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얼음공주
인희는 돌아오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다. 몇 달 사이에 볼품없이 늙어버린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당신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고 일 열심히 하고 건강해라는 당부를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시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자신과 함께 살자고, 여기서 고생하시지 말라고 했지만 나서 평생을 살아온 이곳을 등지고는 더 못살 것 같다는 말씀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영식이 반갑게 인희를 맞이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오늘부터 인희씨와 함께 여기서 일 할 거예요. 하하.. 인희씨도 좋죠?”
인희는 어떻게 된 일인지 납득이 가질 않았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더 이상 석철과 불편한 관계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위안이 되었다.
석철은 유리벽을 통해 영식과 인희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김만도가 직접 영식을 찾아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색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결정하기까지 영식은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던 영식이었지만 사회는 그의 노력과 성실함 보다 그가 가지지 못한 학벌과 배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석철은 당장 기획실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진작 석철의 옆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오히려 자신에게 수행비서의 일이 훨씬 더 잘 맞고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웃으며 석철을 안심시켰다.
‘그래.. 니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게 더 위안이 되겠지.’
똑똑
긴 웨이브 머리에 거의 티 나지 않지만 정성들여 화장을 하고 세련된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인희와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인희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자그마하고 가녀린 몸짓의 그녀는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을 지으며 인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영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빠! 오랜 만이예요.”
“소정아! 자식 그동안 어떻게 된 거야? 연락도 한번 없고 언제 들어 온거야?”
영식은 김만도로부터 자신의 후임자리에 소정이 들어오게 될 거라는 얘기까지는 듣지 못했다.
“어제 들어왔어요. 잘 지냈죠?”
“그래 많이 예뻐졌구나. 남자친구는 있고?”
“후훗~”
영식은 예전보다 건강하고 밝아진 소정이 모습에 다소 놀랐다. 수줍음이 많고 말수도 적어서 자신과 만날 때 마다 몇 마디 주고 받은 게 고작이었던 그녀였는데 몇 년 사이에 당당하고 명랑한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착하디착하고 순했던 모습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영식은 소정이 석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도, 더 이상의 곁을 주지 않는 석철 때문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을 떠난 것 알고 있었다.
영식은 내심 불안했다. 소정이 등장으로 석철과 인희를 맺어주려던 자신의 계획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늘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석철이 소정의 연약함에 연민을 느끼고 그녀의 마음을 쉽게 뿌리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철은 수줍게 들어서는 소정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그녀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잘 지냈니?”
“네.. 오빠도 잘 지냈죠? 생각 많이 했었어요.”
“시차적응도 안되고 피곤 할 텐데 좀 더 쉬지.”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아빠가 오늘부터 당장 출근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오빠가 선뜻 나를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요. 오빠 낙하산 인사 같은 거 무쟈게 싫어하잖아요.”
김만도 사장이 자신의 딸에게는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한 모양이다. 자식에게는 당당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그도 영락없는 아버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정에게 사실을 얘기 할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소정을 믿고 더 이상의 분란이 없도록 막는 수밖에는...
인희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석철이 이렇게도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누눈가를 바라본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식도 잘 아는 이 여자가 대체 누군지 인희는 궁금했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애교 있는 목소리고 석철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달라고 조르는 소정이라는 여자의 말이 둘 사이가 오래전부터 알아 오던 아주 친숙한 사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뒤 석철과 소정이 다정하게 나왔다. 바로 퇴근한다는 말을 남기고 석철은 그녀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인희도 심란한 마음에 배정과 저녁약속을 잡고 서둘러 퇴근을 했다. 집들이 이후로 만난 배정과의 수다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됐다. 어느덧 시간이 10시를 넘어서고야 자리에서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인희는 계단을 오르면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리를 들었다. 대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와 여자 라는 것과 그 남자가 바로 석철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인희는 계단 끝에서 더 이상 걸음을 때지 못하고 문밖의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살며시 남자의 가슴에 기대었고 남자는 팔로 여자의 몸을 감싸않았다.
인희는 온몸에 소름이 쫘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품에 다른 여자가 기대어 있다. 가끔씩 그의 넓고 단단한 어깨를 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조금만 의지하면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만 같은 바램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다른 여자가 그의 품속에서 행복해 하고 있다.
인희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어느순간 폭포수가 되어 흐르는 눈물의 원인을 그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잠들기 전에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씩 그의 하루가 궁금해지고 건내는 목소리에 심장이 콩닥콩닥 반응했으며 그가 무심결에 내뱉은 한마디에 가씀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리고.. 그리고.. 더이상 인희를 늘 괴롭히던 악몽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 내 가슴이 그를 원하고 있다. 어쩜 이게 사랑이 아닐까... 내가 사랑 이라는걸 있는지도...
‘아.. 어쩌면 좋지.. 그 사람을 사랑하나봐...’
시간이 얼마나 흘렸는지 모르지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엘리베이터의 버튼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온몸은 차갑게 굳었고 다리는 저려왔다. 인희는 볼에서 말라붙은 눈물을 닦아내고 집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마치자 온몸에서 열이 끌어 올랐다. 겨우 잠옷을 입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온몸이 쑤시고 덜덜 떨려왔다. 이불이 몸에 닿을 때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이빨이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아.. 엄마... 엄마... 나좀 살려줘요.. 나 좀 구해줘... 싫어 .. 싫어...’
‘아~ 악~~ 싫어 싫단말이야.. 아..악... 잘못했어요. 살려줘요...’
석철은 소정이 저녁을 사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급하게 처리해야할 서류는 두고 나온 것이 생각나 다시 회사로 갔다. 일찍 헤어지고 싶었지만 굳이 석철이 사는 집을 보고 싶다며 따라나서는 그녀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집에서 차를 한잔 더 마셔야만 했다. 소정은 오랜만에 만난 동생인데 한 번 안아 주는것도 못하냐며 수줍게 부탁했고 석철은 그녀의 말대로 어린 여동생을 다루듯 앉아 주었다. 그러면서 인희가 생각이 났다. 지금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여자가 소정이 아닌 그녀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실 직원들과 송별회를 한다던 영식이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간 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에 과음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섣불리 행동할 그가 아니기에 석철은 걱정하는 마음을 거두었다. 잠시 인희의 집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문만 열면 그 안에 그녀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애써 태연한척 바라만 봐야 했던 그녀가 저 안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을 것이다.
석철은 차가운 금속재질의 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 찰라 고요한 적막을 깨고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흐느낌 소리.. 절규에 가까운 듯 부르짖는 저 소리.. 인희다. 석철은 출장에서 악몽에 괴로워하던 인희를 떠올리고는 그녀가 또 무서운 악몽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손잡이를 돌렸지만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석철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흐느낌의 강도가 점점 커졌다. 석철은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마음이 쓰리다 못해 통증이 전해져 왔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석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금장치의 비밀번호가 초기화로 설정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4자리의 숫자를 눌러보았다. 잠시 뒤 뛰~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찰칵 하고 열렸다. 잽싸게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자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열이나고 흐느껴 울고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목 놓아 제발..이란 말을 외쳐대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박인희!! 정신차려.. 정신차렷!!”
“잘... 못.. 했... 어... 요.. 제발...제...발..”
“석철은 찬 물수건을 가져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과 목을 닦아 내었다.
“당신... 왜이래 정신차려..”
“엄마.. 엄..마... 나좀 나좀 구해줘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엄마를 그녀가 목 놓아 부르고 있다. 그녀가 두 손을 허공에 대고 휘 저었다. 석철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다시 이불속으로 넣었다. 그녀가 희미하게나마 눈을 떴다.
“이것 봐 박인희 정신이 좀 들엇!!”
“아악~~”
슬며시 뜬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녀가 겁에 질린 눈을 하더니 외마디 비명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 당신.. 정말이지... ”
‘이제 내가 지켜주겠어. 무엇이 당신을 이토록 괴롭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힘들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내가 반드시 이 악몽을 없애주겠어.’
인희는 힘겹게 눈을 떴다. 어슴푸레하게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자신의 옆에서 덩그마니 엎드려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양팔을 베게 삼아 잠들어 있는 옆모습이 순수한 사춘기 소년 같아 보였다.
‘아~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인희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소정이를 안아주고.. 자신이 계단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들어오고 그리고 샤워를 마치고..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욕실로 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백짓장처럼 질려있다. 한동안 꾸지 않던 악몽이었다.
인희는 살며시 석철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양팔을 베게 삼아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엎드렸다. 욕심이 생겼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이 남자에 욕심이 생겨버렸다. 가능하다면 아픈 과거는 잊어버리고 그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
인희는 석철이 깰 때까지 그렇게 눈에 석철을 담고 있었다. 그가 눈을 떴다.
“언제 일어났소?”
“잠시만 그냥 있어요. 이렇게 마주보며..”
“몸은 괜찮소?”
“어떻게 알았어요?”
“급하게 처리해야할 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새어나오는 당신소리를 들었지. 혹시나 싶어서 놀러보니 비밀번호가 초기 상태로 설정되어 있었어.”
“그랬구나.. 고마워요.. 곁에 있어줘서..”
아프지 말았으며 좋겠어...
다시는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내가 지켜주겠어...
그의 눈이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 듯이 그녀가 눈동자를 반짝 거렸다. 석철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든 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녀는 물러나지 않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석철은 그윽한 인희의 눈앞에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덮었다. 보드라웠다. 언제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주 어렸을 적 엄마의 젖무덤을 찾아 비벼 대던 그런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입속을 점령했다. 익히 경험해보지 못한 짜릿함이 석철의 신경을 자극했다. 숫하게 자신을 향해 들이대던 어떤 여자의 입술도 이처럼 보드랍고 황홀함을 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수줍게 그를 받아들였다. 어찌 할 바를 몰라서 혀를 딱딱하게 고정시키고 있었지만 그가 움직이는 대로 그렇게 따라와 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그들은 아침을 맞이했다.
인희는 몸이 한결 개운하고 가벼웠다. 아직은 미열이 남아있지만 가뿐하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보다 서둘러 출근했다. 석철과 주었던 키스의 여운이 느껴져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의 얼굴을 마주치기 쑥스러워 일치감치 회사에 나와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영식과 석철이 함께 들어왔다. 석철은 싱긋이 웃어주고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뭐 좋은 일 있어요?”
영식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인희는 달콤한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영식은 그런 인희를 보며 불안했다. 밤엔 술에 취해서 석철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새벽녘에 눈을 떠 냉수를 들이켜고 나서야 석철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욕실에도 화장실에도 옷장속의 옷도 그대로였다. 곰곰이 석철의 행방을 생각하고 있을 때 옆집의 현관문소리가 들리고 석철이 들어왔다. 그 옆집이란 바로 인희가 살고 있는 504호다. 이 시간에 그녀의 집에서 나오는 석철이라..영식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은 괜찮냐며 별다른 기색 없이 물어오는 석철에게 영식은 차마 묻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없었다.
‘형, 드디어 시작된 거야? 그런거야...? 여기서 내 사랑은 접어야 겠지...?...’
정식으로 소정이 기획실장으로 소개가 되고 회사는 온갖 소문으로 웅성했다. 그중에서 가장 근거 있는 소문으로 직원들의 관심을 자극한 것이 바로 소정과 석철의 결혼설 이었다. 소정이 김만도명예사장의 딸이라는 것은 결혼설에 비하면 별 가십거리도 아니었다. 평소 직원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한 인간적인 사장이었지만 한번도 여자직원들에게 그 이상의 행동을 해 본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정도의 지위라면 늘 사생활이 복잡한 부류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 직원들은 석철이 소정과 연인관계였기 때문에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믿어버렸다. 더군다나 소정은 같은 여자가 봐도 보호해주고 싶은 본능을 자극하는 천상 여자였다. 게다가 차분하면서도 일처리가 확실하고 착하고 친절하기 까지한 그녀를 두고 석철과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인희는 이런 소문에 말이 없는 석철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한 마디 쯤 해 줄만도 한데 전혀 모르는 일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석철이 인희를 향해 보내는 그 눈빛만큼은 그의 마음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성은 새로운 공사에 착수했고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석철과 영식은 거의 현장에서 지내다 시피 하고 있었다. 모처럼 석철이 이른 퇴근을 하고 인희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늘 영식이 석철과 함께 다녀서 좀처럼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힘들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영식이 야근을 한다고 석철이 귀띔해 주었다.
인희가 악몽을 꾸고 첫 키스를 하던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출근길에 잠깐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인희는 간단하게 장을 봐서 저녁을 차렸다. 그가 좋아하는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을 때쯤에 석철이 들어섰다.
두 사람은 함께 있어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워낙 과묵한 석철도 그렇지만 인희도 조용하고 군말이 없는 스타일이라서 침묵으로 시간을 흘려버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좋았다. 같은 공간에서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충분히 통했고 사랑했다.
“해가 저물면.. 둘이 나란히..
지친 몸을.. 서로에 기대며...
그날의 일과... 주변 일들을...
얘기하며.. 조용히 잠들고 싶어....“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노래의 한 구절을 불러주었다. 감정표현도 서툰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 줄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인희는 지금 이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저녁을 먹고 평소 그녀가 즐겨 마시던 허브차 한잔을 들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었다.
‘좋은 사람.. 고마운 사람..’
석철은 살며시 기대어 있는 인희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그녀를 소유하고 가지고 싶은 욕구가 그를 강하게 자극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려던 마음은 자꾸만 ‘어서’, ‘빨리’를 외치고 있었다. 석철이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인희의 양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인희도 조금씩 석철의 행동에 반응했다. 조금씩 조끔씩 깊어지는 키스가 이어지고 석철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순간 그녀가 움찔했지만 곧 긴장을 풀었다. 서서히 손을 그녀의 스웨터 안으로 집어넣었다. 놀란 인희가 그의 입에서 입술을 거둬들였다.
“놀라게 했다면 사과하겠어.”
“그냥 좀 당황했을 뿐 이예요.”
“......”
“저는 괜찮아요.”
인희는 무안해 하는 석철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다시 뜨거운 키스가 이어지고 석철이 인희의 가슴에 손을 포갰다. 브래지어 위에서 춤추던 그의 손이 이윽고 얇은 장막을 비집고 들어와 가슴을 움켜쥐었다.
생각보다 큰 가슴이었다. 마른 체격이라 별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그녀의 가슴은 석철의 손에 꽉 찰만큼 풍성했다. 앙증맞게 솟아오른 유두가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그는 행여 가슴이 부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당신의 느낌이 너무 좋아...”
석철은 눈빛으로 동의를 구하고 입술을 천천히 가져갔다. 소파에 그녀를 앉히고 그는 그녀를 마주고보 무릎을 꿇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위해서 작은 스텐드의 빛에 의지해 그녀의 가슴으로 눈을 가져갔다.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가슴이 너무도 탐스러웠다.
석철은 흥분에 겨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그녀의 엉덩이에 가져갔다.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석철은 당황해서 인희에게서 떨어져 형광등을 켰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 흥분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껏 달아올랐던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그녀의 눈은 허공을 향해 고정되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석철이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인형 같았다.
“왜 그러는 거요?”
인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소. 정말 미안해요. 당신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 같소.”
석철은 가만히 다가가 인희를 가볍게 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얼음공주처럼 어떠한 감정도 움직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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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이라 출근했거든요...
퇴근전까지 마치려고 고군분투 했는데 오타도 많을거고 문맥이 잘
맞지 않더라도 재미있게 봐 주세요.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