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fine
fine
[명사] 악곡의 끝을 나타내는 말. 도돌이표나 달 세뇨 기호 때문에 반복하여 연주하다가 곡을 끝내는 위치를 표시할 때 쓴다.
그와는 1년 전 쯤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딱히 친하다고 하기에는 미묘한 거리가 있는 관계였다. 별로 한 반년 쯤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고 해서 보고싶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문득 떠올라서 연락했을 때 그다지 서먹하지도 않은.
따로 그와 자주 연락해서 만났던 것도 아니었고, 그 날도 달리 그에게 연락할 생각조차 없었다. 누군가 계기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기억 속에 묻혀서 떠오르지 않는 상태랄까.
수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너무 좋아서, 시험기간이라는 것도 깜박 잊은 채 대책없이 놀러 갈뻔 했던 나를 붙잡아 도서관 한 켠의 책상에 앉힌 것은 평소부터 나의 상태 - 시험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 데 여전히 태평한 -를 걱정하던 친구였다. 친구로 부터 그러다가 또 시험 못보면 징징댈거냐는 등의 한 차례 연설을 듣고서, 약간은 우울한 기분으로 책상에 앉아 마지못해 책을 펴긴 했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반짝반짝한 풍경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히잉ㅡ' ,'헤에에엥ㅡ' 과 같은 우는 소리와 갖은 애교를 동원하여, 어쩔 수 없다는 한숨과 함께 '딱 10분 만이야.'라는 허락을 받아내고, 밖으로 도도도 달려나온 나는 멀리 나갈 수는 없어 도서관 앞 벤치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기분좋게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적당히 빛나는 햇살과 금방이라도 온 세상을 파랗게 물들여 버릴 것만 같은 새파아ㅡ란 하늘. 그리고 문득 문득 떠 있는 구름 몇 조각. 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져 버리는 늦은 봄의 정경이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단언 하건데,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 스이?"
멍하게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나의 의식 속으로 익숙한 단어 하나가 불현듯 파고 들어왔다. 지난 21년 동안 해온 습관에 따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반갑다고 말하기에는 모하고, 그냥 기억 속에 살짝 묻혀있던 일단 알고는 있는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우 의외라는 표정과 함께.
" 에ㅡ 쥰?"
멍한 대답을 하고서, '으음, 쥰이구나. 오랜만이네.' 라고 겨우 생각할 수 있었다.
쥰은 대학에 와서 알게된 몇 안되는 학과 이외의 친구로, 친구의 친구 쯤이랄까 곁다리로 어찌어찌 알게 된 사람이었고, 친구들과 여럿이서 함께 술을 마시러 간다거나, 놀러 간다거나 하긴 했지만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함께 있으면 유쾌해지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 처음에는 나보고 이상한 사람이라느니 어쩌느니 해서 별로 좋지 않게 보기는 했지만 - 또 그렇게 어울리고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1학년 말쯤에는 종종 어울려 놀곤 했지만 2학년이 되면서 다들 바빠졌기 때문에 통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그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았지만, 학년도 같고 해서 나는 그냥 그를 쥰이라고 불렀다. '쥰 오빠'라기에는 뭔가 어색하고, '쥬운ㅡ'이라고 늘여서 부를 때의 느낌이 좋아서 그냥 마구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주변의 동기들도 다들 '쥰'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면 그냥 같은 학년이니까 개의치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내가 이런 저런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그의 존재를 기억 위로 끌어올리는 사이, 어느 새 그는 내 앞에 성큼 다가와서 서 있었다.
나는 생긋ㅡ 웃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 여긴 왠일이야? "
" 시험기간이니까 공부."
반년 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둘 다 '오랜만이네' 따위의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런 인사를 할 정도로 의례적인 사이도 아닌데다, 나의 경우 별로 오랜만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만났네? 그렇군'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참 좋은 오빠구나'라는 정도의 감정이 있었지만, 별로 관심도 없었고 또 간간히 들려오는 그의 소식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느니, 사귀는 사람이 있다느니 하는 것들도 있었어 약간 의식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 공부 안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왠일로?"
" 엣!! 그런 유언비어?! 누가?"
" 윤아가 그러던데? 너 수업 끝나자마자 놀러다니느라 바쁘다고 "
" 음...그렇지 않아도 그 윤아에게 끌려서 도서관에 앉아 있는 참이야."
" 앞으로도?"
" 아마. 역시 윤아가 두고보지 않을 것 같은 태세니까 말이야."
" 그럼 배고파지면 연락해. 같이 뭐라도 먹게, 나도 다음 주까지는 여기 자주 있을 것 같거든."
" 응. 그럴께."
" 안 들어가?"
" 응. 이제 슬슬 들어가 볼까 하고, 쥰은 몇 열람실?"
" 3, 넌? "
" 난 5 열람실. 그럼 반대 방향이네. 잘 들어가. 열심히 해!"
" 그래, 너도."
ㄷ 자 형태로 생긴 우리학교 도서관에서, 그가 공부하고 있다는 3열람실과 내가 공부하고 있는 5열람실은 반대 방향이었으므로, 우리는 그 벤치에서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반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고 '여전히 사람 좋네'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그를 다시 보리라는, 심지어 둘이서 함께 무엇인가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험기간이다 보니 쌓이는 스트레스를 주체 할 수 없었던 나는,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놀아줄 상대가 필요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인 윤아는 시험 공부를 해야한다며 상대도 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어찌 어찌 연락한 것은 역시 쥰이었다. 예전부터 좋은 사람 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게다가 조금 열심히 설득하면 일단 부탁은 들어주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 또 열심히 회유해서 함께 어울려 놀러 다닌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 별 생각 없이 선택한 사람이었다.
결국 나의 근거 없는 주장으로 우리는 시험기간인 와중에도 스트레스를 풀어야한다는 명목아래, 영화를 보러가거나, 이제 슬슬 우거지기 시작하는 녹음을 즐기러 가거나, 밤이면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함께 도서관 주변을 걷거나 했다. 그러다보니 시험이 끝났을 무렵에는 둘이서 무엇인 가를 하는게 전혀 어색하지 않아 종종 만나 또 영화를 보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거나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상 중의 한 켠에서, 나는 그로부터 고백을 받았다.
그것은 아주 뜻 밖의 일이라서, 처음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멍ㅡ해야했고, 그 다음은 기쁘다기 보다는 당혹감이 밀려왔으며, 그 평화로운 상태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그저 옆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 쯤은.
그래서 상처 받을 거라고, 이건 아니라고, 그렇게 수 백번도 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응' 이라고 말해버렸다.
누군가 나에게 와서 정확한 이유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나 자신 역시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사실이었다. '버스를 타고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옆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와 같은 기분이라 나 스스로에게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려 줄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나는 그를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그가 다른 사람의 옆에 있는 것이 싫다는 것. 이 두 가지 뿐이었다. 혹시, 그가 내가 기다리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애매한 감정으로 나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 뿐이었다.
또 다시 거짓을 진실인양 착각하여,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사랑에 대한 -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은 - 환상을 온전히 내 안에 남겨 두기 위해서.
정확히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버렸기 때문에.
그를 또 나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2006. 8. 10 by. ich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