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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면증] 3. 바람을 타고 -2-

박성인 |2006.06.24 03:56
조회 402 |추천 0
 

“우와- 아빠 저거 봐! 저거저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들어선 놀이동산의 모습에 유리가 흥분해 소리쳤다.

여기저기서 울려나오는 노래 소리와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을 것만은 귀엽고 신기한 기념품들...

활짝 웃으며 뛰어나가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간밤에 보았던 어른스런 모습이 아닌 너무나도 아이다운 천진난만함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낯설었는데, 자신을 보며 웃는 웃음을 보자니 진짜 아빠가 된 듯 한 살가운 기분이 들었다.

“유리 뭐가 제일 하고 싶어? 놀이기구 탈까? 아니면 저기 저 토끼 머리띠 사줄까?”

“다다! 다 할래! 놀이기구도 타고 머리띠도 하고 다할래!”

“으구- 욕심쟁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욕심꾸러기일까.”

“히히- 누굴 닮긴 아빠 닮았지.”

헤죽 웃으며 토끼 머리띠를 집어 드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이 두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말도 잘해요. 내 딸... 그래 내 딸 유리는 날 닮았지-”

“정말? 에이- 하나도 기억 안 나면서 거짓말 한다. 유리 다 안다니까. 아빠가 나 기억 못하는 거 억지로 그렇게 말 할 것 까지는 없어.”

“아냐아냐- 정말이야. 머리는 몰라도 이 가슴이 아는 걸. 유리가 내 딸이구나 하고 이 가슴이 찡 하게 말해준단 말이야.”

“정... 말?”

“응! 정말. 내가 유리한테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 안 그래?”

“아빠...”

유리는 넉살 좋게 웃는 민혁의 모습에 쪼로로 달려가 품에 안겼다. 따듯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따듯한 품이다.

“저... 손님 계산은... 좀...”

“음? 아, 네. 하하. 죄송하게 됐습니다. 얼마죠?”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서는 점원의 모습에 민혁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물건 값을 치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분위기에 휩쓸려 잠시 잊고 있었다.

“토끼 머리띠는 오천원입니다. 손님.”

“오천원이요? 호- 생각보다 비싸네. 여기 있습니다. 많이 파세요.”

“네, 감사합니다. 손님 즐거운 시간 되세요.”

민혁은 점원이 내미는 거스름돈을 넘겨받고는 잔득 신이나 있는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뾰족 솟아나온 토끼 머리띠가 그리도 마음에 드는 것일까?

행복하게 웃는 유리의 모습에 마음이 즐거워졌다.

“그럼 머리띠는 샀으니까. 이제 유리가 말한 놀이기구 타러 갈까?”

“응! 놀이구가 타자. 지난번에 학교에서 혜미가 뭐라 했더라... 아! 그렇지 아빠아빠! 심밧더요 모험 타러 가자! 물도 튀고 시원하고 재미있데.”

“그래? 신밧더요 모험이라. 좋아 가자!”

“와- 히히 아빠 최고!”

민혁은 폴짝 뛰어 왼팔로 엉겨 붙는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산삼을 케러 산을 오른 심마니의 인생 역전기를 그린 테마 형 놀이기구 심밧더요 모험.

그것은 논데 월드의 심볼과 함께 민혁이 직접 작업한 대한민국 최초의 테마 놀이기구였다.


* * *


잠실 논데 월드의 중역들은 아침 일찍 걸려온 안내 데스크의 전화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전,

온 매스컴을 시끄럽게 장식했던 상실의 천재 박민혁이 논데 월드에 나타난 것이다.

“그간 대외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가 웬일일까요? 어제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사와 보도가 있지 않았었습니까?”

“그게 오늘 아침 보도를 보니, 신경성으로 판단되어 입원 보다는 통원치료로 요양을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오- 그 말은 즉 요양을 위해 택한 것이 우리 논데 월드라 이 말이군요.”

“그건...”

호기를 잡은 듯 탄성을 내지르며 말하는 홍보 팀장의 말에 자리에 모인 중역들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렇군! 역시 홍보실의 권팀장 답군. 그래, 그렇지. 그는 휴양에 좋다는 수많은 곳들을 마다하고 우리 놀이 공원에 온 것이지. 자연과 현대의 놀이가 함께하는 인간 친화적 테마파크! 그래 그게 우리 논데 월드의 모토지. 다들 그렇지 않나?”

“예, 그렇습니다. 휴양하면 논데 월드. 논데 월드 하면 휴양. 이번 박민혁의 방문은 기회입니다. 티비 cf나 신문지면 광고로도 낼 수 없었던 휴양 파크의 이미지 각인을 단번에 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 부장님 제가 직접 가서 그를 만나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의 한 마디는 분명 억대 유명 배우들보다 더한 효과를 창출해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힘 있게 말하는 윤 부장의 말에, 권팀장이 발 빠르게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고속 승진에 낙하산이라는 오명을 달고 있긴 하지만, 그는 명실공이 논데 홍보를 책임지고 있는 홍보 팀장.

김부장은 자신 있게 말하는 권팀장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 일은 자네에게 모두 맡기도록 하지. 좋은 결과 기대하겠네.”

“예, 맡겨만 주십시오. 부장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김부장을 향해 권 팀장의 고개가 꾸벅 숙여졌다.

중요 중역들에게 그간의 이미지를 벗고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중역들의 뒤를 이어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권 팀장의 걸음이 분주해졌다.


“와아!”

연신 입에서 터지는 탄성.

유리는 별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 물을 타고 흘러가는 놀이기구를 꼬옥 붙잡으며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 거렸다.

“아빠, 그런데 심마니라는 게 산삼을 케는 사람이야?”

“응? 아, 응. 심마니들은 산속 깊은 곳에 자라는 구하기 힘든 약초 산삼을 케는 사람들이지.”

“그렇구나... 그런데 아빠 심마니는 왜 심마니인거야?”

“음... 그건...”

여덟 살 꼬마다운 반짝 질문에 민혁이 뒷머리를 긁으며 말을 늘였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힌것이다.

“그러니까. 심마니라는 건, 본래 심메마니라고도 한단다. 심마니는 그들의 은어 그러니까... 사투리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것에서 비롯된 말로, '심'은 산삼, '메'는 산, 따라서 '심메'는 산에서 산삼을 캐는 일을 말하고, '마니'는 사람을 뜻하지. 그러니 심메마니는 산삼 캐는 사람을 뜻하는 거고, 줄여서 심마니라고도 하는 거야. 본래는 저기 주인공처럼 혼자 일하지 않고 일행 중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심마니를 어인마니라 하며, 젊은 심마니들 소장마니가 무리를 지어 따르지. 예로부터 한국에서 산삼이 나는 곳으로 손꼽히던 개마고원·평안북도·강원도·지리산·덕유산 일대의 산악지대 부근에는 심마니들이 모여 살며 집단 활동을 했어. 영약(靈藥) 중의 영약이라는 산삼은 매우 귀할 뿐만 아니라 찾기가 어려웠으니까. 값어치가 높았거든.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산삼을 찾아내는 일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산신령의 의지가 개입되는 신의 은총이라 믿었기 때문에 심마니들은 산삼이라는 약초의 신비함을 기리며 매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말을 사용하게 된 거지. 뿐만 아니라 무녀들이나 수행을 하는 스님들처럼 부정이 있으면 삼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행동체계에 있어서도 금기시하는 것이 많았어.”

“우와... 아빠 굉장하다. 굉장해! 굉장해! 꼭 선생님 같았어. 선생님!”

“응? 아, 아하하... 그래? 원래 이 아빠가 좀 똑똑하잖아.”

민혁은 놀란 얼굴로 박수 치는 유리의 모습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의표를 찔려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내가... 심마니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었나?’

아직도 끊이지 않는 유리의 박수소리에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도 없이 내뱉은 말들이 생각해보니 머릿속 한 구석에 또렷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심마니...

민혁은 그렇게 놀이 기구가 끝 날 때까지 유리의 박수소리와 심마니에 대한 생각에, 놀이기구를 즐길 수 없었다.

“아! 저기 나오네요. 저게 vip 팔찌를 착용하고 계신 손님이 탔던 놀이기구...”

권 팀장은 안내요원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터널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놀이기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막에서 모래알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사막에서 커다란 바위를 찾는 것은 쉽다. 그는 다른 방문객들과는 다른 몇 없는 특급 vip손님. 무전 몇 번이면 놀이공원 어디에 있더라도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와- 재미있었어. 아빠. 심마니라는 거 참 위험한 거구나. 호랑이도 만나고 벼랑도 타고 도깨비도 만나고... 심마니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주인공 심마니는 착하기도 하니 그 이후도 분명 사는 게 힘들었을 거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사는 게 힘들었을 거라니?”

“에이- 그야 당연하잖아. 아빠랑 똑같던걸?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자기보다 남을 챙기다 혼줄 나고. 그래 놓고도 시간이 지나면 또 그러고... 착한 사람은 힘든 거야. 나는 알아.”

“하... 뭐?”

민혁은 아이 같지 않은 말을 꺼내놓는 유리를 보며 머리가 지끈 거렸다.

도대체 무슨 모습을 어떻게 보여 주었기에 이제 여덟 살 먹은 꼬마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허리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세상 다 겪은 노파와도 같았다.

“있잖아 유리야. 착하다는 것은 그렇게 힘들거나 나쁜 것이 아니야.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절대 나쁘지 않아. 뭐, 유리처럼 그런 그들을 바보라고 또는 힘든 일을 사서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마음은 행동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야. 그래 그 나쁘다는 스크루지 영감도 나중에는 자신의 돈을...”

“응. 유리도 스크루지 알아. 하지만 아빠. 스크루지는 착한 심마니와 다른걸. 아빠 말대로 자신이 가진 걸 베푸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것이 조금 심하잖아. 산삼을 케서 집으러 가져가지 않으면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데 그걸 생판 부지의 할아버지에게 줘버리면 어떻게 해. 만약에 그 할아버지가 산신령이 아니었다면 심마니의 아내는 죽었을 거야. 자신에게 충실한 이후 남은 여력으로 남을 도와야지. 안 그랬다가는 힘들어지거나 슬퍼질 지도 모른다고 아빠가 그랬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어?”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유리의 말을 들으며 민혁은 가슴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하긴, 자신의 기억 상실에 대해서도 이해시킨 그다.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깨어나기 전 그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었음이 분명하다.

“호... 굉장한 따님을 두셨군요. 나를 먹어도 철이 들지 모르는 어른들이 많은 세상인데 말입니다.”

“음?”

등 뒤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민혁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민혁씨. 저는 논데 월드의 홍보 팀장을 맡고 있는 권기혁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넙죽 고개 숙여 악수를 청하는 권 팀장을 모습에 민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것인지...? 저는 논데 월드의 홍보팀과 연관 된 어떤 일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 예. 그게, 시간이 되신다면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 까 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요?”

“예.”

민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권팀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자신을 찾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 홍보 팀장이 뭐하는 사람이야? 높은 사람이야? 뭐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우리 노는 거 방해해?”

“아, 유리야. 그렇게 말하면 못써. 이거, 죄송합니다. 아직 어려서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 나이 때는 다 그런 거지요. 하하.”

민혁은 갑작스레 쀼루퉁 한 표정으로 대화사이에 끼어든 유리의 모습에 놀라 말했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꼬마 공주님. 저는 공주님이 노는 것을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도와드리러 왔답니다. 종일 공원을 누벼도 다 하지 못할 것을 모두 즐길 수 있게 해드리려고요.”

“노는 것을 도와주러 왔다고요?”

“네, 꼬마 공주님.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말해주시겠습니까. 제가 무엇이라도 들어드리지요.”

“호오? 정말?”

권 팀장은 동그랗게 눈을 떠 되묻는 유리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이렇게 예쁜 꼬마 공주님에게 제가 거짓말을 해 무엇하겠습니까. 하하하하.”

“호오- 아빠 아빠. 저 아저씨가 유리가 원하는 거 모두 다 들어준다는데? 믿어도 될까? 말하는 게 되게 느끼한 걸로 봐서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치?”

“유, 유리야!”

민혁은 다시금 튀어나온 유리의 말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어른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눈앞에서의 면박. 권팀장은 그런 유리의 말에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하하! 이거이거 제 말투가 따님 분에게 많이 느끼했나 봅니다. 딴에는 제법 격식을 갖춰 말한 것인데 역시 나이를 먹어버린 모양입니다.”

“아,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유리가 어려서 느끼하다는 말뜻을 잘 몰라 실수한  걸 거예요. 그렇지 유리야?”

“아냐. 유리 모르는 말 하지 않았어. 느끼하다는 말 뜻 잘 알아. 느끼-하다 사전적 의미로는 기름기가 많아 개운하지 않고 비위에 거슬리다는 뜻이고 사람에게 사용 할 때는 가수 성쉬경처럼 입에 바른 말만 잘하는 사람한테 쓰는 거라고 일전에 아빠가 티비를 보면서...”

“아, 아하하하하하하!”

당당한 얼굴로 가슴을 쭉 펴 말하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잘랐다.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면 어린 아이가 저렇게 자랄 수 있는 것일까?

민혁은 이마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충격을 받았을 권팀장의 얼굴을 살폈다.

“이거... 정말 대... 단한 따님을 두셨군요. 사전적 의미의 느끼하다는 말은 저도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오, 오늘에서야 알게 되네요. 아, 아하하하하!”

“그, 그게...”

창피한 듯 온통 붉게 달아오른 권 팀장의 모습에 민혁의 이마로 흐르는 땀방울이 굵어졌다. 미안해도 이렇게 미안할 수 없다. 어린 꼬마의 말이라지만, 가슴을 쿡 찌르는 유리의 말은 분명 자신이 들었어도 충격을 받을 만큼 매몰찬 말이었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는 왜 우리가 노는 것을 도우려는 거예요? 아빠랑 나는 그런 부탁 한적 없는 것 같은데... 그치 아빠?”

“응? 아, 그래. 그렇구나. 권기혁씨라고 하셨지요? 그 부분은 저 역시 궁금하군요. 어째서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앞서 말했듯 저는 논데 월드와 아무런 연락을 취한 것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말을 묻는 유리와 민혁의 모습에 권 팀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늘였다. 방금 전의 소란 때문인지, 놀이 기구를 타려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이상 말을 편하게 꺼낼 수가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 다면 일단 자리를 좀 옮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이곳은 다른 분들도 많이 계시고... 놀이기구가 계속 회전해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더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뭐, 길지 않은 대화라면 저야 상관이 없습니다만... 유리는 어때? 잠시 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

“응. 목도 마르고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면 유리는 괜찮아.”

“아, 그렇다면 절 따라오시죠. 제가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과일 음료부터 커피까지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은 곳을 알고 있거든요.”

수락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유리의 모습에 권 팀장이 발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일이야 어찌 되었건 이야기를 할 시간이 생긴 이상 놓칠 수는 없는 일.

민혁은 얼른 따라 오라는 듯 손짓까지 해가며 부르는 권 팀장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참 별난 사람이다. 그치 유리야?”

“응. 하지만 저런 사람이 있어서 세상이 재미있잖아. 히히- 아빠 빨리 가자. 유리 목말라.”

“그래 가자.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음료수 마시러 가자.”

“와- 아빠 최고!”

와락 안아 들어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민혁의 행동에 유리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느끼한 사람과 맛있는 음료수.

유리의 눈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권 팀장의 뒤를 쫓고 있었다.


* * *


“그러니까. 저희가 놀이동산에서 즐기는 모습을 홍보 영상으로 차용하고 싶다 이 말입니까?”

은은한 촛불이 흔들리는 고풍스런 카페.

민혁은 싱긋 웃는 권 팀장을 바라보며 앉은 턱을 괬다. 그가 찾은 단순 명료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을 공짜로 하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정식으로 광고 계약을 체결한 뒤에...”

“그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 광고로 사용하겠다?”

비꼬아 올라간 목소리.

권팀장은 턱을 궤고 앉은 그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며 잘려나간 말을 이었다.

“과대광고나 허위광고로 박민혁님의 이미지를 훼손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박민혁님과 따님의 노는 모습을 방해 하지 않고 촬영해 한 토막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사용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광고는 광고, 회사는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절 차용해 넣겠다는 소리인데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광고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금은 말입니다.”

“그건...”

한순간 돌변한 민혁의 태도에 말을 이어나가던 권 팀장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놀이기구 앞에서 보여주었던 편안한 모습이 아니다. 강경한, 스스로에 생각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품고 있는 그의 모습은 다가서기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 것 권 팀장님과 같은 말을 걸어온 사람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한국 뿐 아니라 해외 여러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헌데, 왜 그 어느 곳에서도 제 이미지를 가져가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그야...”

알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권팀장의 입술에 민혁이 먼저 나서 입을 열었다.

“예, 제가 그 어느 것도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

딱 잘라 말하는 민혁의 모습에 권 팀장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렀다. 알면서도 주저하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절대적인 말이 된 것 마냥 더는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빠.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잖아?”

“음?”

쪼록 쪼록-

조용히 과일 주스를 마시던 유리가 민혁의 말에 반해 말을 꺼냈다.

“아빠가 광고에 나가지 않았던 건 스스로가 상업적인 세상에 물들지 않을 까 해서였지만, 그건 이제 멀리 가 버린 지 오래인걸. 아빠는 모르겠지만 밖에 나가면 온통 아빠 이야기뿐이야. 아빠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아빠가 무슨 책을 읽는 지 심지어는 아빠가 무엇을 먹는 지 까지 온통 사람들은 아빠에 대해서 눈을 때지 않는 다고.”

“그게 왜?”

“생각해봐 아빠. 아빠는 이미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된 거야.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그 어느 하나도 그냥 지나 칠 수가 없게 된 거라고. 그렇다고 해서 아빠 아무것도 안 먹고 아무것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입고 다닐 수 있어?”

“그럴 순 없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잖니. 무의식적인 그것에 얼마나 큰 파급력이 있겠어. 그것은 그저 한번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생각 한번 해보는 것으로 한정 되겠지만, 티비 광고는 그렇지 않아. 압박이 될 거야.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볼 때. 머릿속에서 광고는 압박이 되어 해야 만하는 것인가? 압박을 야기하게 될 거야.”

심도 놓은 심각한 이야기,

권 팀장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늘어놓는 민혁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아군이 되어준 유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장황한 말이다.

 이제 여덟살이나 되었을 법한 아이가 과연 이 말들을 이해 나 할 수 있을까?

조용히 빨대를 물고 있는 유리를 보는 권 팀장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로서는 그녀가 그를 설득해준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으음... 하지만 그건 평소도 마찬가지야. 신문, 뉴스, 인터넷 아빠를 다룬 매체는 언제나 쏟아져. 그것 역시 압박이 되는 것은 마찬 가지잖아. 아빠. 나는 아빠랑 놀이 공원에 오는 게 좋아. 이곳에서 쉬는 게 좋고, 노는 게 즐거워. 그래서 그걸 다른 아이들이 즐기기를 바래. 아빠와 함께 놀이 공원에 와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많았으면 좋겠어. 언제나 혼자 또는 엄마와 친구들과 놀이방에 만 있는 게 아니라. 가족들이 모두 함께 나들이하길 바래. 그게 잘 못 된 생각이야 아빠?”

“잘 못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받고 내 이미지를 다른 이들에게 팔고 싶은 마음은 없단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기만하는 행위야.”

“그럼 팔지 않으면 되잖아. 팔지 말고 베풀면 되잖아. 아빠가 말했지? 베푸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그러면 베풀면 되겠네. 아빠는 돈이 필요 없고, 저 아저씨는 광고가 필요하고 유리는 능력도 가진 것도 없지만 아이들이 내가 느끼는 지금 이 행복을 함께 하길 원하니까. 그럼 셋의 그 마음을 모아서 베풀면 되겠네.”

“베푼다고?”

“응!”

민혁은 조금 남은 과일 주스를 힘껏 빨아 마시며 웃는 유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아저씨의 말대로 광고를 찍고, 아빠가 받을 돈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면 되잖아. 유리가 바라는 것은 다른 아이들도 유리처럼 아빠와 함께 놀이공원을 찾아 행복하게 노는 것이니까. 약속하면 되잖아. 한달에 한번 아빠와 함께 놀이 공원을 찾은 어린이는 놀이공원 무료! 이런 걸로 돌려 베풀면 되잖아.”

“아...!”

권 팀장은 미처 생각도 못했던 유리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저게 과일주스를 마시며, 아빠 품에 매달리기를 좋아하는 꼬마 소녀가 할 수 있는 생각이란 말인가?

생글생글 웃는 유리를 바라보며 민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졌다. 졌어. 그래, 그럼 우리 공주님 이야기대로 약속이 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할게. 그럼 됐지?”

“응! 아빠 최고!”

엄지를 치켜 새우며 웃는 유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 곧 스위스 전이군요. 당연한 마음이지만,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위 글은 forpsi.cafe24.com 에서 연재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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