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당신.
나에게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해주셨군요.
어제 밤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지금은 차분히 가라앉았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 퇴근무렵이면 다시 예전의 엽기발랄 제 모습으로 돌아가겠죠.
소개팅 끝나고 헤어지던 나에게,
전철역 아래로 한걸음 내딛던 나에게, '전화할께요'라고 했던 당신.
그게 빈말 인사치레인줄도 모르고 혼자 좋아서 1주일 동안 오지도 않을 전화 기다리며 마음이 걸레짝 됐던 나.
(웃기죠? 전화번호 물어보지도 않은 사람한테 제가 무리한 기대를 했더랬죠.)
결국 혼자서 맘고생 옴팡 하다가 소개팅 주선한 친구더러 물어봐달랬죠, 제가.
아침에 출근해서 메신저로 물어보니 친구가 그러더군요, 안좋은 소식이라고.
저더러 착하고 재밌고 좋은데 인연인 아닌거 같다고 하셨다죠.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참 섭하데요...
제가 기대를 참 많이 했었나봅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여자더러 착하다는 표현은 그 여자 인물이 성에 안차는 뜻이라고.)
친구는 제게 미련 버리라고 하더군요.
근데....
전 그게 그렇게 쉽게 맘정리가 안됐어요.
계속 혼자서 서운해하고 안타까와 하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 들었습니다.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친구에게서 '야, 그사람이 너 싫댄다' 이 소리를 듣고,
'아, 그러냐, 우씨.... -_-;' 그렇게 뒤돌아서 혼자 맘상해하고 궁시렁거리는거,
싫더라구요.
친구한테 제가 그랬죠.
꼭 숟가락도 못들어본 임금님 수라상, 빼앗기듯 물린 기분이었다구요.
근데...
적어도 내 눈엔 참 근사해보이는 밥상이어서,
객기부리듯 그 밥상 다시 가져와보라고,
먹다 체해 병원 실려가서 링거 꽂는 한이 있더라도 함 먹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했죠.
당신 전화번호 갈켜달라고.
친구는 말렸어요.
그러지 말라고.
친구 말이, 당신 이상형이 참한 여자라고 하던데,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게 맘에 걸린다고.
그때 전 그랬죠, 친구한테.
깨질때 깨지고 피 철철 흘리더라도,
아무것도 안해보고 두고 두고 후회와 미련 남기느니,
어차피 모 아니면 도, 함 해보겠다구요.
내가 그때, 정말 꿈에 부풀었었죠.
전화번호 알아낸 그날 밤,
바로 어제로군요.
정확히 밤 9시에 전화를 걸었네요.
와...
당신이 '아무개입니다'라고 전화를 받데요.
긴장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됐어요.
그래서 다시한번 당신 이름 물어보며 확인사살하고 통성명했죠.
그리고.... 어줍잖고 뻘쭘한 말...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전화드렸다고 했어요.
그리고 또 그랬죠.... 제가 느닷없이 전화드린거냐고...
당신, 채 알아들을수도 없는 말들로 얼버무리시더군요.
(당황하셨겠죠... 네, 이해합니다.)
그치만...
나...
정말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말을 해보려고 했어요.
근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데요..
첨에 당신 말을 못알아들었요.
일이 바쁘다고 하셨던가요.... 잘 기억이 안나네요.
암튼, 회의가 어쩌구... 하는 말을 들었어요.
순간 당황했죠.
퇴근안하셨냐고 물으니, 아직 회사라고, 회의중이라고.
내가, 통화하기 어렵냐고 물으니 정말 어색하게 웃으시더군요.
더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라,
그럼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해도 될까요...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고선 전화 끊었죠.
당신은 여전히 얼버무렸죠.
그렇게 용기를 내서 간신히 전화했는데....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어요.
망신살이 저 멀리 북극성까지 뻗치는 기분.
도저히 말로 설명을 못하겠더군요.
주체못할 마음을 다잡으려 괜히 거실로 나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9시 뉴스를 한참 들여다 보다가,
당신이 도대체 언제 회의가 끝날지 알수가 없어서,
9시 40분쯤 인가요... 문자 보냈죠.
저 아무개인데요, 회의 끝나면 전화주시겠어요...?
10시, 11시, 11시 30분.....
기다림은 초조함으로 변하고,
급기야 분노가.... 네, 분노가 치밀어오르더군요.
정확히 밤 12시까지 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내가 당신에게 마지막 문자 보냈죠.
제가 괜히 전화한거 같다고, 나를 이렇게 불편해할줄은 몰랐다고, 실례 많았다고.
그런데, 당신은 끝내 아무 연락이 없더군요.
저, 정말 놀랐어요.
사람 겉보기와는 다르고,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더니,
당신이 나에게 그 말을 확인시켜주시는군요.
내가, 누군가를 겉모습만 보고 그저 이렇게 무턱대고 좋아한 일이,
당신에게 전화통화도 거부당하고 문자마저 씹힐 정도의 일이 될줄은 몰랐네요.
저 확실하게 정나미 떼어버릴 요량이었다면 축하드립니다.
정말 200% 성공하셨네요.
그 생각을 했어요.
당신은,
최소한,
미안하게 됐다고, 전화 안하는게 좋겠다고,
전화통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자 한줄 넣어줄 정도의 마음의 여유조차 없으셨던 분이었는지.
아니면,
소개팅한지 정확히 17일만에 느닷없이 전화번호 알아내서 밤에 전화한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잘못한 것이었는지...
하 많은 복잡한 심경속에,
내가 당신한테 무슨 구걸을 하려 했나 싶어 내 자신을 참으수가 없었어요.
정말...
막말로...
내 자존심 개한테 던져준 심정으로 당신한테 전화한거였는데,
당신은 내 마지막 용기까지도 산산조각 내셨군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제 미련 따위 싹 사라졌구요,
정말 확실하게 맘정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화번호 물어보지도 않고 전화한다는 말, 그거 빈말이라는거 알았구요,
전화통화하기 싫으면 회의중이라고 둘러댈수도 있다는거 배웠네요.
(설사 당신이 그때 진짜 회의중이었다고 해도, 전 당신이 그때 제게 거짓말을 했다고밖에 생각이 안드네요.)
그리고....
사람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면 안된다는거,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당신에 대해 이만큼 기대 많이 한 만큼,
당신에 대해 그 이상으로 실망하고,
당신에게 이렇게 부딪쳐본 만큼 튕겨져 나갑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당신은,
내가 첨에 전화통화 하고 나서,
내 전화 안받으려고 전화기를 꺼놨을수도 있었겠다고요.
만약 다시 전화통화했다가 '전원이 꺼져있습니다'.. 이 소리 들었다면 더 허탈했겠죠?
내가,
전화 안하고 그냥 문자만 넣은것이 잘한건가요...
적어도,
지금 내 혼자 생각에는 그렇네요.
그치만......
정말 묻고 싶은게 있어요.
내가,
전화통화는 물론이고 문자조차 보내기 싫을 정도로 그렇게 불편했는지,
내 스스로 이렇게 자괴감과 허탈, 분노를 느끼게 만들 정도로 그렇게 두번다시 보기 싫었는지.
내가 한거라곤,
그저 당신 모르게 전화번호 알아내서 새가슴 조바심내며 전화한통 하고,
문자 한줄 보낸것 밖에는 없는데.
정말, 당신한테서 배우고 싶은 교훈들은 아니었는데,
확실하게 배우고 가네요.
네...
이젠 알겠네요.
때론, 열마디 백마디의 말보다 사람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침묵이 정말 확실한 대답이 될수도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이거 한마디만 말해주고 싶어요.
내가 원했던건 당신의 마음이 아니라,
당신이 내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고.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솔직하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당신의 용기였다고.
그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나는 기대해서는 안됐던 건가요?
내가,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아뇨.....
이건, 당신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나는 당신이 하는 그 어떤 사소한 말조차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저녁, 그야말로 공중에 붕 떴다가,
그 다음부터 1주일 동안 지옥에서 지냈다가,
다시 1주일 간신히 연옥으로 올라왔다가,
이 악물고 다시 한번 공중으로 뜨고 싶었는데,
이렇게 곤두박질치고....
일어섰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나도 이제는 진정한 내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것 같습니다.
당신이 내게 주신 아픈 교훈들 잘 챙겨서 저어기 언덕길로 다시 오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