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왕의 원찰 융건능

김가화 |2006.07.16 21:44
조회 63 |추천 0

2006년 7월 7일 문화해설사 두번째 강의-by 김장심

 

다른 절처럼 산 속에 있는절이 아닌

평평한 길에 있는 안양에서 80~100리

안 팍인 용주사는 융건능의 능찰이기도 하다

불교에 대해 추측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료가 없기에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용주사는

범종의 양식을 보건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때의 이름은 갈양사이다

갈양사하면 염거화상을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일제침략에의해 이왕직이 현 국립중악박물관으로

모든 보물이나 탑등 문화재를 옮겼다

또 갈양사는 고려 광종때 입적한 혜거국사비를

통해 갈양사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절과 승려에 대한 예우가 있을만큼

절을 좋아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조포사라고 불릴만큼

승려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고 한다

불교를 탄압하고 쇄퇘시켰으며 주로 왕의 부인들이나

여인들이 신앙적으로 믿는 것으로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불교를 숭상한 왕은 태조 세조 명종의

왕이 불교를 숭상하였고 다른 왕들은 싫어했다

정조 또한 불교를 억제했지만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원찰을 용주사로 했다는 것이다

당쟁의 희생물이였던 비극의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형이 일찍 죽자 만2세에 되는 나이로 왕세자에 올라 영조의 대리청정까지

맡은 인물이였지만 노론의 세력에 의해

뒤주에 갖혀 죽고 말았다

사도세자 나이가 28세이고 정조의 나이 11살이였다  

사도세자는 아들에게 책도 만들어주던

자상한 아버지 였다

그러나 노론세력과 영조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능을

방문할 수 없었으나 23세때 사도세자의 묘를

처음 방문하세 되니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정조가 왕이되고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1790년에 용이 하늘로 여의주를 물고 올라간다하여

용주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융능에 곤신지 연못이 있는데 구슬처럼 둥근

여의주 모형을 하고 있어 사도세자를 용에 비유했다

그 밖에 사도세자를 용에 부각시킨것으로는

창룡문과  방화수류정을 꼽을 수 있다

왕의 아버지의 원복을 빌어주는 절로써

다른 절과 달리 잘 먹고 많은 혜택을 본 용주사인데

그 한가지 일화를 보면 어떤 땡중이

부녀자를 희롱하는등 온갖 악행을 다 해

왕의 능찰임에도 불구하고  보다 못한 관하에서

왕께 상소를 올렸는데 답이오길 곤장 1대를

벌로 내렸다고 한다 사또는 글 을 보더니만

꽤를 내어 땡중을 묶고 곤장 때리는 시늉만을

내게 했는데 마지막으로 진짜 때렸더니만

그 땡중은 심장마미와 같은 이유로 죽고 말았다

또한 주지가 바뀔 때마다 자료를 없애어

부도비나 범종에 세긴 것으로 미루어 짐작 할 수

밖에 없다 자료를 없앤 이유중 하나는 재산을

빼돌리려고 했다고 한다

용주사의 주요인물을 살펴보자면

정조를 만나 부모은진경을 전해 준 사일스님이 있는데

대황리에서 정조를 기다렸다는 뜻에서

기다릴待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철학스님이 계시는데 자료는 남아있지 않는다

의첨승려 인악대사

일제시대에 친일승려 강대련이 1911년 용주사의

주지스님으로써 오점을 남긴 스님이다

강대련을 밀어내려고 불교계에서 힘을 쏟았지만

일본의 힘으로 죽을 때 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전강스님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며 정신적 지주로

손꼽히는 분이시다  

용주사는 왕의 원찰답게 원래는 궁궐양식의 홍살문이 있었지만 강대련이 1910년에 돌비석을 놓았다고

한다 돌비석은 일본의 양식으로써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돌비석에 새겨진 글 귀는 불경이라 현재까지

일본 잔재임에도 불구하고 없애지 않았다고 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전해 내려 오지만

인도에 불교가 없듯 불설대부모은중경판 또한 중국에서전해내려왔지만 현재 중국에는 없다고 한다

목판은 정조가 하사한 것이고

1802년에는 순조가 석판과 동판을 하사 했다

용주사 창건당시 대웅보전의 현판은 정조의 친필로

하사하였으나 현재는 잘 모른다

사찰의 제일 높은 곳을 대웅전이라고 하는데

용주사 소맷돌 계단을 보면 다른 절들과는 달리

구름무늬와 북무늬를 볼 수 있는데 구름무늬는

천상을 뜻하고 북무늬는 전진을 뜻한다고 한다

대웅보전 안에 있는 닫집은 대웅전안에 또 하나의

대웅보전인데 이 것 역시 왕의 용상안 위를 보면

또 하나의 궁궐이 있는것과 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써도 용주사는 왕의 원찰답게 2의 궁궐이다

라고 할 만큼 궁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대웅보전안에 삼존상이 있는데 오른쪽엔 아미타불

가운데는 석가모니 왼쪽에는 약사로써 

질병을 없애고 수명을 연장시키며 재산을 보존한다

삼존불 뒤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주관아래

25인이 참여하여 제작했는데 일부에서는

후불탱화가 김홍도의 인물의 표현이 안돼있고

다른 작품들과 틀려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닫집의 명문을 참고하여 김홍도의 주관이라는 것이다

또한 후불탱화에서 숨은그림을 찾을 수가 있는데

축구공을 찾아볼 수 있다 박지성의 모친께서

유명하기전 용주사를 방문하셨을때 그려넣으셨다고 한다

사찰마다 있고 땅지 웅덩이장을 사용하는 지장전은

현판은 세로이묘 뷰모의 극락천도를 이끈다

경복궁 경회루와 비슷한 것으로 천보루가 있는데

이는 왕실에서 사찰을 지어

궁궐의 양식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읽을 때는 시방칠등각이라 읽고 쓸 때는 십방칠등각이라 한다

칠등각이란 칠성신을 뜻하는 말로

10방향에 부처가 있다는 뜻으로

이는 곧 온세상에 부처가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삼성각은 3분의 신이 있다는 뜻이다

중생을 이끈다는 뜻의 천불전은 작은 불상 천개가 있다

참고로 삼천불은 과거 천 현재 천 미래 천으로써

시상을 초월해 부처가 계신다는 뜻이다

삼문은 문이 3개라는 뜻인데 들어갈때는 동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때는 서쪽 문으로 나온다 가운데 문은 신문이라 하여

신들이 이용하는 문이라 이용하지 않는다

어제 화산용주사봉불기보게로 시작하는 가사체 게송은

1796년 5월 정조가 직접 쓴것으로 효행박물관에 있다

화산용주사상량문을 쓴 채제공은 조선후기 무신으로

정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인물이고

특히 영화 스캔들의 임미숙이 채제공의 부인역으로 나왔따

김홍도의 작품으로 왕실에서 사용한 4폭병풍은 수묵화로

정조가 용주사에 하사한 것이다 또한 정조의 어진까지 그렸다

지장전앞에 효성전이라고 있는데 원래는 호성전이였지만

화재로 불이타고 이후 새로 지어 효성전이라 불리고

1815년에는 사도세자부부의 위패와 같이

정조부부까지 위패가 모셔졌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