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무지랭이햏이 《진서》와 《만주원류고》에 대해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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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다.
2. 발해(만주 지역)를 ‘동이’의 세계에서 분리시키다.
3. 공순한 조공국가 고씨 고구려를 부활시키다.
4. 진정한 삼국통일은 한반도 내부에서 완성된 것처럼 만들다.
5. 천년의 동북공정
6. 여론(餘論): 청대(淸代) 사서의 고구려 죽이기
1.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다.
비록 외세를 끌어들여 완수한 ‘미완(未完)’의 통일이었지만, 일단 신라의 ‘삼국통일’이 인정된다면 그것은 곧 고구려와 백제의 옛 영토에 대한 연고권을 (억지로나마)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역대의 중국 정사 및 기타 사서들은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신라가 경주한 노력을 소극적으로 묘사하거나 혹은 그것을 아예 무시하고 ‘당’이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였다는 일방적인 내용만을 서술함으로써,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록해 왔던 것 같습니다. 『구당서』(945년 편찬) 신라전은 백제의 정벌을 나당 연합의 결과로 명시하였지만,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서는 신라의 역할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신당서』(1060년 완성) 역시 백제의 영토는 신라가 주체적으로 획득한 것으로 인정했지만, 고구려의 멸망에 있어서 신라의 참여는 『구당서』의 수준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2. 발해(만주 지역)를 ‘동이’의 세계에서 분리시키다.
한편, 중국의 관변(?) 지식인들은 고구려의 계승국가를 자임한 발해의 존재와 그 정통(正統)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두우(杜佑: 734-812)가 지은『통전(通典)』(801년 완성)은 발해의 이름도, 건국 과정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고구려의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그 영토는 모두 말갈이 차지했다는 것만 지적하였습니다. 『구당서』는 말갈전을 흑수말갈과 발해말갈로 분리 서술한 후, 건국자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別種)으로 기록함으로써 일단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를 인정하였지만, 발해와 말갈을 ‘동이’가 아닌 ‘북적(北狄)’으로 인식함으로써 신라와 당이 공히 점거하지 못했던 고구려의 옛 땅을 ‘동이’가 계승했다는 주장도 원천 봉쇄하였습니다. 『신당서』역시 발해를 ‘북적(北狄)’으로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발해가 “원래는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귀속해 있었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동이’의 세계가 더 이상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하여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박탈하였습니다.
3. 공순한 조공국가 고씨 고구려를 부활시키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인들이 단순히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고씨 고구려의 부활을 조작(?)하였으며, 다시 일어선 고구려는 이전처럼 중국에 위협적인 강대한 국가가 아니라 중국에 대한 공순(恭順)한 조공국에 불과한 것처럼 묘사한 뒤, 부활한 고구려를 왕건이 계승하여 비로소 한반도 내에서의 삼국통일이 완성된 것처럼 왜곡하였다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668)부터 왕건의 고려가 성립(918년 6월)하기 이전까지, 중국의 조공체제에 참여했던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서의 ‘고려’는 송대에 편찬된 『책부원구』와 『당회요』『신당서』에도 각각 710년, 818년, 원화(806-819) 말년에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요사』에서도 915년, 918년 2월과 3월에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고구려 멸망 이후 ‘소(小)고구려’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요나라에 조공했던 ‘고려’는 궁예의 태봉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적어도 8세기와 9세기에 존재했다고 하는 ‘고려’의 실체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4. 진정한 삼국통일은 한반도 내부에서 완성된 것처럼 만들다.
어쨌든, 중국의 사가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허상의?) ‘고려’를 기록하였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오대사』이후의 정사들은 왕건의 고려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1)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인데, (당나라가 정벌하여)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중원에 변고가 많으니, 그 나라가 마침내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 이전 왕의 성은 고씨였는데, 후당(後唐)의 동광, 천성 연간(923-929)에 누차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구오대사』고려전)
(2) 당나라 말기에 그 왕의 성은 고씨였는데, 동광 원년(923)에 사신을 보냈다. 광평시랑 한신일과 부사 춘부소경 박엄이 왔는데, 그 왕의 성명은 사관의 기록이 망실되어 기록하지 않았다. (『신오대사』고려전)
(3) 당 고종이 이적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정벌케 하니, 마침내 그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군현을 설치했다. 당나라 말기에 중원에 변고가 많으니, 마침내 스스로 군장을 세웠으며, 후당 연간에 그 주인 고씨는 누차 조공을 바쳤다. 장흥 연간(930-932)에 권지국사 왕건이 고씨의 왕위를 계승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송사』고려전)
(4)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건된 땅인데, 또 부여의 별종이 일찍이 거하였다. (중략) 후에 땅을 더욱 넓혀 이전의 삼국은 하나가 되었는데, 그 주인의 성은 고씨였다. 처음 나라를 세운 이래 당나라 건봉 연간(666-668)에 나라가 망하였지만, 수공 연간(685-689) 이래로 자손이 그 영토를 회복하여 그 후 점차 자립하였고, 오대십국 시대에는 그 주인을 대신하여 송악으로 천도하였으니, 그의 성은 왕, 이름은 건이다. (『원사』고려전)
이와 같은 인식은 송나라에서 파견한 사신 서긍이 고려의 수도 송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채록하여 편찬했다는 『고려도경』(1123년)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즉, “고씨가 이미 끊어졌으나, 오랜 후에 다시 회복하여 당나라 말기에 마침내 왕이 되었다”(권1 시봉) “왕씨의 선조는 고려의 호족이었던 것 같다. 고씨의 정치가 쇠미해지자 백성들이 어진 이를 세우고자 하니 마침내 (왕씨를) 옹립하여 군장으로 삼았다”(권2 왕씨)는 것입니다.
만일 서긍의 기록이 당시 고려인들의 관념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면(그 사실의 진위는 일단 접어두더라도), 원대에 편찬된 『송사』(1345)에 이어 명대에 편찬된 『원사』(1370)가 “마침내 부흥한 고씨 고구려와 그를 계승한 왕씨 고려에 의한 삼국통일”을 주장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청대(淸代)에 편찬된 『명사』조선열전은 이와 같은 (왜곡된?) 역사인식을 다음과 같이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5) 조선은 기자를 봉한 나라로서 한나라 이전에는 조선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연나라의 위만이 점거했지만, 한 무제가 그것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을 설치했다. 한나라 말기에 부여 출신의 고씨가 그 땅을 점거하여 고려 또는 고구려로 국호를 바꾸고 평양에 거처했다. 이곳이 곧 낙랑이다. 그 후 당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겼는데, 후당(後唐) 시대에 왕건이 고씨를 대신하고 신라와 백제의 땅을 통합하였다.
5. 천년의 동북공정
중국인들이 거의 1천년 동안 상기의 오류를 반복하거나, 혹은 (살을 덧붙여서) 확대시킨 것은 단순한 착오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신라가 원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통합이었으며, 신라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굴욕적인 외교도 감수하였고, 실제의 전투에서도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통일, 즉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인정한다면 중국측으로서는 신라에게 고구려의 유산(구체적으로는 만주 지역의 영토)에 대한 연고권을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중국은 신라에게 그러한 명분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으며, 바로 이 점에서 역대의 중국 사서들이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서 신라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말살하면서 ‘공순한 조공국이었던 (반도) 고구려의 부활’에 집착한 이유가 해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즉, 고구려가 망한 이후 정체불명의 고구려가 동쪽으로 옮겨 부활하였고, 그 계승자를 자처한 고려가 한반도 내부에 불과한 지역을 통합하였다면, 중국은 만주에 대한 한민족의 연고권을 봉쇄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국호를 요청했을 때, 홍무제는 ‘조선(朝鮮)’이 가장 아름다운 명칭[最美稱]이라고 추켜세웠지만(『명실록』홍무 25년 윤12월 을유) 중국 황제가 승인한 ‘조선’에는 ‘기자가 봉건된 중국의 제후국가’라는 단서가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즉, 조선이 고려를 대신하여 세워진 이상, 중국은 조선에게도 한반도 밖의 옛 땅을 포기하도록 암묵적으로 압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중국 제후의 위상에 만족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6. 여론(餘論): 청대(淸代) 역사서의 고구려 죽이기
지금까지는 주로 한족(漢族)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를 중심으로 역대의 중국인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어떻게 왜곡하였으며, 한민족의 연고지를 반도에 국한시키기 위하여 어떤 조작을 하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삼한과 백제, 신라 등의 영역을 요동, 요서와 길림성 지역에 비정하는 ‘예외’의 사서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요사(遼史)』『성경통지(盛京通志)』『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같은 책들이 그것입니다. 이 문헌들의 특징은 원대에 편찬된 『요사』를 제외하면 모두가 청대의 저술이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기록들을 뽑아보겠습니다.
(6) 유송(劉宋) 시대에 백제가 요서로 건너가서 (그땅을) 차지했으며, 당나라 초기에는 신라가 길림을 겸유하였으나, 머지않아 모두 발해에 편입되었다. (『성경통지』권23 역대건치연혁고(歷代建置沿革攷) “劉宋時百濟跨有遼西 唐初新羅兼有吉林 而旋俱入於渤海”)
(7) 흥경, 길림, 흑룡강은 옛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발해의 땅이었으며, 성경의 승덕, 철령도 역시 숙신, 말갈의 변경이며, 개원은 또한 숙신, 부여와 인접하였다. 요양, 금주, 영원, 광령, 의주 등은 옛 기주와 유주의 바깥 지역으로서 진한시대에는 요동, 요서의 두 군이 관할하였고, 개평, 복주, 영해, 수암, 봉황성 등은 주나라 때 조선이었으며, 한나라 때에는 원도(현도?), 낙랑이었으며,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였는데, 수암, 봉황성은 예(濊)의 땅과도 접해 있었다. 이것이 예부터 내려오는 연혁의 대강이다. (『성경통지』권23 역대건치연혁고)
백제의 요서진출은 다른 사서에도 발견되지만, 당나라 초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영역이 명백한) 길림을 겸유하였다는 것은 실로 의외입니다. 어쨌든 (6)의 기록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요서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길림은 얼마후 모두 발해가 점령했다는 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신라의 길림 지배는 마치 한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여기에 ‘고구려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7)의 기록에 의하면, 만주의 전역을 차지한 것은 숙신 - 읍루 - 말갈 - 발해로 이어지는 Jurchen족이었으며, 고구려는 고작해야 수나라 때에 요녕성의 남부를 잠깐 동안 지배한 것처럼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요녕성 남부를 차지하기 전에 그 땅에는 기자가 봉건되었으며,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고 함으로써 마치 “의관(衣冠)의 향(鄕)을 만맥(蠻貊)이 제멋대로 차지하게 놔둘 수 없다”는 수당시대의 인식(『수서』배구裵矩열전)을 그대로 답습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즉, 청대의 어용학자(?)들은 고구려를 만주족의 ‘변방’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실제로는 만주족의 주요 활동 무대를 차지하고 있었던 ‘대고구려’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고구려 죽이기’는 일부 학자들이 극찬해 마지않는 『만주원류고』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만주원류고』는 아예 목차에서부터 ‘고구려’를 완전히 삭제하였습니다.
권1 부족1: 만주 숙신 부여
권2 부족2: 읍루 삼한 물길
권3 부족3: 백제
권4 부족4: 신라
권5 부족5: 말갈
권6 부족6: 발해
권7 부족7: 완안 건주 (附: 金史姓氏考)
권8 강역1: 흥경(興京) 길림 흑룡강 숙신사지(肅慎四至) 숙신성 숙신현 부여국도(夫餘國都) 부여성 부여부 읍루국계(挹婁國界) 읍루고지(挹婁故地) 읍루현 삼한분지(三韓分地) 삼한속국 삼한고지 마한도독부 진주(辰州) 삼한현(三韓縣)
권9 강역2: 옥저 예 물길행정(勿吉行程) 물길칠부고지(勿吉七部故地) 물길방국(勿吉旁國) 백제리지(百濟里至) 백제군성(百濟郡城) 백제읍 백제제성(百濟諸城) 신라 계림주 신라구주(新羅九州) 말갈(靺鞨) 흑수주(黒水州) 흑수부(黒水府) 철리월희고지(鐵利越喜故地)
이와 같은 체제 구성에 의하면 (A)한반도 바깥의 영역은 고래(古來)로 만주족의 땅이었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성립하며, (B)만주족은 ‘예맥(濊貊)’과 ‘한(韓)’의 세계를 거느리는 ‘맹주’의 위상을 획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고대의 여러 국가들은 만주족의 부용(附庸) 세력에 불과한 변방 집단으로 위상이 하락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실제 만주족의 고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존재에 대하여 『만주원류고』의 필자들은 철저히 침묵하는 한편, 고구려가 만주의 주인이 아니라 요녕성 남부와 한반도 북부의 변방세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왜곡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8)고구려는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와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와 떨어져 있다.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말갈과 접해있으니, 오늘날의 봉천과 요양에서부터 남쪽으로는 봉황성에 이르렀고, 압록강을 건너 오늘날 조선의 함경도와 평안도에 이르기까지가 고구려였다. (『만주원류고』권4 부족4 신라, “高麗 東跨海距新羅 南跨海距百濟 西北渡遼水接營州 北接靺鞨 則自今奉天遼陽 南至鳳凰城 渡鴨淥江 至今朝鮮之咸鏡平安等道者 高麗也”)
즉, 자신들의 고토(故土)를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위상을 폄훼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주족 자신들을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설정하기 위해서 백제와 신라로 하여금 각각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한시적으로 분점(分點)하게 한 것은 만주족으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아니었을까요?
일부 학자들은 청나라의 ‘성군(聖君)’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기 위한 순수한 의도에서 학자들을 대동하여 연구한 결과가 『만주원류고』였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만주원류고』는 청나라가 쓴 것이기 때문에 배척한다고 하는 것은 숭명(崇明) 사대주의의 연장선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저는 청대사(淸代史)를 깊이 있게 공부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과연 그들이 조선과 어느 정도의 동족의식―금의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는 전승이 있다는 것은 일단 믿을 수 있지만, 전승을 믿는 것과 실제를 믿는 것은 별개라고 해두겠습니다―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여기에서 저는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노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9)나는 동복(東服)을 입고 청나라 말을 쓰며,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앉아 청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같은 조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이해득실을 설명하여 조선과 더불어 요동, 만주, 유주의 땅을 함께 점거하자고 할 것이다. 북으로는 야인을 꾀어서 선봉대로 삼고, 왜와 연결하여서는 그 남쪽을 꺾겠다. 그런 다음에야 조선의 강함을 다시 회복하고, 漢(=‘중국’이라는 문화적 역사적 실체?)의 오만을 꺾을 수 있을 것이다. (漫說에서)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북애노인의 반쪽짜리 정세 판단, 다시 말하면 그의 너무나도 순진한 상상에 씁쓸한 미소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만주원류고』에서 대륙삼국설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 어느 현대인이 “역시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이의 후예로서 서토 지나인들에 의해 왜곡 서술된 자신들의 뿌리와 우리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고 있구나”라고 감격한다면, 그것 역시도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 역사인식은 아닐까요? 역대 중국의 관찬 사서에 기록된 주변 민족의 역사는 중국인들의 편견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독 만주족의 왕조가 편찬한 사서만이 모종의 정치적인 의도를 배제한 학문적 순수성이 엿보인다(그러므로 믿을만 하다?)고 칭송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요컨대 한족 국가는 한족 국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리고 청나라는 만주족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곡필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을 ‘천년의 동북공정’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