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서의 서약은 네게 저주로 다가올수도 있다.
주성준
|2006.08.20 23:49
조회 59 |추천 1
결혼식에서의 서약은 네게 저주로 다가올수도 있다.
원래 자연은 인위적인 것이 없다. 모든 경전들과 문서와 격식은 인위적인 것이다. 그것들이 성자들이 직접 쓴것도 아니고 후세에 변색과 첨가를 계속해왔고 그 진실을 평범한 인간이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인위적인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의 선택의 자유가 있다.
주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이다.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집권자들이 만든 것이지 우리가 말하는 원죄도 없다. ‘자연의 근원’ 우주의 시작으로 돌아감이 사람들이 말하는 ‘진리’ 또는 도(道)라고 말한다. 사람이 이것과 하나가 됐을 때에는 주, 부처, 신선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못 믿고 불신하기에 ‘축복’의 이름을 도용하여 서로를 구속하기 이르렀다. 특히 옛날엔 피임기술이나 바이러스에 대항할 약, 의료지식이 부족했고 힘의 원리에 의해 서로 버려지거나 타의에 의해 깨지는 경우를 예방하기 위해 서약을 문서로 남기고 서무의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인구가 많지만 예전엔 자식 열을 낳아도 반 정도만 ‘성인’이 될 수 있었다.
나머지는 병과 전쟁, 사고로 죽고 평균수명도 50살 내외였다.
그래서 60살 환갑잔치가 장수의 상징이었다. 자연의 원리는 선악의 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간의 선택하기에 따라 선으로도 악으로도 한다. 이미 신은 네게 네가 신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라고 하였고 선악은 네 선택에 달린 것이다.
그러나 지구 역사상 인간들은 악으로 가는 성향이 훨씬 더 많았다. 무지한 유교학자들은 성선설을 유포하여 민중을 현혹시키기도 했다. 남녀간의 원리에서는 남자는 열 여자 싫다는 남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물개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적자생존원리에 입각해 좋은 씨를 받게 하는 자연의 원리에 입각한 수컷의 본능이고 실지로 머리 좋은 이의 정자는 좋은 머리의 후손을 낳는다.
여자는 전생의 습(習)과 세상의 이러한 힘의 원리에 의해 항상 피지배자로서 마치 남자의 악세사리처럼 인류의 진화를 위해 살아왔다. 남자는 사랑한다고 유혹하여 여자를 임신시키고 종종 그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가 생기고.... 여자를 힘으로 억압하고 홀로 설 케리어우먼의 자격조차 그 권리를 박탈해왔다. 현대에 이르러서 그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여성도 동등한 권리를 주고 있고 일을 할 수 있으며 새로운 법과 증인으로서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믿음이 없는 결혼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 소유적 확신과 육체적 말단적 사랑을 뛰어넘는 의리가 있다면 결혼식에서의 수백명의 증인도 필요 없고 국가가 인정하는 문서상의 증서도 필요 없다.
결국 양가부모와 그 수많은 증인들, 낳아놓은 자식들에 대한 연민과 국가에 기록상 남는 서류 때문에 살다가 서로가 맞지 않을 경우에는 이혼을 하기도 힘들어진다. 이혼이 가문의 수치이고 창피한 것이고 다시 재혼하는 사람을 사회는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기에 좋은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실질적으로 40%에 이르고 특히 결혼식에서 “신부 000양과 신랑000군은 평생...을 서약하는가?” “예!” 의 대목에서 이미 그들은 맹서를 하게된다. 주례를 서는 목사나 신부, 스님, 저명인사들은 남들이 행사한 관습 습(習)에 의해 남들이 하는 식순에 따라 별 느낌 없이 주례사를 행하는 것이나 그것이 곧 저주가 되고 장님이 장님을 인도 하는것과 같은 원리임을 모른다.
‘주의 이름과’ 천지에 대고도 맹서치 말라고 했는데도 타의 모범이 돼야할 목자의 신분으로 그것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이 맹서가 깨질 확률은 거의 50%에 육박한다. 그리고 사랑은 두사람만의 육체적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만날수도 있고 그것이 지구의 행복 에너지에 더 많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계와 같이 프로그램 된 자유의지와 창조적 생각이 없는 오래된 의식과 인위적 문서에 보호를 받고 싶어하고 자기의 노력으로 얻은 실질적 행복보다는 고생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을 두려워한다. 남의 눈들이 자기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쁜것인 줄 인지하면서도 사회적 습관에 의해 남들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도 모르는 습관에 의해 나쁜 이미지의 탈선자로 그 사람을 보게된다. 이혼녀란 딱지로서 말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너희들의 자유와 행복을 얽어내는 인위적인 의식과 맹서를 하지 말라. 스스로의 덫이 되리라. 독일등의 유럽국가에서는 자식들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도 결혼식을 안하고 동거를 즐긴다고 한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기대지 말라. 너는 너 자체가 신의 화신이니 네 안에서 행복도 사랑도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좋으면 그냥 같이 살면 된다. 싫으면 헤어지더라도 자식에 대한 책임은 지는 것이 의리이다. 서로 얽매이지 말라.
헤어진다고 상대를 미워함이 아니다. 더 낳은 더하고 싶은 것을 서로 찾아갈 뿐이고 가끔씩 만날수도 있다. 그것이 육체의 사랑을 뛰어넘는 의인의 의리이고 친구이다. 네 일을 가지고 네것을 가져라. 기대지 말라. 네 안의 ‘주’를 더럽히지 말라. 네게 벌어지는 어떤 일이던지 네가 선택한 것이고 그 책임은 배우자에게 타인에게 있지도 않고 네게 그 근원적 책임이 있다. 그런 사기꾼을 왜 ! 믿고 왜, 사랑했는가? 너희들의 결혼은 결국 사랑이 아닌 성 기능이 달린 육체의 교환이고 장사가 아니었는가? 너가 그 실마리를 제공했고 네가 허점을 보였기에 그가 욕심을 낸 것이다. 대문을 열어놓고 금덩이를 보이면 순수한 사람도 가지고 싶어진다. 우선 네 마의 문단속부터 잘할라. 그리고 남녀의 사랑은 죽음이던지, 생전의 헤어짐이 됐던지간에 그 끝은 이별이 보이는 만남이다.
짧은 생애에서 왜 서로 미워하는가? 간통죄나, 혼빙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했던 사람의 감정이 식어서가 아니면 그보다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서로의 발을 묶는 문서상의 제약이다. 진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나, 원수도 아닌 사랑했던 사람조차도 다른 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미움으로 돌변하여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교인들의 위선’에 해당하고 결혼식의 ‘서약’에 의해 효력을 발휘하는 이러한 ‘죄목’들은 ‘주님’의 맹서치 말라 라는 가르침에도 위배된다. 서로의 언약을 통해 같이 살고 싶어하는 이성을 버리고 떠나는 이도 문제지만, 이러한 짓들을 하면서도 바로 다음날 버젓이 신전에 가서 그 간통죄 ‘고소’건이 잘되길 바란다고 기도하는 어이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는 둘 다의 문제이다.
모든 것을 다 주고, 잃었다해도 진실한 사랑을 했다면 후회를 한다거나 그것도 모자라 고소까지 한다면 스스로의 믿음과 사랑을 깨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이성이나 네 부하직원이나 자식들이나 너와 본질은 같으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우주이다. 네 소유로 보지도 말고 유교적 아니나, 가족관계, 권위로서 절대 너보다 아래로 보지도 말라. 모든 생명체엔 주님의 신성이 내재하고 있다. 그 신성을 네 에고의 잣대에 따라 고소함도 네가 네 허점의 문을 열어 네가 그 원인제공을 했으며 너도 즐겼지 않았는가?
괴로웠던 날보다, 즐거웠던 날이 더 많을수도 있다. 예수가 자기를 십자가에 달은 이들은 원수를 용서했듯이 네가 진정 교인을 자처한다거나, 혹은 진실한 후회 없는 짧은 생을 살고 싶다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고 감싸 안으라. 너의 위선을 네 눈의 가시를 보라. ‘신전’엔 무엇하러 다니고 종교를 왜 믿는가? ‘주’의 빛과 행복이 네게 이르리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헛된 남들의 인간이 만든 윤리 규범을 따르기보다 변치 않는 네속의 진리의 법을 밝히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라. 들국화의 노래에도 있지 않은가. ‘그것만이 내 세상’ 이라고....
삶에 있어서 결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잃었다고 생각함을 너의 환상과 생각이 그리 생각해서이다. 넌 태어날때부터 빈손으로 왔으나 지금 이 순간은 옷도 있고 밥도 있다. 최소한의 네 몸만 놀려도 그런 수익은 보장되고, 그것을 하더라도 옛날 민초들처럼 열심히 일하고도 보릿고개때 굶어 얼어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신들도 천사들도 가지지 못한 ‘마음’이란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마음을 얻기 위해 천상의 신들조차도 인간으로 환생하기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몸 한번 받는 것이 이렇게 힘든데, 어찌 돈과 속이 텅빈 헛된 명예나 짧은 인생안에서 소유욕에 의한 축체적 사라을의 불길속에 너를 빠트려 스스로 ‘독’을 품고 그 독에 모두가 지쳐서 다함께 죽음에 이르도록 하게 하는가. 너의 삶이 그렇게 ‘독’을 품을 만큼 영화롭지도 않고 인생이 길지도 않다. 과거는 없다.
네 환상속의 기억에 있을 뿐이다. 그것도 그 일을 기억할때만 말이다. 이점을 명심하라. 지금의 순간에도 미래는 그 모습을 바꾸어서 과거라는 놈으로 둔갑해 버린다. 사실은 모든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꿈은 그 실체가 없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다. 모두 ‘기억속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죽음과 삶이라는 주제속에서 방황한다. 그것이 실은 존재치 않는데도 말이다. 단지 육체가 산화될뿐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나는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다’실체를 보라.
단지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할 뿐이니, 그래서 그저 존재하는 무심의 여래(如來)라 하지 않았더냐. 증오도 집착적 사랑도, 세월이 가면 다 부질없는 짓이니라. 너의 것도 아니었고 잠시 가지고 있다가 가는 것들이다. 육체, 돈, 배우자.... 본래 너의 것도 아니었고 잠시 가지고 있다가 가는 것들이다. 네 속이 크다면 우주의 모두를 가지라. 긍정, 부정, 사랑, 증오까지도 자연은 모든 것을 품고 있으나 말이 없고, 모두에게 햇빛과 증기를 삶과 생명을 거쳐 주고 있다.
너는 자연의 아들, 딸들이고 자연이 주의 본체이다. 그러한 본능이 네속에 있으니 그 본능의 씨앗을 깨우라. 선, 악을 떠나 모든 이에게 행복을 주고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주의 뜻을 알리라. 주지적 편견이 없는 다양한 지식과 지혜를 통해 두려움과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고 적 그리스도의 거짓가르침과 그 권능에 무릎을 끓지 말라. 사이비, 적그리스도는 장차 태어날 하 사람을 의미함이 아니라, 알고 행하기도 하고 모르고 진리를 왜곡하는 행하기도 하는 여러 거짓선지자와 그 가르침의 문화를 일컫는 것이다. 왜 말세라고 하는가? 대부분 인간의 눈으로는 그 시대가 자나기 전에 적 그리스도의 정체를 알 수 없다. 희귀하고 거짓, 적그리스도들이 세상을 오도시키고 동, 성야의 종교를 서로 싸우게 만든다. 원수로 생각하면서....
있지도 않은, 예수가 언급한적도 없는 지옥의 두려움과 싸우게 하고 스스로에게 원죄론을 씌워서 그들이 성스럽다고 말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내몰았고 종교조차도 필요 없는 어린이의 순수 내면의 믿음으로 기적의 효험이 있는 이를 ‘마녀’로 몰아 사회의 모든 힘을 갈취하고 있으며 그들을 그들 소유의 신전 앞에 무릎꿇게 하고 지옥을 앞세운 면죄부와 시대에 뒤떨어진 의미의 11조를 팔아서 돈을 착취한다.
원래 11조의 의미 또한 그때의 문화와 지금의 문화가 다르기에 바뀌어져야 한다. 그때 규칙이 만일, 그때의 목회자에게 있어서 신전의 일을 돌보느라 그집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기에 그들의 의식주를 도와주는 것이 그때의 법칙이었다면 지금의 대규모의 경제규모와 함께 그때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경제체계속의 기계화된 사회에서는 수입의 십분지일을 주라는 법칙을 따라야 하는가?
‘11조의 의미’는 목회자의 시간이 다른일을 겸하기에 충분치 않기에 그들의 생활비와 ‘신전’을 보수하고 수리하는데 쓰라고 그 시대의 경제 규모에 맞추어 만든 법칙인데, 21세기 지금의 경제규모에서의 11조는 이러한 의미를 초월할 만큼 많아졌다. 월100~200만원이면 그들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고 ‘신전’의 유지비 또한 월200 보시함이 예수의 진리다. 속 빠진 높은 첨탑을 자랑하는 신전의 건물에 있지 않고 이웃에게 행함이 예수에게 행함과 같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선자, 적그리스도들은 이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단지 형식적으로 애꿋 은 ‘동지’들을 내세워 양로원, 고아원 거리의 무직 노숙자에게 푼돈으로 컵라면이나 ‘밥’을 주는 ‘쑈’를 하고 있을뿐이다. 마치 정치인들이 철만 되면 식당에 들려 그러듯이....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했고 그 빵을 주는것보다 그것을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교육과 레저와 문화시설을 갖춘 실질적 무료 교육시설이 그들에겐 더 중요하다. 공동 묘지같이 널려 있는 신전들이 그들에게 이웃들에게 해주는 것은 사회에서의 모임장소나 상업적 로비 장소로서의 역할밖에 못하고 ‘이기적’소원을 비는 집단 이기주의의 장으로 변화돼 가고 있다. 적 그리스도적 사랑의 거짓탈을 쓰고 있는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삶과 예술의 동질성
예술인이면서도 그 기술을 생활에 접목하지 못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냥 느낌으로 살뿐이다. 그림이나, 연극, 조각들에서 보이는 채도, 명도, 구도, 스케치, 구상등이 모두 삶과 성공의 기법이다. 명도가 낮은 것에서 높은 곳으로 혹은 그 반대로 그림을 완성시키고 채도가 높은 것에서 시작하여 낮은 곳으로 간다.
모든 것은 단계가 있다. 평소에는 그 단계를 따르되 ‘파격’ 의미가 있다. 갑자기 그 단계를 두, 세단계 높게 주어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데, 주제부분의 포인트에서 그러한 기법을 쓴다. 3차원적 빛의 법칙에서 벗어났으나 4차원적 ‘주’의 영역인 창조와 자유의 영역이 개입하여 3차원의 원리와 조화를 이룬다. 지금의 예술인은 감각으로서 알고는 있으나, 정확히 이해하고 생활에 접목시키는 이가 드물다.
그 예로 그들은 시덥지 않은 점잔을 빼는 경우가 많다. 생활속에서 상스럽다고 말하는 육두어가 어린이의 어설픈 말과 같은 어리숙한 표현과 함께 핵심에 막히면 의외의 폭소나 가늠키 어려운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을만하다. 채도는 그 사람의 순수한 어린이 같은 단순함을 나타내고 명도는 일의 진행순서 즉, 전술을 얘기한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수 있고 그림을 통하면 서예의 원리는 덤으로 다가온다. 그 시대에 학자들에게 ‘서법‘을 망친 사람이라고 까지 지탄을 받았던 악필 ’추사 김정희‘의 서화일본(書畵一本)논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글씨가 이쁘지 못하면 ’아예 그림을 그려라, 그림을‘이라고 한다. 여기에 이 말속에 자기도 모르는 ’서화‘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예의 ’간가와 결구‘와 그림의 ’포치포백‘론은 결국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언어가 없는 자연의 전술과 동심과 자연의 세계를 익히게 된다. 자연의 싸리나무와 소나무는 굵기가 전혀 다르다. 사람도 천성이 그와 같이 갖가지인데 서예 학원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어기고 같은 굵기의 선과 규격을 강요한다.
이미 예술의 취지와 자연으로 돌아가는 진리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습(習)을 반복 교육시키고 그들의 순수성과 예본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싸리나무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에 채도의 맑은 순수성이 결여되면 꿈이 없는 사람이 되어 단계적 명도만의 전술로써 무채색의 전쟁을 일으키는 영웅심이 발동하며 피는 피를 부르고 세계는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평화와 사랑의 근본 교육이 ‘예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우주의 진리는 ‘직업’속에 다들어 있다. 하다 못해 음식 만드는 기술과 직업속에서도 예술적 깨달음의 세계는 있다.
우리의 지금 교육은 무언의 문자 없는 인성교육을 무시하며 그 시간을 암기위주 과목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결국 그들은 사회속에서 성능이 뛰어나기는 하나 인간적 정서가 말라 가는 비싼 기계의 무채색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인다. 스스로 그것이 무언지도 모른다. 내면의 정서와 그것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고 스스로 느껴지기도 어렵다. 죽음에 대한 군중속의, 돈속에서의 고독을 문득문득 느낄뿐이다.
기적이란 없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기적이 있다면 신들의 그것보다도 인간의 기적이 더 위대할 것이다.
월드컵과 세계의 눈
이데올르기의 극복
80년대 스페인 월드컵을 통해 그들은 세계 경제5위 관광 2위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색깔을 지닌 고대 문화는 사라지고 조선의 사대주의적 중국 문화로서 그 아류의 정통성을 아직도 주장하고 있다. 전세계에 세계속에 우리 상품의 1% 선전을 위해선 선전비가 12조 정도가 든다고 한다. 스페인은 투우 플라맹고춤등 문화재산이 풍부했다. 우리도 우리의 춤과 차전놀이등 독특한 문화를 축구와 같이 거리문화로 되살려야 살아있는 관광재원이 될것이고 그림 또한 지금의 서양식 비엔날레 전시나 중국식 유교적 수묵그림이 아닌 자연주의적인 만물에 내재해 있는 신성과 자연을 경외하는 고대 신앙을 현실의 교리에 맞게 통일시켜야 한다. 대중축제 문화속에 고구려의 국민을 하나로 뭉치던 국가적 행사였던 ‘동맹’ 축제나 부여의 ‘영고’ 축제를 이 시대에 맞게 되살려야 할 것이다.
모든 종교가 통일된 문화였던 ‘신라’의 풍류도 문화를 되살림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관광수익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시대 최대의 이데오르기인 좌, 우익의 싸움과 종교의 갈등을 화합시키지 않는 한 큰대(大)자, 대한민국은 없다. 가장 크다(大)는 것은 그 경계선이 없는 무한한 수용과 융화 화합이 전재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우리는 진정한 대한민국이 될 수 없다. 그 이름에 창피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동지가 됩시다.
탈냉전의 신호탄
우주의 의미와 원리가 담긴 태극기가 화면을 통해 전세계에 뒤덮었고 ‘대한민국’이란 외침이 지구를 흔들었다. 유교적 예수교적 논리와 불교 및 전통신앙을 ‘사랑’의 대전제 아래 하나로 묶어서 세계로 뛰어들어 우리의 ‘홍익인가’의 이념을 펼쳐야 할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 이방인을 대량학살한다는 힘의 논리와 그 힘있는 신을 더 이상 두려워 말라. 그 결과는 결국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이라는 ‘징역’의 벌과 탈무드 임마뉴엘의 기록상으로는 그후 출소해서는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선민주의적인 구약의 계율을 도가 넘치게 신앙하고 그에 맞게 신약을 왜곡했기에 예수를 오도한 죄의 ‘인과’로 700만이 넘게 2차대전중에 학살되어야 했다.
전세계에 ‘동이족’의 영감과 깨달음에 의해 창시된 ‘태극’논리를 펼쳐야 할 것이다. 도교의 시조인 노자, 신노, 복희, 자부선인등은 중국 한족이 아닌 동이족이였다. 자랑스럽지 못하지만 공자, 맹자 또한 한족이 아닌 동이족이였다. 이제 수천번의 외침속에서 주고만 살아왔던 우리 민족에게 날개를 솟게끔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종교적, 이념적, 전쟁의 논리에 이제 우리는 속지 않는다. 더 이상의 전쟁이 있어선 안된다.
선악은 없다. 에너지 이동의 법칙과 1소멸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약하다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자신 혹은 타인에게서 일어난 어떤 사건들은 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악한 일에 피해를 받은 고통의 에너지는 이생과 후생에 걸쳐 다시 그 쪽으로 돌아갈 뿐이다. 선한 행위로 나름의 에너지 이동 법칙을 가진다. 그리고 이 선악의 행위와 경험을 통해 살인을 통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나 남녀의 사랑, 돈, 권력을 가지는 연습을 통해 그것을 버리고 지혜와 진실을 찾아 떠나는 진화의 과정일 뿐이다. 또한 그 인과를 받음으로서 에너지의 법칙에서 손해를 안 보도록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진화된 영혼들은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예수가 그를 처형한 이들을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른다고 하며 그들을 용서했듯이”
다른 원한의 영이 맘속에 찾아 왔다가도 자연의 법칙에 좀더 가까이 간 이들의 맘을 읽고 원한을 풀고 그 영혼도 한단계 더 진화하기도 한다. 자신과 관계없는 제자들의 영적, 영보까지도 몸과 맘으로 받아서 해소시켜줌이 스승의 일이다.
그는 육체가 단지 영혼을 담는 수레이면서,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만물이 자기와 하나라는 이치를 터득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스승, 선생으로서 이러한 고통이 없고 월급만 받으면서 혓바닥만 잘 놀리고 ‘기적의 쇼’만을 하는 이들은 모두 악독한 장사꾼에 불과하다. 일반 학교에 있어서도 그들은 교사이지 선생은 아니다.
이 또한 에너지의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일부 스스로의 양심을 믿는 이들은 선, 악의 칼마들이 서로 부딪쳐 상쇄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천국과 함께 어두운 지옥의 이미지를 계속 양산해내고 그것들을 사람 맘속에 심어서 영적인 독들인 두려움을 키우게 한다.
권력화된 종교는 이것들로 사람들을 구속하고 협박하며 지금 지구의 영적발전의 최대 걸림돌들이 되게 하고 있다.
왜 이쁘지도 않은 ‘개’를 기르는가
날카로운 칼날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발끝으로 산을 오르는 경우와 같다. 세상이 흉흉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전생을 알고 싶은가?
눈앞의 벌레나 아주 미세한 실오라기 하나가 너의 근본적 전생이고 1분전, 어제가 최근의 전생이고 한 살 때가 조금 먼 전생이다. 그러나 석가도 6신통에 속해 있는 이 전생에 대해 제자들에게 진리의 근본을 흔들 수 있는 이 신통력들을 되도록 쓰지 말라고 했다. 근본인 자기의 근원을 지나쳐 말단에 치우침을 격겨한 것이다. 너는 한 살때를 기억 못한다. 그 이전의 태어나기 전은 물론이고 몇일전일도 기억못하고 있으면서 전생은 무엇할거 알려고 하는가? 어제 걱정 어제기쁨은 어제로 족하다. 내일일도 내일 생각해야하듯이.... 그래서 인도에서 공부했던 예수도 전생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고 이는 유대인의 변질된 구약 광신적 믿음이 전혀 그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세리나, 창녀가 너희 율법학자보다 더 낫다고 말했겠는가?
전생이 개였다고 말해준다면 너는 개만보면 그생각이 나서 내가 전생의 개였는데 이생에서 무슨 큰일을 할수있겠는가? 라고 한숨을 쉬면서 네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시할것이고 만일 전생이 이순신 장군이나 달마대사 였다고 말해주면 너는 자만심에 사로 잡혀 네 발전에 큰 지장을 줄 것이다. 마치 그림을 그릴 때 빨간색을 칠했다가 그것이 다른색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흰색으로 덮어버리고 다른색을 칠하듯이 전생의 잘못과 잘한일조차도 지워버리고 그 모든 기억은 맘속에 육체의 진화해가는 DNA속에 보이지 않게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의 하는일과 생각하는 수준이 곧 전생의 너이다. 완성되어가는 그림에 있어서 최종단계인 것이다. 전생의 잘못됐던 빨간색 즉, 그 시대에 무사난 검사였었고 그로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것을 기억하면 너는 무술과 법전에 관심을 가지고 전생의 실수를 거듭할수도 있다. 어제의 일이 끝났는데 오늘의 일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네 인생의 완성을 위한 여러과목이 시험이다. 그러나 네 의식이 좀더 진화되어서 전생을 알아도 별 나쁜 영향이 없을 때 ‘주’의 자연의 원리는 네 제3의 눈을 통해 그 기억들을 자연스럽게 일으켜준다. 그것들은 과거와 미래는 모두 환상인 동시에 실제이다. 그것들은 모두어제도 내일도 아닌 지금 이순간의 네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내일의 백마탄 왕자, 공주의 환상도 어제의 제왕의 기억도 지금 이순간에 너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순간에 최대한 많이 느끼고 거기에서 지혜를 찾으라. 육체의 느낌없이 인간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없다. 모든 책과 말들에서 숨겨진 진실과 거짓을 찾으라. 네 판단에 의해 네안의 우주는 환상의 나래를 편다. 어차피 이승이든 저승이든간에 모든 실제적 환상적 존재들은 물질의 존재가 없었던 아무것도 없는 우주의 칠흑같은 공간에서 왔다. 무념무상의 삼매의 잠에 들어있던 이름도 선악의 의지도 없고 육체도 없던 ‘주’의 우주적 에너지 원리에 의한 물리학적 빛의 빅뱅(Bigbang)에 의해 우주가 이루어졌기에 우주만물의 근원은 주님의 복사판인 너의 자유의지적인 마음에 근원을 둔 생각(思)이다. 생각은 곧 환상이고 환상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실제로 나타난다.(空卽是色) 어떤 진리도 네 생각의 자유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막지 않는다. 거기엔 에너지 반동법칙인 인과가 작용하기에 조심할뿐이다. 그러나 살인을 한 자만이 그 불필요함을 안다. 모든 것이 공부이다.
너에겐 형이라는 호칭도 아깝다.
누구에게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
어떤이는 사랑이라고도 한다. 남녀의 사랑, 봉사, 기도, 헌신 그 모든 것이 네속에 절대 너에 대한 봉사인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죽음의 유혹에 약해진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죽지 않는다. 죽음과 삶 사이를 출퇴근하듯이 돌고 돌뿐이다. 사람들은 1초, 1분을 한시간에 비해 짧다고 생각한다. 한시간은 하루 하루는 일년, 일년은 10년, 10년은 평생, 평생은 유회 윤회는 과학적으로는 적색외 성으로서 일생을 다하는 별들과 같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있어서 1분, 1초와 같다. 그 시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시야는 넓어진다. 좀더 크게 보라. 지금 있는 그대로 Letitbe,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라. 당신이 고민한다고 흐르는 물, 지나는 시간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천사들이 가지지 못한 인간의 육체에 의한 감성과 지혜를 극대화하여 더 많이 느끼고 경험하면서 그 느낌에 의해 네 영혼을 발전시키라. 네 느낌에 의한 지혜가 아닌것들은 반복과 교육에 의한 지식의 바이러스이다. 그것은 네 모든 것을 빛을 가장한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다. 윤회를 인정치 않는다 해도 신전에서 속죄함보다 네 이웃에 봉사함이 진정한 속죄이다. 죽음은 죽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천국을 가려는 자는 네 영혼을 인정하는 것이다. 절대신인 우주의 진화 창조의 법칙은 말이 없다. 네가 곧 신이고 부처이기에 네가 만든 것은 무엇이든 네게 너만의 진실로 다가온다. 광신자들은 그 원리를 모른다. 물론 발전을 위해 실패를 거듭하는 횟수가 다를수는 있지만, 좀더 윤회의 실패를 적게 하자는 것이다. 사실 존재란 것은 없고 선악도 없지만 그 기준 또한 지역에 따라 다를 뿐이고 그들의 수준에 따라 탁하고 맑은 기운들을 세계에 쏟아부을 뿐이며 이 모든 머리 아픈 다양한 지식의 문화 또한 그리 생각하며 그것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실지로 존재한다. 나는 살아있다’라는 잘못된 생각들이 꿈속에서조차 자신을 과잉보호하고 자기가 누구인가를 망각하게 하고 거기서 그들의 영혼은 사기꾼들의 논리에 빠지게 된다. 모든 3차원, 4차원의 존재들은 네 완성을 위한 환상의 모험세계일 뿐이다. 네속의 주님인 마음이 살아있기에 육체가 덤으로 붙어있을 뿐이다.
모든 진리는 끝과 끝에 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며 시작이고 끝이다.
선의 변 즉 끝이 없으면 사람도 지구도 그릴수 없다. 그냥 단순히 빛의 선으로 가를수도 없는 암흑일뿐이다. 그래서 선과 면을 창조하는 예술가는 ‘주’께 가장
가까운 존재중에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끝이 없다면 끝이 아닌것도 존재할수 없다. 하늘(우주)없이 지구란 관념조차 없듯이...
하나(一)님은 곧 ‘하나’로 돌아가는 원리자체로 존재하는 법신불 자연의 원리를 말한다. 우리가 삼메의 생각없는 생각(思之無思)에 이르렀을 때 잡된 지식을 떠나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를 경험할수 있다. 새들의 소리나 잡초하나에 이슬 한방울조차도 그 실체가 곧 나임을 알게된다. 이때의 기분은 육체의 감각이 사라지고 그 이전의 창조이전의 주님의 맘과 같다는 평온과 안식을 느낀다. 어떠한 생각논리도 없다. 단지 모든 것이 거울처럼 내게 비추어질 뿐이다. 이때 기적과 영적 체험을 가지기도 한다. 이 ‘하나’안에는 항상, 행복과 진리와 사랑이 있다. 이 세가지는 한 얼굴이나 작용에 있어서 서로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자기가 싸우고 헐띁던 모든 주변 현상과 악한이까지도 모두 아직 철없는 애처럼 보이고 그들을 미워함이 아닌 애처로운 사랑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원수사랑의 자비이다. 모든 지구와 우주현상들을 담을수 있는 큰그릇이 되가는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변할 수는 없다.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그냥 안타깝게 지켜볼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신성의 자유의지가 있고 거기서 배우기에....
진리가 당신의 아집 증오, 편렵된 소유 관념의 사랑과 그에 의한 고통들에서 맘과 몸을 자유롭게 하며 거기서 행복한 느낌과 함께 하는 삶을 살수도 있고 그 삶자체의 경험에서 진정한 남녀간의 사랑이나 가족만의 미적 사랑을 떠난 사랑을 경험할수 있다. 진리의 끝은 없다. 상대적 반대논리가 존재하기에 그렇게 보일뿐이다. 끝이 있다면 그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 창조류의 논리이다. 그러나 끝이 있음(유한)으로서 끝이 없음으로 가는 것이다.
‘원’에는 선의 끝이 없다. 있다면 어떤 곳이든지 집으면 그곳이 끝이 된다. 이 원리는 모든 사람의 끝은 다르지만 곧 그 자체가 같은지점이고 모두가 ‘주’의 실체란 말과 같다. 끝이 없는 맘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말과는 같다. 원리와 현상은 다르게 나타날수도 있다. 원리에 가기위해서 과정인 현상이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현상은 끝과 끝을 나누는 직선적
너나, 선악을 구별하는 관념에서 나온다. 그러나 모두가 한몸이란 것을 깨닫게 되면 오른손이 밥을 먹고 왼손이 밑을 닦아도 서로는 둘을 그 하는일에 따라 천시하지 않고 그 한몸에 있어서 두손은 독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듯이 인류에 대한 큰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좌,우의 한점한점이 곧 한몸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둘이면서 하나로 태국이면서 무주으로..,..
직선의 한쪽끝은 선, 한쪽은 악을 의미하기도 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줍잖은 지방문화의 그 시대만의 선악논리로서 모든 사람을 심판해왔다.
그러나 그 두점이 합쳐지면 두 끝이지만 결국 끝이 없고 시작도 없는 신도 생기기 이전의 우주의 원리 그 자체인 원 즉 하나의 원리자체인 님에게로 돌아감이 그대들이 태어난 목적이다. 이것은 선악의 관념과 사랑, 증오의 육체적 감각에 의한 경험없이는 이룰수가 없다. 지구상의 네 주위에서 생기는 모든 사건들은 이 하나로 가기위한 너의 본 모습인 주께서 안배해놓은 과정일뿐이다. 이미 ‘주’께서 말을 한사람만 옮아가도 한단어씩 추가되거나 빠져서 두세사람째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너, 나, 이웃과 우리집도 실은 구별을 통해 구별없는 하나로 가기위한 시험이다. 아직 지혜를 얻지못한 분별의 대표적인 예가 우주적 이론의 근거가 없이 그들이 천사, 신이라고 믿는 작은 신이 신들려서 말하는 동,서양 무당들의 말이다. 특히나 서양은 동양에 비해 이기론이나 천지이치에 있어서 전혀 무지했고 구약시대에는 성인도 의인도 아닌 랍비와 종교적 부족장들에 의한 고급,저급 각종 신 영들에 의해 혹은 각색에 의해 신들림을 거쳐서 쓰여진 고대경전들은 ‘사경’의 ‘사경’과 ‘언어의 전달’이 거듭되면서 글을 쓰는 그 사람의 그 시대의 우주를 이해하는 지식적, 과학적 수준에 맞게 각색되어 왔다. 고로 말과 글은 80%좋게 봐서 50%이상 믿을게 못된다. 50%만 참고하라. 예를 들어 “영수가 기적같이 감기가 나았데 ! ”라고 어느 제사장의 권위있는이가 전하면 다음 사람은 그 ‘권위’를 사랑하고 그 제사장과 신전의 신을 믿기에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때문에 영수가 신의 기적을 받아서 병이 나았데, 그후 셋째사람은 영수가 말기암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서 병고침의 기적을....식으로 말이다.
사람과 미움의 근원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이 논리는 창조주가 있기에 창조물이 있다는 것과도 같다. 모든 것은 변화하므로 육체는 점점 진화와 동시에 산화되어가고 영혼도 점점 고통과 기쁨을 통해 발전되어간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우리 내부에 기쁘고 슬프고 사랑하고 즐거운 감정들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 원리를 깨닫게 되면 내면에서 고요의 기쁨과 행복이 밀려온다. 기쁘다가도 문득 다시 슬픈생각이 들때 그 중간의 찰나에 고요한 무념무상을 넘어서 다른 감정상태로 넘어간다. 감정들의 터미널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중력의 법칙을 떠나 우주와 하나가 되어 하늘로도 땅속으로도 갈 수 있다. 터미널이론은 근원으로 하여 생각이전의 생각을 떠난 곳으로 갈 수 있다. 이 찰나가 깊어지고 길어지는 것이 바로 ‘삼매’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양명학은 마음이 곧 우주의 이나 (心則理)라고 하여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이 있기에 마음에 의해 생긴다고 하여 성리학의 성선설에 근본을 둔 본성이 끝 이치라는 성즉리(性則理)설을 뒤집었다. 이는 불교의 마음이 곧 부처다(心則佛)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수 있다. 불(佛)은 우주의 법칙인 비로자나불(理)와 같다. 중국, 한국에서는 인도, 동남아지방의 소승불교와 달리 수바라밀에서 ‘보시’와 ‘인욕’ 바라밀을 넣어 6바라밀을 이루었고 대중의 모든 내면에 불씨가 있다고 보았고 그들 모두는 사실 부처인 것을 인정하였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귀일론(歸一論)과 이이(이율곡)의 일원론(一原論) 즉, 모든 우주는 ‘주’ 하나(一)님에 의해 유지, 창조 됐다는 설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서양의 현실에서 거리가 먼 우습지도 않은 창조론과는 물론 차원이 다르지만 말이다.
복희와 여와의 원과 직선의 하나된 논리
고대 신화에서 천지인간을 창조한 이들은 원을 그리는 컴퍼스와 직선을 긋는 직각자를 들고 있다. 있는 그대로 그 자체의 원리는 원으로 인간과 자연을 자기의 시야에 가려 있는 그대로의 더 큰 것을 보지 못함은 직선에 비유할수 있다. 이는 동양철학의 순환론적 서양종교의 직선론적 우주관과도 흡사하다. 한때 유행어였던 ‘산은 산, 물은 물이다’의 진의가 곧 있는 그대로 보란 뜻이다. 사람들은 거기에 이름과 의미, 활용도 가격등을 붙이고 귀엽고 이쁘다고 생각하고 가치를 다진다. 그것은 연기론론적 목재, 뿌리사람의 돈등 그에게 필요한것만 볼뿐이다. 상대성이론에 의해 존재한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듯이 내가 죽어도 너는 계속 살아있다. 즉 나도 실은 죽지 않았다는 말이다. 육체가 죽은 것뿐이다. 천국이 없다면 지옥도 없다. 반대로 천국이었으면 지옥도 없고 고로 보지도 못한 놈들이 천국을 주장하는 바람에 인간의 상상력은 상대성을 지닌 지옥을 만들어냈다. 실지로 영계의 환상속에 존재하기도 하지만.... 사실‘삶을 곧 고통(苦)이라고 불가에서 말하듯 이세상이 곧 고달픈 생노병사의 현실이며 혹독한 영혼의 수련장이다. 죽어서의 지옥심판이란 윤회해서 다시 지상에서 그 ’인과‘의 법칙을 받게된다는걸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지옥의 처벌논리가 아니라 심적 육체적 수련을 위한 정진과 욕된 것을 참고 스스로를 이기는 수련이라고 볼 수 있다. 참다보면 결국 참을 것도 없고 열심히 무엇을 외우고, 매우며 정진할 것도 없어진다. 이전의 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 이전의 나는 이미 죽어서 그같은 생각도 말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맘이 바뀌면 관상도 바뀐다. 그래서 상법(相法)에서 수상, 관상...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심상‘만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심상‘이 바뀌려면 4가지 생각과 행동(4念處觀, 위빠사나 념처관)들을 관찰해야 그것의 근원인 내부의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의 의도와 마음이 혼란한지 지금 어떤 욕구가 있는지의 상태를 보고 그에 의해 무슨말을 하고 그 말들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지를 왜 그렇게 해야만 하고 그 최종결과에 대해 마치 실험실에서 연구하듯 자세히 보면된다. 거기에 선악의 판단보다 감정을 떠난 있는 그대로 느끼라, 마음을 마치 깊고 고요한 연못과 같이 하여 그 안에 자기의 내면의 얼굴을 비추기만 하념된다. 그러한 고요함을 이룬 스승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볼수도 있다. 더 이상 그에겐 우상과 숭배할신도 없고 스스로가 위대한 독생자, 하나님임을 우리 모두의 안에 재림 예수의 부처가 있음을 알게 될것이고 사탄들이 만든 지옥관념과 죽음 방편으로 쓰이는 기적의 유혹과 광신으로 부터도 자유로울수 있다. 그것들의 실체를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마치 동굴의 어둠과 같은 자신이 모르는것에 대해 신봉하고 광신한다. 그들에게 그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모든 자연의 원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거기에 개인의 감각적 가치판단이나 생각을 붙이지 마라. 그 자체가 집착으로 발전된다. 단지 전,후의 사정으로 볼 때 그 일이 인과의 법칙에 의해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라는 관찰은 할 수가 있다. 이런 관찰을 통해 지혜를 얻을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각과 주파수를 맞출줄알고 그들이 먹는 것을 먹고 그들이 즐기는 문화와 예술을 기쁜게 즐길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지상천국을 위한 첫단계이고 스스로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문제점이 있으면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고쳐나가면된다. 투사들의 투쟁이라는 것을 통한 변화도 있지만 인화(人和)를 통한 가르침도 있다. 이 두가지는 인류를 발전시키는 영웅과 성인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그 상대편엔 그 칼의 힘을 이용한 도둑과 인간들의 무지를 이용해 어두운 교리들을 만든 사이비들의 비극들도 있다. 세상의 균형은 지극히 좋은 것이 있으면 힘의 균형유지 법칙에 의해 그의 힘과 맘먹는 지극히 나쁜힘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느것이 좋고 나쁜것인지 판단할수 없다. 나는 아니지만 부분부분들이 잘못된 경전, 교과서의 책자를 통한 은유의 의미를 모르는 교사들의 교육과 반복, 메스컴과 인간의 무지를 이용한 맹신이 그들을 영적, 퇴보의 길을 걷게 만든다. 그들은 사람들이 최고라고 말하고 종교적 책들이 최고라고 떠드는 그것에 대해 가치판단할만한 지식과 지혜가 없고 죽음과 윤회의 정체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착해진다고 하난 실은 그렇지 않다. 돈과 명예, 감정에 쌓여 바쁘게 살던이가 어느새 나이가 들어 죽음의 두려움에 나약해지고 제정신을 잃는 것뿐이다. 자기가 옮다고 주장하던 것이 체계적으로 희미했기 때문이고 죽을때도 남들이 선한 일이라고 말하는 봉사, 기부, 헌금의 형식으로 남들의 삶을 살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