낼 걸세.. 자네도 오랫동안 봐와서 잘 알잖은가”


“저도 소정이가 능력 있는 아이라는거 잘 압니다. 하지만 부당한 처사입니다. 기획실장은 지금의 우성이 있기까지 저와 함께 이끌어온 원년 멤버입니다.”


“내 잘 알지.. 자네와 영식이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의리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감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지금 자네의 자질에 대해서도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아. 전문경영인을 세워야 한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어. 하지만 자네의 업무처리 능력이 워낙 뛰어나니 나도 아직은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네. 하지만 영식이는 좀 달라. 기획실은 핵심 부서네. 그런데 학벌도 변변찮고 과거의 전적에 대해서도 수군거리고 있어.”


석철은 김만도 사장의 속내를 익히 알아채고 있었다. 석철이 우성을 맡으면서 국내 굴지의 건설업계에서도 뒤지지 않는 내실있는 회사로 성장을 시키고 날이 갈수록 눈부신 도약을 하자 석철의 입지는 점점 커져가고 그의 뒤를 받쳐주는 인재들도 꾀나 늘어났다. 그러면서 그동안 김만도의 힘을 빌어 적당히 일하면서 온갖 청탁을 받아 구린 일을 해오던 임원들은 석철을 눈에 가시처럼 생각했다. 김만도도 내심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월급쟁이 사장이긴 해도 이렇게 석철에게 힘이 모아지다 보면 언젠간 그에게 회사를 통째로 넘기게 될 수 있는 사태가 일어날 위협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더욱 기세등등해져가는 석철의 기를 꺾어야 했을 것이다. 그 첫 번째 타깃이 영식이 된 것이다.


“다른 부서로 발령 내는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는가. 홍보팀 아니면 총무팀 이라도 자네가 마음만 있다 면이야 얼마든지 가능하단 말이지..그게 여의치 않으면 이제 자네 정도면 수행비서라도 있어야 할거 아닌가.. ”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


“참 사람.. 이렇게나 융통성이 없어서야...”


석철은 융통성이라는 말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김만도는 늘 그랬다. 그에게 있어 융통성이란 자기자신에게만 이득이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편법이 그에게는 융통성이었다. 이번 일만 하더라도 유학중이던 소정이를 우성 비서실로 발령을 내 달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만도는 늘 석철과 소정이를 결혼시키고 싶어했다. 석철이 김만도의 그늘에서 3년쯤 지났을 때  김만도는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는 소정이를 석철과 짝지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체질적으로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심한데다가 심장이 약해서 절대 무리를 하면 안 되는 흠이 있어 번번이 내놓으라 하는 집안과의 혼사가 틀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을 해도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기에 그는 자신의 딸을 석철에게 맺어주는 것이 모든 면에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석철을 자신의 밑에 두면서 회사도 딸도 모두 자신의 사정권 안에 넣겠다는 심산이었다.


소정이는 어릴 때부터 석철을 잘 따르고 심성이 고운 아이였다. 일찍 엄마를 여의고 아버지와 살면서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했을 법도 한데 한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물론 석철에게도 친 오빠이상으로 대했고 그도 소정을 동생처럼 잘 보살펴 주었다.


그 후로 김만도는 은근히 석철에게 소정이에 대한 생각을 물어왔고 석철은 그런 김만도의 의도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인생에서 여자라는 없을 것이다 라는 결심을 한 이후라 소정이 싫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무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소정은 돌연히 유학을 떠났고 그 이후로 5년이라는 시간동안 석철의 머리에선 김소정이라는 이름은 아주 깊숙이 묻혀버린 단어였다.


김만도는 조금만 더 생각 보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석철도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아 빠져나왔다. 김만도의 뜻이 워낙 강경한데다가 석철도 예전부터 영식의 자질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이번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뜻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제마무리 회사 사주의 딸이라고 해도 무턱대고 기획실장으로 발령 낼 수도 없거니와 영식의 자리를 뺏을 수도 없다. 더군다나 비서실이라니 ... 영식은 아마 석철이 권유한다면 충분히 제의를 수락 할 것이다. 하지만 인희와 같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함께 있는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영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직 완전하게 인희를 포기하기엔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요즘 영식이 통 비서실을 찾지 않았다. 처음엔 아직 다른 사람의 눈을 조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인희도 가끔씩 불안해 보였고 영식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영식도 마찬가지였고.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나서서 둘의 사이를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영식과 인희가 키스하고 있는 모습을 본 이후로 차갑고 냉정하게 인희를 대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마음에 생채기가 나고 있음을 느꼈지만 한 발짝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부쩍 늘어난 업무량 때문에 지쳐가는 그녀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입은 마음과 정 반대로만 움직였다.


석철은 차를 회사로 몰았다. 인희가 회사를 막 빠져나와 지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는 생각이 들어 막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어느새 영식이 인희의 옆에 서 있었다.


‘자식.. 표정이 밝은 것 보니 화해했나보군.“


석철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돌렸다.


영식은 그날 술에 취해 인희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늘 마음이 불편했다. 천성이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오래도록 속앓이를 하는 것이 힘들었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자신의 행동들을 잊어달라고.. 그리고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 할 참이었다.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하얀집’은 아담한 2층 규모의 레스토랑 이었다. 인희가 이곳의 해산물크림소스 스파게티와 레몬밤이란 허브차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은한 분위기의 조명은 사람의 기분을 적당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앞에서 오물거리며 얌전하게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언제나 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에 지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던 그녀라 귀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입술에 묻은 소스를 혀로 살짝 훔치는 모습에 영식은 자신의 스파게티 면발이 점점 불어가고 있는 것도 몰랐다.


“왜 안드세요?”

“먹고 있어요. 이번 주말에 뭐 할 거예요?”


“집에 좀 다녀오려고요.”


“그렇구나..  저.. 저번에 내가...”


인희는 고요하지만 따듯한 눈빛으로 영식을 쳐다보았다. 그때의 일이 마음이 불편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라 짐작했다.


당신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영식은 굳이 해명하거나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인희가 넘어가 주리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사려 깊고 착한 사람을 어떻게 마음에서 밀어낼 수 있을까 싶어 영식은 마음이 아파왔다. 매일 매일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의 행복보다 석철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석철 또한 인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은 다가가지 말자고 다짐해왔건만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이다.


‘그녀를 알고 이제 사랑이란 것도 알게 됐는데... 형.. 정말 미안한데 나 조금만 욕심 부리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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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출장에서 컴백했습니다.

얼른 다음글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흐름이 끊겨서

너무 힘겹게 마무리 했습니다.

 

자꾸 얘기가 걷돌고 가볍게 표현되는것 같아서 신경쓰이지만

처녀작이라서 부족하려니.. 그려려니 하고 잘 부탁드립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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