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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에 ; 청춘극장

님프이나 |2006.06.23 22:47
조회 3,477 |추천 0

  “그래, 노니까 좋아?”

  “네, 노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버지는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식당의 식탁위로 아이스박스를 펼쳐 반찬거리들을 꺼냈다. 반찬거리들은 육해공군 산해진미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퇴직 후엔 아주 우아한 노년을 보내신다. 두 분은 매달 정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 후, 최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하신다. 또한 몇 달에 한번씩은 한가롭게 해외여행들도 다니신다. 하지만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시는 두 분은 수십 년 간 직장생활을 한 탓에 지나치게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시다. 지나치게 건전한 사고방식은 은영과 번번이 부딪치기도 하였고 그에 따른 마찰에 서로 지치기도 했다. 서로 나가떨어질 정도로 지칠 시점 언니의 일본으로의 장기출장이 발생하였던 것이고 그것은 은영의 막바지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언니가 은영에게 조카 해진과 함께 집을 부탁한 것이다. 은영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쩜 은영은 그 때 이미 리서치 회사에도 함께 지칠 대로 지쳤는지도 모른다.


  “ 채은영, 세상은 네가 꿈꾸는 대로만 되지는 않는단다. 원래 일이란 힘든 거다.”

  “ 아버지 요즘 직장이 옛날 직장 같지 않아요.”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으락하며 락앤락 통에 쟁여진 반찬거리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냉장고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 나는 너 같은 고통 없이 선생생활한 줄 아니?

    말 같지도 않은 유신교육에 새마을운동까지 이겨내며 선생생활을 해온 나다. 직장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실망이 그 만큼 크지! 미래에 대해서도 채은영 너 마찬가지다. 너무 많은 장래를 생각하고 네 입에 딱 맞는 직장을 고르려단 평생 취직 못한다. 계속 그렇게 고양이만 껴안고 살 수는 없잖니?”


    은영은 머쓱 고양이를 식탁 의자에 내려놓고는 아버지를 따라 냉장고에 집어넣고 남은 새우며 생선들을 기운차게 딤채에 집어넣었다.


  “ 그건 그렇죠. 내가 이렇게 예쁜 냐옹이를 앞으로 부양하려면 나름대로 소득이 있어야 되겠죠. 그래서 좀 놀다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부동산 사무실을 좀 해볼까 해요.”

  “ 지금 당장!”

   은영의 부동산 사무실이란 얘기에 아버지는 생선을 집어넣다 말고  아버지 속 넓은 척 하는 교사 특유의 웃음을 날리며 딤채 뚜껑을 쾅 닫았다.


  “ 아하! 아니지? 한 며 십년 있다 부동산 하겠단 얘기지? 그 땐 네 마음대로 해라. 허허 어차피 난 그 때 죽었을 테니.”


  은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진심을 말했다.

  “ 아뇨! 한 몇 년 있다가? 내가 수학을 좀 하니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속 넓은 척 하던 아버지는 은영의 진심에 웃음을 멈췄다.

  “ 넌 야망을 좀 가지고 살 순 없니?”

  드디어 속내를 드러내신 것이다. 아버지는 싱싱한 생선들을 아무렇게나 딤채에 다시 쑤셔 넣더니 아이스박스를 팡팡 챙기셨다. 자식이 직장을 그만두고 빈둥대는 것은 싫으면서 진짜 완벽한 소시민적인 직업을 가지겠다고 말할 때는 부모로서 화가 나는 것이다.


  “ 아까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는 말라고 하셨잖아요?”

  “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구나! 넌, 정서불안이야?”


  은영이야 말로 아버지와 말이 안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버지는 유신시대의 직장생활을 요즘의 직장생활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직장은 가난을 돌파하기 위한 생계수단이었고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직장에 만족할 수 있었다. 일하고 월급봉투 받고 즐겁고. 사회적으로도 스트레스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했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직장생활은 다르다. 살을 파고드는 듯한 고통을 감수하는 생활이 오늘날의 직장생활이다. 단순히 3D업종이 아닌 직업이라 해서 그 직업이 인간적인 직업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 법, 오늘날 인권의 사각지대는 화이트칼라 계통에도 버젓이 존재한다.


  “ 아버지야말로 정서불안이 뭔데요? 내가 결혼하지 않은 거? 내가 직장을 그만둔 거?”

  “ 갈께!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둔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아버지는 자기 맘대로 은영의 이야기를 딱 잘라 막고 아이스박스를 들고는 현관문을 탁 나가버리셨다. 예고도 없이 아이스박스를 들고 들이닥치셨던 아버지가 팍 나가버리신 것이다. 그 때문에 은영은 오랜만에 환한 기분이 온통 망그러졌다. 망그러진 기분은 은영을 과거의 불행했던 기억으로까지 몰고 갔다. 직장에 대한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결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교육자답게 일단 결혼상대자로서 젊은 남자에게 아버지는 후한 점수를 주신다. 특히 사기꾼 스타일의 젊은 남자에게는!

  얼마 전이었다. 아버지 친구의 소개로 서울의 중위권 대학을 나와서 미국의 예일대 부속 대학 기술연구소를 나온 젊은이라 하여 은영이 맞선을 봤었다. 젊은이는 굉장한 달변가에 뭔가 있어 보이기도 했는데, 완전사기였다. 젊은이는 일찍이 의사를 협박해 정신병자라는 허위 진료서를 받아내 군대도 안 갔고, 군대를 가지 않은 다음에는 가지도 않은 유학을 갔다고 거짓말을 내뱉고 다니는 사기꾼이었다.


   당 총재가 소개해준 호주여행 중 데려온 웨이터 출신 남자도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젊은이는 자신이 시드니 대학을 나와 향후 미국 MIT대학의 석박사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과학계 인재가 되겠다고 아버지에게 떠벌였고 아버지는 그의 허풍에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라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젊은이는 일찍이 고교시절 부모님 돈을 훔쳐 뉴질랜드까지 도망갔었고 시드니 대학은 어떻게 운 좋게 들어갔지만 실력이 없어 도중하차 웨이터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는 시드니의 한 호텔 웨이터 생활 중 당 총재를 만났는데 수수번번한 말솜씨와 행색으로 총재를 구워삶아 신임까지도 얻었고 나중에는 은영과 맞선도 보게 된 것이다.


   나중에 그 모든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온통 수수번번한 그에게 넘어간 당총재와 아버지에게 은영이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에이 씨!’

   오랜만에 해진이, 새롬이, 냐옹이와 함께 환하고 즐거웠던 은영은 지난날의 황당한 일들이 떠오르며 기분이 팍 깼다.


  “냐옹아!”

  ‘정말, 뚜껑열리네.......’

 

  은영은 식탁 의자위로 냐옹이를 찾았다.

  ‘어디 갔지? 해진이 오기 전에 찾아야 되는데.’


  식탁 위 냐옹이는 보이지 않았고 은영은 식탁을 두리번거리다 새하얀 빨래들이 깨끗하게 걸려진 빨래대 아래를 성급히 찾아보았다. 혹시 너무 작아 숨겨졌을까 봐서다. 빨래대 아래도 냐옹이는 보이지 않았고 은영은 조급한 마음에 베란다로도 뛰어가 냐옹이를 찾아보았다. 베란다에도 냐옹이는 없었고 은영은 초조해져 하수도와 싱크대 수채구멍까지 뒤져보았다. 혹시나 어린 냐옹이가 지저분한데 빠져 못된 쥐들에게 물릴까 봐서다.


  은영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어느 곳에도 냐옹이는 없었다. 은영은 집밖을 나가 아파트 1층 정원처럼 보이는 풀숲을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아앗!’

  조그맣고 여리한 생물체가 풀숲 간간이 보이는 햇빛을 받아 움직였고 은영은 후딱 여린 생물체를 잡으려다 발을 헛디뎠다. 생물체의 스피드는 팽이와 같았고 그것은 은영이 넘어진 사이 은영의 손을 넘어 후다닥 톡 뛰었다. 후다닥 톡 뛰는 사이 생물체의 정체가 후딱 드러나기도 했는데 역시 냐용이는 아니었다. 은영을 놀래 킨 생물체는 꼬리가 통통한 아기다람쥐였다.  초록색 풀숲을 더욱 날카롭게 비추는 햇빛을 따라 냐옹이를 찾았지만 은영은 꼬리가 통통한 아기 다람쥐 외에 아무것도 안보였다. 단지, 햇빛에 가린 실마리만이 퍼뜩 보였다.


   바로 2층 아파트 욕실로 향하는 기둥과 베란다 난간에 키스마크처럼 똑똑 찍힌, 새끼 고양이 발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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