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오전내내 낮고 무거운 바람이 불었다.
오후가 되자 진눈깨비가 흣날리더니 곧 굵은 눈송이가 허공가득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길을 걷던 추림이 길가의 담벼락을 짚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부풀린 얼굴을 나무 밑둥에 대자 곧 억눌린 욕지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욱...! 욱...욱!"
한참을 그렇게 게워냈지만 넘어오는 것은 멀건 물 뿐이었다.
하루종일을 이렇게 시달린 추림이었다. 내색할 수가 없어서 더욱 힘들었다.
박도형과장을 비롯해 간밤에 모여든 일행들 모두가 아침에 죽어가는 얼굴로
출근을 했다. 일차로 단골 룸싸롱에서 시간을 보내고 인천까지 원정을 다녀온것이
화근이었다. 부평에 또다른 단골 집이 있었는데 개발한 사람은 박도형 과장이었다.
술이란 마시면 그렇게 중독력이 강하게 발길을 잡아끌었다.
하루종일 모임을 가진 일곱명은 진저리를 쳐댔다. 추림이 가장 양호했고 가장
심한 사람은 이상열 과장이었다.
술에 장사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오늘 하루종일 내내 증명되었다. 박,이 두 과장은
거의 일손을 놓고 바닥을 기어다녔다. 후회하며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지만
삼일도 못갈 것이다. 오늘도 이대준은 출근하지 않았다.
그의 누나 이금선은 남영기업에 막강한 실세로 알려져 있었다. 이금선은 이대준에게
막강한 빽그라운드로 작용할 터이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시쳇말로 꼴통 기질이 다분한 탓이었고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박수형 사장이 남영기업을 일으킬 때 창업자금을 이금선의 친정에서 대부분 끌어다
썼는데 박수현 사장 부부는 일주일에 사일은 부부싸움을 했다.
김수연에게 전화가 온것은 점심무렵이었다. 속이 뒤틀리고 머리가 흔들려 식사도
거른 채 쉬고 있을 때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러번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만나지는 않았는데 오늘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몸이 엉망이어서 거부할까 하다가 수연의 우울한 목소리에 결국 그러지 못했다.
모레가 주말인데 미룰수도 있었지만 만나기로 했다.
머리를 손으로 토닥이자 둔중한 통증이 머리가득 전해졌다.
얼굴을 스치는 눈송이의 촉감이 한결 두통을 줄여주는것 같았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추림이 걷고 있는 길은 항상 스산하고 적요로웠다.
영등포 교도소의 외길은 어떻게 꾸며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개봉역의 번화한 거리를 가로지르다가 약국을 찾아 들어갔다.
중년의 여성이 난로가에 앉아 졸다가 인기척에 놀라 깨어나며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추림을 반겼다.
"술 때문에 그러는데... 약 좀 주시겠어요?"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았다. 웬만하면 약에 의존하지 않는 추림이었지만 숙취의
기운은 참기엔 너무 지독했다. 가시고있는 와중의 술 기운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추림은 약 먹을 술을 왜 마셨을까하고 후회해 보았지만 오늘도 마실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참 멍청한 짓 같았다.
"오천원 입니다."
탁하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약을 입에 털어넣고 드링크를 마시자 싸하고 씁쓰르한
물맛이 조금 불쾌하게 느껴졌다.
커피숍 백궁의 입구에 들어서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수연은 한시간 반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시쯤에 도착하고 기다리고 있겠다 했으니 아마 상당히
지쳐있을 것이다. 백궁에서 익숙한 팝송이 흘러 나왔다.
어릴적 자주 듣던 곡이었는데 가수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빠르고 간결하지만
어딘지 슬프게 들리는 환타지보이였다. 지하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커피숍 내부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힐긋 거리며 쳐다보고는 곧 고개를
돌렸다. 그들도 일행을 기다리는 손님일 것이다.
고대를 두리번 거려 수연을 찾자 저만치에서 외롭게 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살며시 다가가며 그녀의 안색을 살피려 했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절반만 보였다.
"분위기가 왜 그래? 울 것 같은 처량함이라니...?"
추림의 음성이 들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든 수연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분이 우울하군.'
속으로 수연의 기분을 어림짐작한 추림이었다.
"왔어? 일찍왔네."
건조하고 메마른 음성이었다. 지난번에 보았을때는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화장을 했다. 엷게 파운데이션을 터치하고 흑장미빛 립스틱을 칠한 모습이
상당히 고혹적이었다. 한쪽으로 머를 쓸어 넘긴 스타일이어서 더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역시 이놈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이렇게 화장을 하고 다니면 열에 아홉명의 남자는 시선을 줄 것이다.
"나가자. 이놈 아주 분위기에 푹 빠졌군!"
추림이 앉지도 않은 채 말하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이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
"차는 안 마시고 나가는거야?"
"난 지금 차보다 다른게 필요하다구. 배도 고프고... 일어나 아가씨."
추림이 재촉하며 말하고 카운터로 다가가 계산을 하자 수연이 옆으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지? 회사로 오라고 할까 하다가 오늘 분위기가 좀 그랬어. 가자."
물론 회사 휴계실에서 한시간 반쯤 기다리면 이곳보다는 덜 지루하고 덜 우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밤의 사건 때문에 눈치봐야 하는 입장이라서 그러지 못했다.
계단을 오를 때 수연의 등을 지긋이 밀어 힘을 실어주자 수연이 미소를 보내왔다.
후끈한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차가운 기운이 청량하게 느껴져왔다.
"어머? 눈 오잖아? 난 그런것도 모르고....."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지하 찻집에서 한시간 반을 갖혀있었으니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알턱이 없었다.
"봐라. 아주 멋지지? 이렇게 하늘에서 메세지를 보내는 날인데... 넌 지하 찻집에서
울고 있었으니 얼마나 극단적인 모습이냐? 안그러냐?"
추림이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눈을 잡으려 휘젓자 놀란 눈꽃들이 너울거리며
멀찍이 달아났다. 눈이 동그래진 수연이 추림을 응시하자 그가 특유의 큰 웃음을
지으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자식! 얼굴에 써있어. 나 지금 울고있어하고...자 가서 근사하게 저녁먹고 울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들킨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 수연이 눈을 홀기며 추림을 노려보았다.
사실 추림의 말대로 속상하고 외로운 기분에 그를 기다리면서 울기도 했다.
헌데 그가 정확히 지적하자 혹시 왔다간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못된 놈!"
수연이 길을 걸으며 추림의 팔을 치며 톡 쏘자 추림이 되려 수연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이놈! 김수연! 감히! 너의 구세주가 될 분에게 이 무슨 행패냐? 죄를 알렸다?"
"얘가? 너 왔다갔지? 어떻게 알았어? 내가 울었다는 것을.....?"
몸을 뒤틀며 추림에게 맞은 곳이 아프다고 표현한 수연이 그렇게 묻자 추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럴 시간이 어딨냐? 눈을 보면 알아. 웃음을 짓는 눈은 따듯한 기운이
역동적으로 빛나고 우는 눈은 차갑고 흐릿하게 빛나지. 니 눈이 그랬어.
차갑고 흐리고... 많이 울다본면 그런걸 알게 돼."
많이 운다고 알게 되면 사람들 대부분이 점쟁이가 될 것이다. 수연은 추림의 말을
들으며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추림이란 친구는 특별한 느낌이
드는 친구였고 가끔 사람을 놀래키곤 했다.
"얼마나 좋냐! 이런 날 운다는 것은 니가 어른이라는 거겠지? 아이라면 좋아서
뛰어다닐텐데... 그런데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순수한것과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넌 순수하지 못해서 운 것이고. 난 겨울이 좋다. 가장 깨끗한 계절 같거든.
거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내내 꿈을 꾸게 하는것 같거든.
아마 눈을 보고 우는 사람은 하얀 슬픔이 전하는 단면에 유혹되어 우는 걸꺼야.
운다는 것이 솔직한 것이지만 정말 울때는 아무런 이유가 없어야 할 때인데...
임마! 이런날은 웃어야 하는거야. 왜 그리 처량한 모습을 하고 있어?
자 기운좀 내봐!"
추림이 수연의 팔을 끌어당겨 어깨동무를 해주었다. 따듯한 기운이 확 끼쳐들자
수연은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있었다. 듣고보니 그의 말이 맞는듯했다.
순전히 자기의 주관이겠지만 어쩐지 그의 말은 묘한 논리를 성립시키는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옛날에... 눈이 아주 많이 올 때는 두렵기도 했다. 언젠가 눈이 녹아 사라지면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서 눈을 너무 그리워하게 될까봐 그랬다. 사춘기때인데,
겨울에 삭막한 풍경을 눈이라는 놈이 부드럽게 순화시키고 아름답게 꾸며 주는게
너무 신기하고 좋았거든. 그 뒤로 겨울이 오면 마치 날 만나러 오는거 같고
눈을 보면 항상 웃을 수 있게 되었어. 산타를 믿지는 않지만 믿기로 한것도 그때고..."
어깨동무를 한 채 걸으며 추림은 손바닥으로 수연의 어깨를 일정한 속도로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딱딱한 몸의 경직이 풀렸다.
추림을 지난번 친구들과 만나고 이번이 두번째였다. 어릴적 친구로 익숙한
사이였지만 세월이 흘러 만난 후에는 그 익숙함이 다른 느낌으로 변했을 터인데
이상하게 추림에게는 여전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고 친숙한 기분이었다. 친구지만
분명 이성인데 그의 몸짓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어떠냐? 아름다운 미사여구가 잔뜩 포장된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풀렸지?"
그의 입김이 가까이에서 와 닿으며 들리는 음성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더 추워지는데?"
"어라? 그러면 안되는데? 이 방법이 얼마나 잘 통하는 방법인데... 음.....!"
"뭐라고? 이 못된 놈!"
"아얏!"
추림의 옆구리를 팔굼치로 후려치며 톡 쏘자 추림이 엄살을 부리며 후다닥 저만치
달아났다.
"너무 자주는 기대하지 말라구. 난 그럴때마다 괴롭단 말이야.
알지? 난 남자 넌 여자?"
익살스런 표정으로 수연을 놀리자 그녀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저기다. 한식하고 중식을 겸하는 곳인데... 뭐라더라...
퓨전뭐라고 하는데 개업한지 두달 되었나?
음식맛이 뛰어나. 주인 아줌마의 고향이 목포라서 그런지....."
수연이 추림이 가리킨곳을 바라보자 과연 깨긋하고 새것인듯한 간판에
<고향맛집>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들어가시지요. 김수연씨!"
추림이 입구의 문을 열고 길을 틔워주자 헛웃음을 흘린 수연이 곱게 눈을 홀기며
들어갔다.
아직 손님은 별로 없었다. 추림과 수연을 빼면 테이블 네개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오늘같은 날은 장사하기에 아주 좋지 않은 날인 것이다.
자리를 골라 앉자 유리잔과 물병을 든 종업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십대의 여 종업원이 추림을 아는지 인사를 건네오자 추림이 마주 인사하며
역시 아는체를 했다.
"식사하며 술 마실건데요. 일단 해물죽부터 빨리 주세요. 이인분 주시고...
음... 고기는 모듬으로 주세요."
"해물죽 이인분 빨리... 모듬... 술은?"
추림의 주문을 외며 물었다.
"맥주 두병하고 소주 주세요."
종업원이 물러가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오분도 되지않아서 상이 차려졌다.
그리고 하얀 사기그릇 두개가 두 사람앞에 놓여졌는데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먹어봐. 너 오래 굶었지? 계속 차만 마셨고 물만 들이켰을걸?"
추림의 말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간 반동안 그녀가 마신 차가
세잔이었는데 추림이 계산한면서 그것을 안 것 같았다.
"너 위장이 약해져 있을거야. 죽 먹고 밥은 잠시뒤에 먹자.
먹어봐라 상당한 솜씨에 놀라지는 말고."
추림이 먼저 숟가락을 놀리며 죽을 떠먹자 물끄러미 추림을 바라보던
수연도 곧 죽을 먹기 시작했다.
"어때? 맛있지?"
입을 오물거리던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물죽은 비리고 느끼하기 쉬운데 전혀
해물죽같지 않았고 담백하고 고소한것이 입맛에 잘 맞았다.
수연은 작은 감동을 느꼈다. 집안 일과 자신의 일로 고민하고 속상해서 방황하듯
하다가 추림에게 온 것인데 자신의 기분을 적절히 위로해 주었고 이렇게 식사까지
배려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얼굴을 보니 푸석하고 피곤해 보이는것이
어제 술을 많이 마신듯 보여 미안했는데 오히려 그는 자신을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있었다. 세심하고 마음이 넓은 친구였다. 과거에 추림을 오래도록 좋아했는데 아직
그 마음은 남아 있었다. 성년이 되어 잊혀질 만큼의 시간과 변화가 있었기에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기 잘한 것 같아!'
죽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자 고기가 철판위에 올려질 때 수연은 그런 생각으로
흐믓해졌다. 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수연은 요즘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다.
형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시작된 방황은 대학의 진입을 포기하게 했을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혼란스러움... 미래에 대한 진로가 두렵고 현재의 모습이 싫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는 삶이 하루 하루 무의미하게 지나갔고 무엇도 정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덧없이 보내고 있었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추림을 찾은 것이다.
그라면 어쩌면 무언가 실마리를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보다는 갑자기 떠올랐다.
갑자기 떠올랐을 뿐이다. 그를 만나고 나서 힘들때면 종종 떠오르는 그를 아예
보기로 한것이었는데 요즘 그녀의 생활이 그랬다. 어딘가로 늘 무의미하게
돌아다녔고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추림을 만나자 마자 기운이 생기는듯해서
기분이 셀레는듯한 느낌이었다.
"... 형부하고 언니에게 미안했어. 몇년동안 날 보살펴 주었는데 어려운 시기가 되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해서 무척 미안했거든. 그래서 대학을 포기했어."
식사가 끝나고 술을 몇잔 마시자 나른해진 수연에게 추림은 가감없는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 형부의 사업이 부도 난 일과 자신의 현재 처지를 솔직하게 말했다.
"포기? 넌 포기란 말을 무척 쉽게 하는구나?"
어딘지 질시가 담겨있는듯한 추림의 말에 수연은 잠시 당황했다.
"......?"
"포기란 죽는것과 같아. 살아있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포기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거야."
추림이 소주를 단숨에 비워내고 말하자 수연의 얼굴은 살며시 일그러졌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듯한 추림인 것 같았다. 자신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고 고민했는지 그 고통은 두려운 것이었는데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것이다. 지금 추림이 그러고 있었다.
"아니. 나도 많이 고민했고 생각했어. 하지만 결국 그럴수 밖에 없었어.
방법이 있다면 당장 난 그 길을 갈꺼야."
강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추림은 수연을 바라보며 싱글거렸는데 수연은 기분이
나빠지려했다.
"정말? 방법이 있다면 그럴수 있어?"
"......?"
수연의 미간이 좁혀지며 주름이 생겨났다. 장난 하는것도 아니고 추림은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아 서운해지고 있었다.
"당연하지. 결코 당해보지 않으면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를거야.
지금 장난하는거 아니지?"
"아니! 장난하는건데? 왜 기분 나쁘니?"
추림의 말에 결국 수연은 화를 참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막 입을 열어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는데 추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 말을 들어볼래? 내가 장난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당장 해봐! 날 납득시키지 못하면 널 다시는 안볼거야."
"호... 그래? 만약 널 납득 시키면 우리 한 백년쯤만 보자."
계속 장난같은 말처럼 들린 수연은 입술을 깨물고 입을 꾹 닫았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추림이 다시 소주를 따라 한잔 마시고 남아있는 고기를 집어
안주로 먹었다.
"포기! 어떤 일을 하고 있거나 실행 하려고 하다가 단념하며 버리거나 잊어
버리는것의 정의! 넌 아주 단순한것을 하나 잊고 있는데... 예를 들어보자.
우리 아침에 일어나 외출을 하려고 준비하는거 있지? 간밤에 잠을 잘때 입고 있던
옷을 갈아입거나 세수하는것 따위?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외출을 해도 될까 안될까?
한번 대답해봐?"
뜬금없는 추림의 말이었지만 일단 대답은 해주기로 했다.
"당연히 되지!"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로 너처럼 말이다!"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은 수연이었다. 다 좋았다. 하지만 그것과 자신의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당체 모를 소리뿐이었다.
"넌 임마 지금 그러고 있잖아. 사람이 급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아침에 어디를
나갈때 지저분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갈수도 있는거야. 그런데 넌 극구 씻고
새옷을 갈아입고 나가려고 하고 있지 않냔 말이다!"
"......?"
"봐라. 누가 너에게 포기하라고 했냐? 아니짆아. 상황이 당장 여의치 않을 뿐인데
넌 내일 할 수도 있고 그 다음날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지 못한다고 포기해
버렸지 않느냔 말이다!
너의 이상과 꿈이 어디를 갔니? 죽었어? 대학이 외국으로 이사를 갔어?
형부가 죽었어? 언니가 잘못됐어? 넌 참 멍청한 아이로구나!"
수연은 그제서야 추림의 말을 이해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것을 생각하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상황이 어쩔수 없으니 다음에... 그런 심정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생각만 거듭했는데, 추림의 말을
들으니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넌 지금 단지 조금 힘들 뿐이야. 갑자기 찾아온 시련으로 인해 넌 혼란스러운 것일
뿐이고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야! 니가 걸어가던 길을 잠시 쉬어간다고 생각해라.
항상 걸을수만은 없다. 그게 사람이다.
삶은 그렇게 되도록 우리에게 강요를 요구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라.
넌 반드시 너의 무엇을 가질 수 있을테니까... 그것이 니가 울어야 할 이유라면
난 이미 울다가 지쳐서 죽었다."
추림의 말에 수연은 추림의 과거와 현재를 기억할 수 있었다. 맞다. 자신은 왜 그리
소심하고 나약했는지 몰랐다. 가슴이 뻥뚫리는 기분이었다. 막연한 사실을 그에게
직접 확인하고 나니 뭔가 후련해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인정하는거다. 일이년 쯤 아니 그보다 더 늦어진다고 해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엔 반드시 변하지 않을 것들도 있었다. 단지 쉬어가는 것 뿐이다.
몸에 기운이 쫘악 빠져 나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단 몇마디 말을 듣고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토록 힘들게 여기고 어려웠던 고민을 단 오분만에 그처럼 해결해 버리다니...
자신이 오고 싶어하던 실체가 이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티내지 말고 웃어야지. 다 보이잖아!"
웃고 있지 않은 수연인데 추림은 머슥한 기분을 없애주려고 일부러 그런 소리를 했다.
"그래. 내가 바보였나봐! 후련하다. 그래도 되겠지? 그치? 조금 늦는것 뿐이겠지?"
비로서 자신을 자책한 수연이 추림에게 확인하고 싶어 묻자 추림이 자신의 잔을
비우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축하주 한잔 따라주마. 그래 넌 이미 인정했고 또 성숙해졌다.
니가 바라는 것은 항상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흐르는데로 두어라.
이놈아!"
베시시 웃음진 수연이 힘차게 잔을 비우고 추림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너무 힘들었거든. 외롭기도 했고.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해서 더 그랬나봐."
"자식. 내가 해결사는 아니다만 그런 일이 있으면 종종 찾아와서 이렇게 술이나 같이
마셔줘라. 실컷 들어주고 투정도 받아줄테니."
수연은 잔을 채워주고 추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문득,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커 보이는듯했다. 겨우 스무살... 어떻게 하면 저런
느낌을 연출할 수 있을까? 포장된 것이 아닌 너무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것이었기에
수연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성숙하고 커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아버지같고 스승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들에게서 풍기는
근엄함 같은 것이 아닌 그만큼의 무게를 느낀것이다.
"너에 대해서 말해볼래? 아이들이 니 이야기를 참 많이 했어. 들은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아. 강수가 친구들 중 성공하면 니가 가장 빠를거라고 했는데...
나도 그럴것 같아. 특히 너 학교 그만둔거... 그거 듣고싶은데?"
수연의 말이 끝나자 마자 추림의 얼굴에 잠깐 어두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금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 이야기는 또 왜 꺼내고 그래? 이미 지난 일인데... 관두자."
"넌 억울하지도 않니? 나 그 이야기 듣고 얼마나 속상했는데.
하마터면 울 뻔했단 말이야."
수연이 작년 강수에게 추림이 학교를 자퇴하게 된 사연을 듣고 사실은 울었지만
거짓말을 했다. 추림이 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연은 추림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지만
추림은 후회하거나 그 일로 누구에게 따진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추림에게 당시일을 가지고 멍청하네 바보네 하며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되도록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림이었다.
"사회에 도망치듯 나와서 참 지랄갔더라. 갈데도 없고 의지하기는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안해본것이 없었다. 처음 내가 한 일이 무엇인줄 아니? 웃어도 돼.
고물을 주우러 다니는 거였어. 죽어라고 했지. 형님과 사촌막내 형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의지하기 싫어서 고물상에서 내붙힌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갔지... 할만하더라. 단지 일이 필요해서 한것은 아니야. 사회 나와서
처음 일해보려거든 가장 힘들고 밑바닥부터 경험 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딱 일년을 죽어라고 했다."
목이 탄 추림이 물을 벌컥거리고 수연을 바라보고 씨익하고 웃었다.
결코 웃을 수 없는 추림의 말에 수연은 얼굴을 굳히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일년을 일하고나자 한 삼백 정도가 모아졌더라구. 그리고 내가 한것이 또 뭔줄 알아?"
"아니.계속해줘."
분명히 웃기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수연은 어쩐지 추림의 얼굴에서 쓸쓸한
기분을 엿보고 그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여겼다.
"여관방을 하나 얻고 삼일인가를 내내 잤어. 죽은듯이 잤다. 일년동안 일하면서
내게 그것이 가장 필요했거든. 하루 세네시간만 자고 나머지는 주요소와 고물상을
오가며 일했어. 깨어나고 또 내가 한 처음 한것이 궁금하지?"
"......?"
"훗... 울었어. 삼일만인가... 실컷자고 일어나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왜 그리 눈물이
쏟아지던지... 엄청 울었나봐! 목적이 사라진것 같은 허전함과 고독감에 진저리가
나더라고. 이 두손이 어찌나 상하고 거칠어 져 있던지...
손을 얼굴에 부비며 엄청 울었어... 이제 뭘해야하나... 이럴것을 뭐하러 일년을 잠도
자지 않고 죽어라고 일했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수연은 추림이 쳐든 두손을 바라보다가 코끝이 시큰해져왔다.
목이 울렁거리고 눈이 화끈거렸다. 친구의 누명을 대신 뒤집어쓰고 그만둔 학업을
그는 사회인이라는 신분이 되어 그렇게 외롭고 힘들게 살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되자 그가 못내 가엽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학창시절 그가 써내려가는 글을 여러번 보았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있던 친구였고
남자다운 친구였다. 뛰어난 글 솜씨와 공부와는 다르지만 엄청난 구독력을 자랑하던
그가 계속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지끔쯤 아마 철학이나 국문대학에 진학하고
있을지도 몰랐을 친구였는데... 왜 바보처럼 친구들의 일을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그토록 우기고 험한 길을 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되게 힘들게 지냈구나! 미안해... 그런 지경인줄도 몰랐어."
"니가 왜? 나대로의 길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친구놈일로 아주 골때리게 지냈다.
명호녀석 알지? 그 새끼... 에이 신발놈!"
갑자기 추림의 입에서 쌍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왔는데 수연은 가슴이 무너지는듯한
기분이었다. 장명호... 너무 잘 아는 친구였다. 나이가 무려 네살이나 많았지만 어려운 집안 환경때문에 학교를 늦게 입학해서 자신들과 동문이 된 친구였다.
덩치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에 카리스마가 넘치던 친구... 그는 작년에 죽었다.
폭력조직에 가담하고 추림에게 구원받았다고 들었다.
강수의 말로는 그 친구가 억울하게 살해당했다고 추림이 명호의 사건을 들쑤시고
다녔다고했다. 결국 원하는 것은 얻지 못했다고 했는데 당시 추림은 반 미치광이
같았다고 했다. 그때 동거를 같이했다던 여자가 있었는데 현재 그 여자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고있고 가난한 여공이라했다.
그들을 추림이 돌보고 있다고 했지만 믿을수는 없었다.
연거푸 소주를 석잔이나 따라마신 추림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신발놈... 그렇게 가면 어린 애새끼는 어떡하라고... 아 짜증난다! 하여간 바빴어.
지금 하는 일 재밌고 보람도 있다. 부모님에겐 너무 죄송하지만... 이게 내 길이라고
생각한다. 팔자겠지 뭐!"
싱겁게 끝나버린 자신의 지난 일이었다.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을텐데 그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울쩍해진 수연이 반짝거리고 빛나는
추림의 눈을 보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나 오늘 재워줄 수 있지? 술이나 실컷 마시고 푹 자고싶어."
"내 마누라 되겠다고? 흠... 그러자. 방도 두개고...물은 실컷 써라."
수연과 추림은 아무 꺼리김없이 말을 주고 받았다. 수연은 추림을 믿었고 그런
수연의 믿음을 저버릴 추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추림이란 친구라면
모든게 믿어질 것 같은 수연은 오늘 그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정말 그와 술이나
실컷 마시고 싶었고 조용한데서 푹 자고 싶었다.
"그냥 온건데... 너안테 너무 부담만 주는거 같다 그치?"
정말 그런 마음이 들은 수연이 말하자 추림이 풀썩거리고 웃었다.
"부담? 마누라 되겠다고 그러는데 웬 부담이람?"
"너 정말 나랑 신랑 각시할래?"
"......?"
추림의 농담에 오히려 심각하게 수연이 말하자 추림이 꿀먹은 벙어리로 변했다.
"바보! 그럴 용기도, 마음도 없는 주제에......!"
추림이 마음에 있어 그렇게 말한것이지만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추림이인지라
뚱한 얼굴 표정이었다.
"아! 나 요즘 여자들이 무서워서 죽겠다. 만나는 여자마다 왜들 이러나 정말!"
"뭐라고? 이 바람둥이......?!"
"오해마셔! 난 엄청 순수하고 깨끗하니까."
"......!"
"야! 나가자. 어젯밤에도 왕창 망가졌는데 오늘도 망가져 버려야겠다.
아! 망가지는 인생 서럽도다!"
추림이 일어서자 수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림이 힐긋 시간을 보니 밤 아홉시가
되어 있었다. 내일이 금요일이니 아마 간부들이 미팅을 가질것이다.
그 사이사이에 요령을 부릴수 밖에 없을듯했다. 사실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다.
이럴때는... 술이 최고였다.
'젠장! 내가 알콜중독인가?'
계산대로 다가가며 추림이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들어 정말 심각하게 느끼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