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 그놈 이름이 이 정후란 말이지..”
광택나는 구두를 망쳐놓은 죄로 여은이에게 머리채를 내줘야만 했던 여진은 뭉텅이로 뽑힌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내가 이선복의 아들 이정후다”라고 부르짖던 남자를 떠올렸다.
이선복 작가의 아들이 이정후?
말도 안돼! 거짓말이야! 그자식이 사기치는거야!
여진은 부정하려 했다. 당대 최고의 작가이자, 1980년대 드라마계를 주름 잡았던 대가 이선복의 아드님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겨먹은 그놈이라니. 이게 말이돼? 암 말도 안돼지!!
하지만, 만약이라도 그말이 사실이라면.....
여진은 뭉텅이로 빠진 머리털을 휴지통에 집어넣으며 불과 3시간 전 일어났었던 남자와의 일을 되집었다.
[뻥 좀 그만치시죠?]
[뻥 아니라니까.]
[내가 대통령 딸이라면 댁은 믿겠어요?]
[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울 아버지 이선복 맞다니까.]
[그럼 증거를 대보시던가.]
너의 말은 믿지 못하겠으니 증거를 대보라며 눈을 치켜뜨며 묻자, 이정후라는 남자는 가슴팍을 치며 답답해했다. 호적등본을 떼어올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이선복이 자신의 아버지라는걸 증명해보일건 지금당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이선복 작가의 첫 데뷔작이 무엇이더냐 물었더니, 아들이라는 놈이 모른단다. 별 관심이 없어서,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단다. 어찌 아버지의 데뷔작도 모르느냐 따져묻자 그럴수도 있지 않느냐 되려 큰소리 친다.
이선복작가의 첫 데뷔작이 얼마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것인데 아들이 그것도 몰라? 난 아직까지 생생한데.
여진이 12살 되던해 시청률 70%라는 경의적인 기록을 내세운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탄탄한 구성력으로 매 씬마다 예상치도 못했던 신선한 재미와 가족애, 애증과 카타르시스를 던져주어 그해 방송대상 극본상의 영예를 안았던 작품. 토요일 일요일, 황금시간에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기 위해 9시부터 10시까지는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다. 드라마가 끝난후에도 가족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주인공이 어쨌느니, 저쨌는니, 누가 나빴고, 누가 불쌍했느니 열띤 공방을 벌였고, 주부들은 드라마가 끝난후에야 산더미 같이 쌓인 집안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여진도’인생은 아름다워’의 열혈팬이었다. 엄마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9시20분이면 졸린눈을 억지로 떠가며 ‘인생은 아름다워’를 시청했고, 매주 주말만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12살의 어린나이에 드라마속에서 나오는 어른들의 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뿜어져나오는 독특했던 인물들의 카리스마는 여진의 작은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후로 여진은 그분이 집필한 드라마는 본방은 물론이거니와 재방까지 챙겨봤다. 인터넷보급이 안되어서 대본을 구하기 어렵던 시절엔 비디오로 녹화를 시켜놓고 대본을 필사를 해서 보관해두었다.
한순간의 지루함도 없이 특유의 놀라운 흡입력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한번에 사로잡은 이선복작가는 여진에게 있어 인생의 판로도 결정짓게 만들었다.
브라운관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기를 하는 연기자가 아닌, 그들의 뒤에서 손가락에 물집에 생길정도로 대본을 써서 연기자들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작가- 자신이 쓴 대본으로 시청자들이 하루동안 쌓였던 삶의 피곤을 벗어던지고 잠시나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줄수 있다면 나 자신도 얼마나 보람차고 행복할까….
해보고 싶다! 써보고 싶다! 그래, 해보자!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시나리오를 써보자! 이선복 선생님처럼 인간의 삶과 애환이 닮긴 드라마를 써보자! 그래서 십년후에 방송국에서 만나자! 그분과 당당하게 경쟁을 해보자!
하지만, 여진이 19살 되던해, 80년에서 90년대까지 드라마계의 한획을 그었던 이선복작가는 1999년 ‘다시사랑하리’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방송계를 떠나셨다. 그분의 마지막 작품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던 소녀 여진은 이제 28살의 성인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그녀의 마음속엔 언제나 그분의 주옥같은 작품은 남아있어 마음 깊숙히 그분을 스승처럼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의 아들이 나타난 것이다. 절대 이선복 작가와는 매치가 되지 않는 그분의 아들 이정후-
부자는 닮는다고 하는데 어찌 이리도 닮은 구석이 없더냐.
여진이 끝까지 믿지 못하겠다고하자 정후는 정 못믿겠으면 증거를 보여준다며, 다음에 만날때 아버지의 친필싸인과 ‘다시 사랑하리’의 진품 대본을 가지고 나타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진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그말은 또 어떻게 믿냐고...
그랬더니 대뜸 연락처를 알려달란다. 또 널 뭘믿고 내 연락처를 알려주냐 했더니만, 정후는 한심스럽게 여진을 쳐다보며 ‘너한텐 관심 없다, 난 내 말이 진실인지만 알려주겠다’고, ‘어쩜 사람을 그렇게 못믿냐’며 복장을 쳐댔다. 그정도까지 했으니 여진도 잠시 망설여졌다. 만약 이정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된다면, 이선복 작가의 친필싸인과 그렇게나 소장하고 싶었던 ‘다시사랑하리’의 대본까지 얻을수 있는 기회다. 그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싶은 여진은 남자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주었고, 이정후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믿어주지 않는 여진에게 두고보자는 말을 남기며 씩씩대며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연락을 준다는 남자는 일주일이 지난후에도 연락이 없었다. 결국 거짓말인란 말인가?
- 4장.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이정후에게서 연락이 온건 일주일하고 이틀이 지난후였다.
일주일하고 이틀동안 바깥구경을 못해본 여진은 그날도 강아지 띨구와 함께 집안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삼일동안은 행여 이정후에게 연락이 올까 화장실에 갈때도 휴대폰을 주머니속에 넣고 다녔지만, 결국 그놈의 말이 뻥이라는걸 뒤늦게 깨닫고 나서는 휴대폰도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어차피 연락올대도 없으니까.
“띨구야. 배고프지? 이 누나도 배고프다. 너가 사람이라면 밥차려 달라고 할텐데, 넌 네발 달린 짐승이니 내 밥을 차려줄수 없겠구나. 어쩔수 없지뭐. 오늘 점심은 너랑 나랑 굶자.”
네발 달린 짐승 띨구를 뒤집어놓고 배를 쓰다듬던 여진은 나도 굶으니 너도 굶으라는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렸다. 주인 잘못만난탓에 늘 고생만 하는 띨구가 가엾기 그지 없다. 그저 신세한탄 하듯 띨구는 “멍멍” 짖어댈뿐이다.
띨구를 괴롭히는데 한참 재미가 붙었던 여진은 어디선가 작게 들리우는 벨소리에 잠시 귀를 귀울였다.
여은이가 휴대폰을 놓고갔나? 처음엔 그리 여기며 죄없는 띨구의 귀를 잡아당기며 사악하게 즐거워하던 여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만 방으로 들어가 무엇을 찾기 시작했다. 벨소리는 울리는데 어디서 울리는지 알수가 없다. 책상위도 찾아보고 침대 밑을 찾아봐도 없다. 조금만 있음 끊길 태세이다. 얼마만에 울리는 전화인데 이대로 끊기게 할수는 없다.
잠시후-
“찾았다!!!”
마치 “심봤다”를 부르짖는 심마니처럼 침대 맡 도랑 진곳에 빠져있는 휴대폰을 건져 올리는 여진은 헛기침을 하며 재빠르게 슬라이드를 밀어올렸다.
“여보세요!”
“왜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일주일하고 이틀동안 깜깜 무소식이었던 이정후였다.
***********
“자요! 이제 믿겠죠?”
약속장소인 젠느 커피숍의 문을 열고 들어온 정후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여진에게 인사는 커녕 둥그런 테이블에 서류봉투를 턱하니 던져놓는다. 예상치도 못한 표정으로 정후를 올려다 보던 여진이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두툼한 서류봉투에 시선을 두었다.
“이게 뭐에요”
“증거를 대보라면서요. 증거에요. 증거! 내가 그거 몰래 빼돌리느랴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여진 때문에 많이도 억울했던 모양이다. 불만 가득 섞인 말투로 말하곤 정후는 푹신한 쇼파에 털썩 앉으며 여진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젠 믿겠지?라는 눈빛을 던지면서.
떨떠름한 여진은 두툼한 서류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고,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렸다. 정녕,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이선복 작가의 아드님이 이 남자란 말인가. 하느님 맙소사!!!!
서류 봉투 안에는 이정후가 증거로 가지고 온다고 말했던 이선복 작가의 친필 싸인과 “다시 사랑하리”의 2회분 대본이 들어있었다. 친필싸인이야 조작할수 도 있는거지만, 대본은 1999년도에 제작한거라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작가와 연기자들만 지닐수 있었다. 그것을 이정후가 가지고왔다는것은, 엄밀히 말해, 이선복의 아들은 이정후가 맞다는 거나 진배없다.
여진은 경의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본을 조심스레 들었다. 대본을 든 손끝이 떨린다. 두눈이 마치 금부치를 보는거마냥 반짝 빛이 난다.
“정말.. 정말 이선복작가님 아들 맞아요?”
“몇번을 말해요. 맞다니까.”
“세상에, 웬일이니.. 나 그분 팬이에요..”
스타를 좋아하는 십대 소녀마냥 여진은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고, 그런 주책을 부리고 있는 여진을 정후는 한심하다는듯 바라봤다.
“울아버지한테도 이런 광팬이 있을 줄이야.”
“나, 이 드라마 보고 얼마나 울었는데.. 진서가 사랑하는 남자를 보내주잖아요. 그때 알았어요. 사랑하는데 어쩔수 없이 보내줘야만 하는 진서의 마음을..”
“얼씨구~”
“그래도 운명은 운명인지, 몇년후에 다시 만났잖아요, 진서랑 영민이.. 그 명장면 아직도 기억해요.겨울 바닷가에서 키스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진서를 바라보는 영민이의 그 애절한 눈빛.. 아 생각해도 가슴 떨려. 엔딩 장면에서 정말 많이 울었는데.”
그때를 회상하는냥 여진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저, 이거 가져도 돼요?”
“맘대로.. 어차피 쓸모 없는건데..”
감격스러운 여진을 보자 한층 더 어깨가 올라간 정후는 아버지 몰래 빼돌려온 대본이라 걸리면 끝장나는걸 알았지만 여자앞에서 대본 하나 때문에 속좁은 남자는 되기 싫었다. 정후는 속으로는 울고 있었지만 더욱 과시하는듯 말한다.
“말만하면, 다 가져다 줄수도 있는데...”
“정말요?”
아뿔싸! 이건 아닌데...
뜨끔한 정후는 재빨리 말을 바꾼다.
“도대체 여기는 손님이 왔는데 메뉴판도 안가지고 오고.. 손님은 왕이다 몰라?”
괜히 죄없는 알바생에게 핀잔을 주는 정후는 여진의 의사도 묻지 않고 오렌지 주스 두잔을 시켰고 잠시 후 알바생이 오렌지 주스 두잔을 테이블에 놓자 마자, 목이 탔는지 빨대를 빼고 주스를 시원하게 마셨다.
“빨대는 폼인가?”
“언제 빨대 꽂아서 먹어요? 감질나게...”
반쯤 비워진 컵을 내려놓으며 정후는 자신을 희한하게 쳐다보고 있는 여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민망했던지 턱을 매만지며 톡 쏘아댄다.
“뭘그렇게 쳐다보시나.”
“참 특이한 캐릭터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여진은 대본과 싸인종이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손도 대지 않은 오렌지주스가 아깝긴 했지만, 여기서 이정후와 노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이남자와는 볼일은 이걸로 끝났다. 맘 같아선 이정후에게 부탁해서 이선복작가를 직접 만날 기회를 제공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정후와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이정후와 친해져볼까도 잠시 생각했지만, 친구먹기도 손발이 맞아야 해먹지 눈 앞에 앉아 있는 남자와 친구를 먹는건 영 내키지 않는다.
“용건 끝났으면 가볼께요. 이거 고마워요.”
“고마우면 차값은 댁이 내던가.”
역시나 이남자와 친해지는건 무리다.
기생오라비에 쫌생이!!
여진은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며 남자를 흘겨보았다. 친필싸인과 대본을 얻었으니 득이되면 득이 됐지 밑지는 장사는 아니기에 차값은 낸다 치더라도 쇼파에 편안하게 앉아 남은 오렌지 주스를 빨대도 없이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 이정후는 주는거 없이 얄밉다.
“그럼 갈께요.”
차값을 계산하고 커피숍을 나올때, 정후가 뒤따라 나와 여진을 부른다. 저놈 저거 대본 뺏으러 나온거 아닌가 싶은 여진은 못들은척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차값까지 계산하게 만들어놓고 지금와서 대본을 뺏길순 없었다. 하지만 여진보다 걸음이 빠른 정후는 금새 여진을 앞질러 그녀의 앞에 섰다.
“뭐 걸음이 그렇게 빨라?”
“왜요?더 볼일 있어요?”
“아직 식사전이죠? 차값은 댁이 냈으니, 점심은 내가 내려구요. 빚지고는 못살거든요. 내가..”
어머 왠일?
좀전까지는 단돈 만원에 쩔쩔매는 쫌생이 같이 굴더니만 지금은 통크게 점심을 산단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다 이정후라는 사람.
여진은 자신보다 족히 20cm나 큰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부서질듯 따사로운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
바람끼가 다분해서 여자 꽤나 울렸을거 같이 생겨먹은 곱상한 얼굴로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으면 지나가던 여자도 한번쯤 뒤돌아보게 만드는 특출난 마스크를 지녔다, 이정후는.
여진은 잠시 입을 헤 벌리며 남자의 마스크를 감상했지만 곧 쓴 입맛만 다셨다. 그럼 뭐하냐고 성격은 개차반인데...
“먹을래요?”
“정말 점심 사려구요?”
“왜요? 싫어요? 싫음 말고.. ”
“왜요?”
“왜라뇨?”
“안하던짓 하니까 이상해서요.”
“그럼 댁 눈엔 내가 여자 등쳐먹는 놈으로 보였단 말이에요? 그깟 차 한잔에?”
“그거 아닌가?”
“말 하는거 정말 정 안간다. 누군 뭐 댁한테 점심 사주고 싶어서 그런지 아나? 울 아버지 팬이라길래, 팬관리 차원으로다가 어쩔수 없이 이러는거라구요.”
“보기보다 효자시네요.”
”그래서 싫다는거에요. 좋다는거에요?”
여진은 좋다 싫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자꾸 이남자와 엮기는게 불편했다. 특별히 이정후가 피해주는건 없었지만, 계속 이남자를 만나다보면은 그의 개차반같은 성격에 시달려서 머리에든 뇌세포들만 하나씩 죽어나갈거 같다. 극과 극이었다. 이정후와, 서여진은...
“밥사준다는데 뭘 그렇게 고민하시나. 설마, 내가 댁한테 관심이 있나해서 오해하고 있는거에요?하하하. 미치겠네. 이여자.”
‘거봐. 극과 극이라니까...’
“사준다고 해도 싫다네. 그럼 조심히가요.”
싫다는 사람 굳지 사줄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정후는 미련없이 뒤돌아 걸었고, 약이 바짝 오른 여진은 앞서 걸어가는 정후를 불러세웠다.
“사줘요, 밥..”
아침 점심도 굶은 탓에 허기가진 여진은 정후가 사준다는 점심에 거절할 이유는 없음을 깨달았다. 이왕 사준다는거 비싼걸로 시켜서 골탕 좀 먹이고 싶었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정후의 밉살스러운 행동에 복수랄까? 옴팡지게 뜯어먹고 연락 끊으면 그만이지, 뭐.
여진은 속으로 쾌제를 부르며 도도한 발걸음으로 정후를 쫓아갔다.
주말이라 시끌벅적한 번화가를 걷는 정후와 여진은 또한번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이유는 뻔하다. 정후는 얼큰한 감자탕 집을 가자했고, 여진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하고 싶다 했다.
“그냥 감자탕 먹으러 갑시다. 생긴건 투박스럽게 생겨가지고 입맛은 고급이네.”
정후가 투덜거린다.
“생, 생긴건 투박스러우면서 입맛은 고급? 이사람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댁이 사준다면서요, 점심! 뭐 먹고 싶냐면서요, 점심!”
여진이 빼액하고 반문했고 정후는 빼액빼액 소리를 지르는 여진의 입을 틀어먹고 싶었다. 자고로 여자의 목소리는 옥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야하는데, 이여자는 옥구슬은 커녕 쇠로 유리를 긁는것처럼 빽빽거린다. 것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쪽팔리게.
“아,알았어요. 거 조용히 좀 말해요. 지랄 같은 성격 광고할 일 있나? 교양 좀 지킵시다.”
“교양 교양 운운하는데, 댁이나 그 개차반 같은 성격 좀 고치시죠.”
“뭐요? 개, 개차반?”
이에는이!!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똑같이 맞 받아쳐 주겠다. 이정후씨! 사람 잘못 봤어.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거든? 너따위에게 절대 지지 않아!! 기필코 난 고급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할테다.
한참 실랑이 끝에 여진의 바램대로 그들의 점심 메뉴는 고급레스토랑 정도는 아니지만 칼질을 할수 있는 돈가스집으로 정해졌고, 남자가 왜 이리 쫌생이 스럽냐고 쓰는김에 더 쓰라고 따지자, 정후는 내여자가 아닌 이상 비싼레스토랑에 데려가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다.
“정 고급레스토랑 가려면 내여자 하던가.”
“됐거든요.”
내여자 하던가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정후때문에 여진은 눈에 쌍심지를 키며 펄쩍 뛰었다. 네여자 하느니 우리집 띨구만 보면서 평생 노처녀로 살겠다.
서로 감정이 상한 두사람은 1m 간격을 떨어져 걸었고, 여진은 앞서 걸어가는 정후의 뒷통수를 노려보며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어휴, 얄미워, 어휴 웬수! 할수만 있다면 이 주먹으로 정후의 뒷통수를 한대 후렸쳤음 속이 다 시원할텐데.
신촌 번화가를 한바퀴정도 돌았음에도 정후는 돈가스집을 찾지 못했다. 보이는 돈가스집은 많았다. 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은 장소였기에 정후는 외면했다. 뻔히 보이는 얄팍한 정후의 속내에 졌다싶은 여진은 너가 못찾으면 내가 찾겠다며 주변 간판을 둘러보다 뭐에 홀리듯 순식간에 지나쳐가는 사람의 뒷모습에 두 눈동자가 향했다. 분명 순식간에 지나갔음에도 여진에게는 슬로우모션이었다.
천둥번개를 맞은 기분이다. 심장이 꽉 조여졌다 풀어지는 느낌. 발 끝에서 머리끝까지 신경들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 수많은 인파중에 눈에 띄는 한 남자.
입안의 침이 말라서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남자의 이름까지 건조하다.
“진우...진우야..”
눈이 그를 쫓는다. 다리가 그를 쫓기 시작한다.
가격이 알맞은 돈가스집을 찾았는지 여진에게 손짓을 하는 정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주변풍경은 백진우를 위한 프레임에 불과하다. 서여진의 눈동자는 오직 백진우만 찾는다. 사람들에게 치이면서도 황급히 백진우만 쫓아간다.
한때 미치도록 사랑했던 남자.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안겨주어 죽을만큼 여진을 힘들게 했던 모진 남자.
한동안 그리움에, 미련에 몸살을 앓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잊혀졌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그의 흔적들이 하나둘씩 보일때마다 숨이 막히는건 어쩔수 없다. 행여 술마시고 전화를 걸까 무서워 그의 번호를 잊기위해 노력했다. 백진우의 얼굴이 떠오를까봐 그의 사진은 몽땅 불에 태워버렸다. 그의 손길이 그리울까, 그의 품이 그리울까, 그의 입술이 그리울까 아무생각도 할수 없도록 잠만잤다. 그래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게 백진우를 보는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발길이 무작정 백진우를 쫓는다. 입술은 말라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를수가 없다. 팔에 힘이 없어 그를 붙잡을수가 없다. 그저 모든 힘이 다리에만 집중되어 그만을 쫓는다. 이런곳에서 마주칠줄이야.
변한것은 없다. 늘 정갈하고 늘 편안한 모습이다. 아. 머리카락이 전보다조금 길어졌구나. 좋아보인다. 더 밝아 보인다. 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바람에 부서지듯 여진에게도 스며든다.
아름다운 남자. 밉지만 미워할 수 없던 남자. 잊으려고 했지만 잊을 수가 없던 남자.
여진의 머릿속은 온통 백진우 투성이다. 뒤에서 정후가 쫓아오고있는지도 몰랐다. 어디가는거냐고, 재차 물어봐도 정후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백진우는 전면 유리창인 커피숍으로 들어갔고, 그곳까지 차마 쫓아갈수 없는 여진은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전봇대에 숨어 그의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여진의 어깨를 툭툭치며 정후도 커피숍 안을 들여다본다.
“뭐해요, 여기서.”
“........”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
“.......누굴 만나는걸까...”
“예?”
“.....설마 그 불여시를 만나러 온건가?”
“뭐라는거야.”
“...... 나쁜놈.”
“나, 나쁜놈? 지금 나한테 하는 말?”
전봇대 뒤에 숨어서 커피숍 안을 염탐하고 있는 여진의 뒤로 정후도 있었지만, 여진은 정후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살짝 가리며 커피숍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유부남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아줌마마냥 콧바람을 킁킁대는 여진에게 호기심이 생긴 정후도 뒤따라 온다.
역시, 여자의 직감은 정확했다. 백진우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뒷모습이 어여쁜 여자의 앞자리에 앉았고,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여진은 눈을 크게 뜨고 계속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두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모르지만, 백진우는 크게 웃기도 하고,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했다. 커피를 시켰는지 잠시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들어 커피도 마셨다.
스토커마냥 커피숍 창가에 딱붙어서 들키지 않게 두사람을 염탐하던 여진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좀전까지 백진우에 대한 그리움에 미련에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질투와 분노가 적절히 뒤섞인 이 알수 없는 감정!
이미 끝난 인연인데 뭐하러 질투와 분노를 하냐고 묻는다면, 직접 저 장면을 목격해보아라 말해주고 싶다. 차라리 몰랐다면 다행인데, 여진의 눈앞에서 너무도 다정한 연인들을 보자 울화가 치민다.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나에게만 아름다운 미소를 나눠줄거 같던 남자가 그보다 더 아름답게 미소를 짓고 있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다면 어떤 여자라도 눈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여진의 눈은 이미 뒤집혔다. 바람피다 들킨것도 아니었고, 유부남 불륜 현장을 잡은 부인도 아니었다. 백진우와 서여진은 남남이었고, 지금은 아무사이도 아니었다. 아니 남보다 더 못한 사이다. 길가다 마주쳐서도안될 헤어진 연인이었다.
꽉 다문 어금니가 으드득 갈린다. 커피숍 창을 곧 내려칠것처럼 두주먹을 굳게 뒤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다.
백진우의 앞에 앉아 있는 저 여자. 이름이 정인이라고 했나? 기집애, 뒷모습도 하늘하늘하니 딱봐도 백진우가 좋아하는 타입이다. 하늘색 원피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를 지녔다. 가는 팔뚝으로 머그잔을 들고 여우같이 연신 웃고있는지 갸얇은 어깨가 들썩거린다. 허나, 여진의 눈엔 보인다. 하늘색원피스로 가리고는 있지만, 엉덩이 뒤에서 살랑살랑흔들고 있는 여우의 꼬리를..
여우에게 홀린지도 모르고 웃고 있는 바보같은 백진우-
“부셔버릴꺼야.”
이상황에서 딱어울리는 말이었다.
부셔버릴꺼야. 부셔버릴꺼야!!! 너희들, 부셔버릴꺼야!!!!
모 드라마에서 자신을 버린 남자에게 시퍼렇게 눈을 뜨고 독하게 쏘아댔던 여자의 그한마디를 내가 하고 있을줄이야..
하지만, 기필코 부셔버리리라.
여진은 커피숍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눈에 뵈는게 없었다. 내 남자를 꼬득인 불여시 같은 년 얼굴에 뜨거운 커피를 부어버릴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마음을 뺏아간 불여시의 검은 생머리를 다 뜯어놓을 것이다. 하늘색 원피스에 감춰진 여우 꼬리를 백진우에게 보여줄것이다.
이일을 계기로, 백진우가 정 떨어졌다 해도 상관 없다. 폭력행사로 경찰서에서 콩밥을 먹어도 좋다. 사람들에게 얼굴 팔려도 상관없다. 오로지 부셔버리겠다, 가만안두겠다는 일념하나뿐이다.
왜 나만 아파야했는데, 왜 나만 고통스러워야했는데, 너희들은 행복해서 죽을라고 하는데, 난왜 힘들어서 죽을라고 하는데. 너희들은 웃고 있는데 왜 난 울어야 하는데...
그 한달의 시간동안 난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자고 웃지도 못하고 맨날 눈물만 흘려서 얼굴에 주름만 생겼는데, 너희들은 나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웃고 떠들고, 사랑의 엔돌핀은 마구 발산되서 피부도 좋아지고, 얼굴에 주름도 하나 사라졌지?
억울해. 왜 나만 손해봐야하는데. 한달의 시간, 보상받겠어. 너희들 얼굴에 똑같이 주름하나 박아주겠어.
기필코 저 두사람 사이를 갈라놓겠다는 못된 심술보로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때, 정후가 그녀를 가로 막는다.
이미 사태파악은 했다. 한강대교에서 사랑에 배신당했다고, 불여시가 내 남자를 채갔다고 울고불고 했던 여자였다. 뭐에 홀린듯 뒤에서 부르는데도 듣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쫓아가던 여자였다. 그리고 스토커마냥 그들을 관찰하더니 부셔버리겠다는 말을 던지곤 커피숍 안으로 돌진하려던 여자였다. 처음엔 호기심에 지켜봤다. 여자의 반응도 꽤 재밌었다. 곧 뭔가 터트릴것 같아 흥미로웠다.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재밌다고 하는데 이건 더 실감났다. 한남자 때문에 머리 뜯고 싸우는 두 여자. 정후는 내심 여진이 저안으로 쳐들어가서 옛애인을 꼬셔낸 그 불여시의 머리털을 모조리 뽑길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정후의 마음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무엇때문에 바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여진을 막아야했다. 커피숍 안으로 못들어가게 해야 한다.
“뭐하는거에요, 지금.”
들어가려는 여진의 손을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여진이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자의 힘은 여자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이거놔.”
“지금 저안에 들어가서 뭐할라구요, 창피하지도 않아요?”
“창피요?”
창피? 그래 창피하다. 분명 백진우는 현재 사랑하는 그 불여시 편을 들테고, 구경꾼도 이유도 모르고 들이닥친 여진에게 손가락질할게 불보듯 뻔하다. 잘 사귀고 있는 연인 사이에 끼어든 스토커처럼 그녀를 비난할것이다. 그런데 못참겠다. 창피함이고 뭐고 그런거 신경쓰고싶지도 않다. 두사람한테 들이부어야지만 한달의 아픔을 보상받을수 있을거 같다. 그래, 어디 잘먹고 잘살아봐라 하고 모른척 지나가기엔 여진의 억장만 무너질거 같다. 가슴에 새겨진 멍울이 점점 더 커져서 속병만 생길거 같다.
“창피? 지금 저 장면을 목격하고 두눈이 뒤집혀졌는데 그깟 창피가 뭐가 대수에요?”
꽉 잡힌 여진의 손목이 계속 벗어나려고 정후의 손안에서 꿈틀댄다. 하지만 정후는 그런 여진을 질질 끌고 커피숍의 상가안으로 들어갔다.
“”따라와요.”
“놔요. 놓으라구요.”
“지금 댁이, 아니 여진씨가 하려는 짓이 뭔지 알아요?”
“네. 알아요.”
“그거 집착이에요. 그것도 알아요?”
“집착? 그래요. 집착이에요.”
“이제 남남이잖아요. 두사람. 끝났잖아요. 두사람.”
“맞아요. 끝났어요.”
“그런다고 저남자가 여진씨한테 돌아올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그딴 미련 좀 전에 버렸어요.”
“근데 왜 이래요? 버렸다면서요, 미련.”
“그래요. 미련은 버렸어요. 하지만, 자존심 상해요. 저 두사람 보니까 내 자존심이 상해서 죽을거 같아요.”
“자존심? 하- 당신이 저안에서 난장판을 버리는 순간 당신의 자존심도 땅바닥에 버리는거에요.”
“.......”
정후는 진지했다. 바보같은 여자가 자존심이 뭔지도 모른다. 당신이 알고 있는 자존심은 미련이고 집착이라고. 자존심이라면 그들보다 더 행복해져야하고, 그들보다 자신을 더 아껴서 멋진 여자로 거듭나라고 여기서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여진에게 그리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 말했다간 눈이 뒤집힌 이여자한테 심히 맞을거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고, 그동시 두 볼엔 심술딱지를 가득 붙어놓고 독이 든 눈동자로 정후를 노려보고 있는 여진이 그의 팔뚝을 꽉 물어버린다.
“아야야.”
“존말할때 놓으라고 했지?”
선명하게 찍힌 이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며 뭐 이런여자가 다 있냐는 눈으로 쳐다보는 정후.
양손을 허리에 올려놓고 씩씩대는 여진.
“누누히 말했지만, 내일에 상관 말라고 했지? 그 오지랖 그만 부리라고 했지?”
“........”
“왜 말리는데, 왜 내가하는일에 방해하는데.”
독이 든 눈가가 벌겋게 충혈되더니 그 눈에 금새 눈물이 가득 고인다. 심술딱지가 붙은 볼사이로 흔러내리는 눈물줄기. 입술에선 울음을 삼키듯 한숨을 내쉰다.
“하아. 반가웠는데.. 참 반가웠는데... 아는척 하려고, 아는척 하고 싶어서 따라갔는데.. 잘 지내느냐고, 나 버리고도 다리 뻗고 잘 잘 잤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그때 왜 안나왔냐고, 5시간동안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전화도 많이 했는데, 문자도 보냈는데, 음성도 남겼는데 왜 안나왔냐고.. 그래서 미웠다고.. 그래서 나 아팠다고... 따지고 싶었는데...”
“이봐요. 여진씨...”
“그 백여시 이름도 이쁘더니 얼굴도 이쁘던데.. 딱봐도 백진우 그놈 이상형이던데.. 백여시랑 웃고 있는 백진우가 어찌나 밉던지.. 나랑있을때보다 더 많이 웃고, 더많이 떠들고, 더 많이 행복해하고.... 그래서 속상하고, 화나고.. 밉고 싫고!!”
돌덩이가 목에 걸린것처럼 말을 이룰수가 없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감은 눈에선 자꾸 눈물만 쏟아진다.
“불공평해. 왜 나만 아파야하는 건데. 잘못은 지들은 해놓고 왜 나만 손해보는건데. 내눈에 눈물나게 했으니 지들 눈에선 피눈물 나야 하는데, 왜 행복해 하고 있는 건데.”
여진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내가 할꺼야. 쟤들 눈에 피눈물나게 내가 만들어버릴거야. 내가 아파했던만큼 쟤들도 아파야해.그래야 공평해.”
“그래서 저기 쳐들어갈려고 했어요? 피눈물나게 하려구?”
“사람 바보천치로 만들어놓고 지들끼리 히히덕대는 그 얼굴에 손톱자국이라도 새겨넣을거야.”
“그럼 속 편해져요?”
“........”
“그런다고 저들이 헤어질거 같아요?”
“....... 다 폭로할거야. 백진우 실체... 백진우는 잘때 코곤다고. 백진우는 기분안좋을땐 세균이 득실거리는 손톱도 물어뜯고, 다리털도 많고, 은근히 잘삐지고, 소심하다고... 다 얘기할거야.”
폭로해도 별로 가치가 없는 실체였기에 정후는 피식 웃어버린다.
“다리털 많고, 손톱 물어뜯는게 뭐 어때서? 잘때 코골고, 잘삐지고 소심한게 뭐 어때서? 난또 실체폭로한다길래 대단한건지 알았네.”
사실 정후의 말이 맞다.
백진우, 흠잡을거 없는 남자다. 한때 백진우에게 흠뻑 빠졌을땐, 그의 코고는 소리도 멜로디였고, 세균이 득실대는 손톱을 물어뜯을땐 아기처럼 귀여워보였다. 다리털 많은건 터프해보였고, 잘삐지고 소심할때면 여진이 엄마처럼 어르고 달래서 풀어주었다.그런데 그걸 약점으로 잡겠다니.. 여진이 생각해도 말도 안된다.
“잊어요. 복수 하고 싶다면 깨끗하게 잊어줘요. 그게 복수에요. 행여 오늘처럼 길에서 마주친다면 반갑게 인사할수 있을정도로, 너없이도 난 잘살고 있다, 봐라, 이렇게 웃어줘요. 그게 자존심이에요.”
주저 앉아 있는 여자를 일으켜 세우며 정후가 말했다. 정후에게 기대 어렵사리 일어나는 여진은 고개를 푸욱 숙였다.
“좋아요. 고급 레스토랑가서 내가 칼질시켜줄게요.”
선심썼다. 일단, 여진이 커피숍안으로 들어가는걸 막아놓긴 했는데, 여차하면 또 독을 품고 커피숍으로 뛰어들어갈 기세가 보이기에 정후는 그렇게나 노래를 부르던 고급레스토랑에서 칼질을 시켜주겠노라 선포했다. 하지만, 여진은 꿈쩍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지금이상황에서 칼질이라니...
“여진아...”
그때, 그들 뒤에서 여진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가 등장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여진은 뒤를 돌아봤고, 거기엔, 놀랍게도 진우가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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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말 달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욱 열씨미 쓸께요..
완결까지 함께 달려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