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란 눈의 박노자 선생,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남들과 유사할 것이다. 나는 고2 당시(2001), 박노자 선생과 박노해 선생을 헷갈릴 정도였다. 그만큼 지적으로 미숙했던 시기이다. 물론 내가 그에 대해서, 또한 그가 가진 시선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책을 통해서였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은 이미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던 책이었다. 나에게 이 책은 물론 폭발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특히 나에게 강력한 자극을 준 것은 사회라는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 이후 분명 사회과학적, 혹은 비판적 시각을 두루 발전시키기 위해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랬던 나의 과거로 볼 때 박노자는 분명 의미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쓸 여러 서적을 읽어보면서 공감을 많은 부분에서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일까, 나의 정치적 글쓰기의 이상향이자, 목표가 박노자가 되었다. 이는 분명 무언가 다른 식의 접근법을 지향하고 싶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신선해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 신선한 박노자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주최된 박노자 선생 강연회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 종교, 진보운동, 사회주의 ' 어찌보면 괴리감이 느껴지는 종교와 진보운동(사회주의)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한 가지 확신은 이들의 연관성, 또한 이들 사이의 아름다운 만남이 우리 사회에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 박노자가 정확한 진단을 내려줄 것이라는 점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박노자 강연회에서 들은 내용을 박진우라는 여과기에 넣어서 전달하고자 한다.
< 종교, 진보운동, 사회주의 - 파란 눈으로 보는 김치빛 시선>
1. 왜 하필 이 주제에 박노자의 시선이 머물게 되었나?
과거 박노자는 한국 기독교, 특히 현대 기독교의 비판을 청탁 받았으나 거부한 사실을 말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 기독교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을 그가 해낼 수 있는 엄두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내의 이러한 기독교의 병폐는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전 영역, 즉 한국 내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전 종교에 대해서 적용하여 고려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원고 청탁은 거절하였으나, 종교라는 사회 현상에 대해서 총제적인 진단과 더불어 비판을 이번에는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박노자의 글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박노자는 종교라는 개념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2.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는 기업형태이다.
물론 박노자의 주장이다. 또한 이번 강연회에서 그가 펼친 언사는 대부분 종교를 기업이라는 개념에 비유하여 펼쳐졌다. 그래서 더 재미있으며 간혹 따끔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박노자에게 한해서 마조히스트이므로 행복했다.
대부분의 사찰과 교회는 민중들이 고뇌를 가지고서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또한 개인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 열심히 의식을 가진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초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박노자가 제시한 바는 물론 이러한 상식수준이 아니었다.
이러한 신앙생활이 초자연적인 고백에 대한, 혹은 초자연적 능력이 넘친다는 공간에 대한 물질적 기여를 통해서 상당히 현실적인 대가를 받으려한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이를 통해서 ' 기복 신앙 ', 즉 복을 기원한다는 개념을 언급한다. 이러한 기원 속에서 분명 물질적 기여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가 언급한다. 물론 이러한 신자들의 물질적 기부는 교회 성전을 더 크게, 사찰을 더 성장시킨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가능성은 박노자가 앞서 설명한 원고의 청탁을 거부한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 우선 이러한 기복 ' 장사 '에 대해서 이념적 비판이 어려웠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초자연적 인물,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이를 병폐라 비판하기 매우 곤란했다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질문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이러한 진단을 알게 된다. 우선 우리 민중의 삶이 개인의 행복 정도에 따라 초자연적 인물,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 쉽게 의존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물질적 기부를 이용하여 더 큰 교회, 사찰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종교에 대해서 초자연적 힘을 부여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깊은 역사적 내재성이 존재하고 있기에 기복 장사 측에서는 매우 쉽게 수입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박노자는 현재 종교에 대해서 시장논리까지 염두한 분석을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기복신앙은 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 한 집단 개체 위주의 장사 '로 전락해버린 것은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복 받는 자는 물질적 기여, 쉽게 말해 돈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 유전유복 무전무복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우리는 현대의 기복 신앙이 집단 이기주의적이며, 때로는 개인이기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복신앙의 원 개념에 대한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
기복신앙을 전통적으로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기원을 다음의 예와 같이 행했다고 한다.
" 내 부모를 ' 비롯한 ' 우리 국토... ", ' 비롯한 ' 이라는 표현은 현대의 기복신앙의 이기주의와 차별적인 어감을 준다. 물론 이를 완전히 이타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이는 이타적인 원 개념을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과 달리, 현대의 기복신앙은 자본주의, 그에 따른 비인간화, 속류적 개인주의로 타락하였다. 물론 이는 종교가 자본주의의 시장질서에 너무 잘 적응한 탓이라 하겠다.
3. 기복장사에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상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기복장사에는 물론 공급자와 수요자가 존재한다. 사찰, 교회, 무당 등은 물론 공급자요, 민중은 이에 대한 수요자(소비자)임이 확실하다. 중요한 점은 늘상 민중의 삶은 어렵기 때문에(이것이 개인적인 이유에 기인하든, 사회 구조적 이유에 기인하든) 수요는 늘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매우 높은 수요가 존재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종교의 기업화는 그들이 이러한 수요를 놓치치 않을 것임을 설명한다. 수요에 대해서 주요 공급자인 교회, 사찰, 무당들(여기서는 민속신앙의 대표 기호)간의 시장 쟁탈전이 존재한다. 이는 매우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박노자는 이에 대해서 종교 기업의 마케팅의 강화를 설명했다. 마케팅, 다시 말해서 바로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업들은 물론 마케팅을 통해서 경쟁을 한다. 자사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고객의 수요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들은 매우 큰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도에 따라 상도덕이 존재한 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A사가 B사를 노골적으로 욕하고 위험한 상품이라고 허위사실을 유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뿐아니라, 상도덕에도 매우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종교들은 어떤가? 예수천당, 불신지옥? 불교를 信하면 지옥간다는 뜻으로 들린다고 말하던 박노자의 말은 분명 설득력있다. 상도덕(여기서는 종교적 똘레랑스)을 전혀 무시한 채 그들은 자신들의 마케팅에만 힘쓰고 있는 것이다.
4. 무노조경영 삼성보다 더 무서운 종교기업의 무노조경영,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를 통한 상품 수요 공고화
대형교회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노조 설립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노조를 만들려고해도 좌절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비정규직 교회, 혹은 사찰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존재한다. 물론 종교적인, 혹은 신성한 분위기가 - 억압적인 - 그들의 착취를 합리화한다.
종교집단은 앞서 계속 언급했듯히 기업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위 관계 로비, 노조탄압 등의 양상까지 동일하다.
* 기업과 탈세의 문제 = 종교와 無세의 문제
* 기업과 상품 강매의 문제 = 종교와 종교의식 강요의 문제
* 기업 이익을 위한 마케팅 = 종교 집단의 성장을 위한 전도 활동
위에 언급한 이러한 비유가 가능하다. 이 점이 나는 가장 흥미로웠다. 하지만 현대 종교의 문제가 기업화, 그에 따른 기복장사뿐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학연, 지연, 혈연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관계 자본을 구축하는 ' 교연 '이었다. 즉 네트워크로의 한인 사회 속 교회의 모습이 잘 설명해주는 부분이었다.물론 이것은 교연이라는 끈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종교(기업)적 토대를 확고히하고자 함이다. 한인 사회 속에서 교회 하나 다니지 않으면 사람을 사귈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토대를 민중들은 억지로라도 살기 위해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종교가 상품강매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수요층을 접수하는 결과를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5. 기존의 질서에 대해서 신성화, 합리화함에 앞장서는 종교, 내가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작용
종교 지도자는 ' 아우라(Aura) ' 를 가진다. 여기서 아우라란 신성성, 위대함이라는 것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인정하든 아니든 분명 사회에 의해서 존경하라고 강요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종교 지도자들임에 틀림없다. 이들의 말씀은 신비한 말씀이요, 이들의 행적은 위대한 행보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을 잊지 말자. 이들은 종교 기업의 고위 간부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기업의 안정된 기업 토대를 위해서 현 체제 질서를 공고화, 합리화, 신성화하는 것에 매우 커다란 힘을 쏟는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상당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 피임권에 대한 거부 입장을 표명하면 이것은 매우 커다란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일종의 인간적 권리인 피임에 대해서 좋지 못한 인식을 생성시킨다. 이는 아프리카(여기서 아프리카는 저개발국가의 기호로 사용)에서의 콘돔 사용(피임법)을 억제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는 현재 수많은 에이즈 환자들이 있기 때문에 콘돔을 사용할 수 없는 섹스는(너무나 불안정한 섹스)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이러한 교황의 입장 표명은 아프리카를 더욱더 공포스런 대륙으로 만들 뿐이다.
그리고 낙태 거부는 어떠한가? 아프리카의 소모적인 출산, 양육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인프라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출산을 권장하는 꼴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 낙태 거부로 인해서 더 커다란 재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낙태는? 물론 교황에 의해서 거부된 하나의 신성화된 영역이다.
위의 예는 분명 한 종교 지도자의 ' 신성하신 ' 말씀으로 인해서 초래된 결과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따. 종교 지도자는 적당히 세상이 아파야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히 에이즈로 인해서 세상이 아파야, 적당히 소모적 출산이 권장되어야 민중의 삶은 어려워지고 결국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는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결국 수요가 생성된다. 그렇게 되면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마케팅, 상품 강매가 매우 용이하게 된다.
구조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내재적(인간 내적) 행복이 가능함을 그들은 주장한다. 이는 분명하게 민중들로 하여금 체제 개혁, 혹은 변혁, 나아가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세상의 어려움, 아픔의 원인에 대해 자기 자신이라는 내부로 시선을 두게 만든다. 이는 분명 사회 구조적 혁명을 지양시키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할 것도 없이 기존의 체제는 공과화 또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음으로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 네가 가난한 이유를, 네가 아픈 이유를, 네가 죽는 이유를 사회적 구조가 아닌 너의 믿음, 너의 신앙에서 찾으라. ' 이렇게 말해주는 관념적 종교지도자, 얼마나 체제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이들은 중요할까? 말이 필요없다.
6. 짓밟힌 전쟁 속 민중의 아편, 종교? 어디서 온 것인가?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이는 대단한 전제를 가진다. 짓밣힌 전쟁 속에서의 아편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편이 당시 진통제로 쓰였다는 점을 염두하면 더 이해하기 쉽다. 짓밣힌 전쟁이라는 상황이 사람들을 초자연적이며 관념적인 종교에 귀의하게 만든 것이지 절대로 종교의 위대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 아편이 어떤 종류이냐에 따라서 논쟁이 있다.
* 위에서 내리는 아편
* 아래로부터의 아편
나, 그리고 박노자는 후자를 지지한다. 하지만 분명 ' 정통 '이라는 힘의 구조로 보면 후자의 아편(종교)는 모두 이단이라는 박해를 받아야했다. 후자의 아편은 분명 아래로부터 온 것이고 이것은 체제가 아닌 친-민중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종교는 물론 마취제이다. 물론 위에서 내리는 아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우리는 현재의 아픔을 잠시 잊기 위해서 위에서 내려주는 감사한 아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쉽게 박노자는 이 점에 대해서 언급한다.
" 상처는 그대로 두고, 언제 아플지 모를 그 피골음 상처를 두고서 마취제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
물론 민중의 아픔에 초점이 없는 종교는 쇠퇴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자발적 결사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그 종교가 쇠퇴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미국의 지도층과의 연대로 인해서 최근 교세가 꺾이고 있는 통일교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현대의 이슬람, 기독교, 불교가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이는 초기 지도자들이 체제의 편이 아닌 민중의 편이 되어 행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분명 평등정신, 저항정신, 혁명정신으로 표현되는 (당시) 반체제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절대 예를 들어 계급 차별, 남녀 차별의 개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의 사후, 그들의 제자들이 이를 왜곡하고 뭔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당시의 이해관계에 따라)에 맞게 초기 지도자들의 사상을 왜곡했다.
예를 들면 기적, 신통력에 대한 주장을 부처가 펼친 적이 없다는 것, 즉 초자연성을 부종했다는 것이다. 부처는 원시공동체(초기 공산주의 형태)를 통해서 제자들과 살았다. 중요한 것은 부처도 처자식 버리고 살아도 그 처자식이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부를 그들에게 남겨둔 상태였으며, 그의 제자들도 그랬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부처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경제적 여유 속의 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부처의 사후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충분히 그의 사상적 왜곡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왜곡된 가르침이 기성 체제에 적용된다. 그래서 현대의 불교적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이는 흥미롭게도 기독교의 발달 논리와도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108년경 기독교 말씀이 편집된다. 이는 예수 사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의 뒤를 따랐던 부르주아적 인물들에 의해서 편집되었다. 이는 물론 성경에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가 가미되었음을 알 수 있게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친부르주아적으로 완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성경부분이나 書는 분명 제거 혹은 변형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우리는 예수의 제자 사도 바울이 기독교 보수화의 주역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이해가 용이하다.
그런데, 방금 언급에 의하면 성경에는 반지도층적인 이야기가 나와서는 안되는데, 나오고 있다. 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는 말할 것도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예수의 카리스마를 이용해야 기독교가 존속할 수 있었고, 또한 기독교가 입장을 어느정도 민중으로 향하고 있어야 소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교 지도자에 대한 왜곡을 우리는 불교, 기독교를 통해 보고 있다. 즉 종교 지도자를 따르던 부르주아적 인물들이 그 종교 지도자가 죽고나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지도자의 사상을 왜곡, 변형했다는 이야기이다. 박노자는 이러한 흐름이 이슬람교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7. 메모
*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종교의 본질을 알아야한다.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종교에 대한 비행동, 혹은 박해는 비판받아야한다. 종교의 발생적 원인을 유물론적으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 卍해 한용운 선생의 민중불교는 부처의 본래 생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사찰은 산송장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수행공동체(초기 공산주의)를 강조하였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 아래서는 진정한 불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자본주의 개혁으로의 초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용운 선생의 사상마저 왜곡되고 있다.
* 17세기 Quaker교는 노예제를 부정했다. 이는 물론 매우 사회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18세기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Quaker교는 기독교 소수파이다.
* 이슬람은 애초에 타문화에 대해서 똘레랑스를 가진 종교였다. 최근 모하마드 만평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종교왜곡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성전으로만 사용하는 지하드는 본래 그러한 뜻이 아니다. 이는 자기 수행이라는 개념이다.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 행해지는 자기 수행의 결과가 물론 가장 저급한 형태의 지하드, 즉 성전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 이는 불가피한 상황에서이다. 자살테러에 대해서 이슬람은 관계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잘못파생된 결과가 이슬람에 대한 혐오를 형성시킴은 경계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