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전경린
p.3~p.4
한가로울 때, 오랜만에 맑은 머리과 바른 자세로 잠깐 삶을 쉬게 될 때, 누구나 그렇듯이 삶이 꿈속 같고 나 자신이 존재라기보다는 본질인 것처럼 무화되는 것을 느낀다. 울음을 그치고 허무로 돌아가듯이...
스무 살이든, 마흔 살이든, 일흔 살이든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지점인 것 같다. 떨림과 어긋남과 차이… 그 속애서 우리의 생은 LP판 속의 가수처럼 노래한다. 정밀한 트랙 위에 금을 그으며 실제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봉인된 지도 같은 손금 속애서 스스로를 감거나 푸는 것이다. 서서히, 혹은 갑작스럽게. 정신적으로 신경증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낡아가며, 시간과 기억의 불협화음과 망각과 실종의 허방 사이에서 간혹 날카로운 스크래치를 일으키며...
그러니 삶이란 우리를 어느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퇴적층의 무늬를 만들며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운반하는 것이 아닐까…
p.101
… 뒤섞인 상인들과 행인들을 골똘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슴이 얼얼해졌다. 누구나 구체적으로 살고 있었다. 삶을 손으로 잡고 피부로 느끼고 맛을 본다. 중력을 어깨에 지고 두 다리로 정직하게 나르며... 나만 추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p.173~p.174
"선생님이 돌아와도 이제 연극 따윈 하지 않을 거야. 자칫하다간 인생에서 연기를 하게 될 테니까. 연기와 인생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어. 이번에 연극을 하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정해진 대본으로 연기를 한다는 걸 깨달았어. 서로 대본을 모르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어서 어긋나거나 스치고 말아. 말이 안 통하네, 마음이 안 통하네, 이해가 안 되네, 수준이 다르네 하면서. 너의 대본에 대해 나는 몰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서로의 대본을 알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자기가 아는 대본대로만 연기하도록 요구하는 거야. 더 이상하거나 다르면, 크게 속았다고 생각하지. 서로를 자기 대본 속에 가두려고 혈안이 되는 거야.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는 평생 하나의 대본의 틀 속에서 갇혀 살아가. 같은 대사, 같은 동선, 같은 감정을 연기하면서... 정말 끔찍한 감금 아니니?
난 뻔한 대본 속애 갇히지는 않을거야. 진짜 삶을 살 거야. 진짜 삶은 조각조각 찢긴 대본처럼 불안정할지 모르지만, 그건 자신에 대한 발견이야.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 세계와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와의 소통조차 평생이 걸려도 쉽지 않지. 나 어떻게 사느냐, 무엇이 되느냐, 누구를 사랑하느냐보다는 나 자신과 소통하는 데에 관심이 생겼어.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이 세계와 타인과 자기 사이의 한계를 어느 정도 알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법이지."
p.222 (작가의 말)
오랫동안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했었다. 이젠 삶에 대해 좀 덤덤해지고 싶다. 새로운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서 잠시 머무는 것들... 그것에 다정해지고 싶다. 민감하기보다는 사려 깊게, 좀더 특별하고도 편안하게... 그래서 내면의 미소를 잃지 않는 균형감각과 타자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는 해방된 힘을 갖고 싶다.
"스무 살이 인생이 되게 하지는 말아라. 스무 살은 스무 살일 뿐이야.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