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타 주도층 인사들의 참여 양상
조찬용
|2006.08.24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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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타 주도층 인사들의 참여 양상
(1728년 무신사태 고찰, 2003년, '아이올리브'에서 발간)
이호(李河) 정세윤 임서호 등 여타 주도층 인사들은 주로 호남토호층(湖南土豪層)과 부안 변산 노비적 정팔용(鄭八龍, 무신 기병 때 제1청룡대장) 및 김단(金檀)과 접촉하고 있었다. 이호는 호남의 명문거족인 나만치(羅晩致)를 통해서 나주의 나숭대(羅崇大)에게 태인현감 박필현(제2청룡대장), 평안병사 이사성의 거사계획을 알리고 이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또한 한의사(韓醫師)인 임서호(任瑞虎)와 정인지 후손인 정세윤(제6청룡대장)은 부안(扶安)의 정팔용 성득하(成得夏) 김수종(金守宗)의 동병(動兵)을 약속 받았다.
한편, 금영(禁營)의 조총(鳥銃)을 감색(監色, 監官과 色吏)을 통해 은밀하게 매입(潛買)하여 근기록림당(近畿綠林黨, 近畿戊申黨)의 무장화를 도모하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의 임지(任地)를 방문하여 군사모집을 위한 군자금(軍資金)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平兵 이사성은 한세홍(韓世弘) 임서호(任瑞虎) 심성연(沈成衍) 양명하(梁命夏)의 안주왕래(安州往來)를 통해 경중(京中) 및 근기세력(近畿勢力)과 지속적인 연결을 유지하면서 철차제조(鐵車製造)를 의논하여 전력의 우세를 꾀하기도 하였고, 평병소관(平兵所管)의 수미군(收米軍)을 정병(精兵)으로 전환하며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평안도 병영(兵營)의 조건을 최대한 활용코자 하였다.
또한 의금부도사를 지내다 좌천되어 태인현감으로 부임하고 있던 반남朴氏인 박필현(대사성 박동열의 현손), 現 전북 고창지방인 무장(茂長)에 유배되어 있던 재종형인 前 도승지 박필몽, 전주 우거(寓居)지역의 박사관(朴師寬: 朴弼夢 아들), 그리고 경종임금의 처남으로 담양부사에 재직 중이던 심유현(경종임금 즉위 전에 사망한 妃 端懿王后(1686~1718)의 동생) 등은 호남기병을 모색하였다. 특히, 박필현의 6대(7세)조인 박소(朴紹, 1493~1534, 정언, 지평, 사간)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훈구파를 탄핵하다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고 외가(外家)인 파평尹氏들의 집성촌인 現 합천 묘산 화양리로 이거(移居)한 명문가였다. 묘산 화양리는 曺聖佐의 고향인 묘산 도옥리와는 바로 인접한 곳이라는 사실에서 박필현과 조성좌 문중사이에는 교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많다 하겠다.
이들은 관군중심의 거사를 추진키로 결정하고 호남지방의 사대부 및 토호층과의 접촉을 통해 사실(事實)의 국중 유포(國中 流布) 및 괘서 사건을 추진하고, 한편으로 관군의 군사훈련 및 화약수출을 실현하게 된다. 이 때 접촉한 사대부 및 토호는 부안의 김수종, 고부(古阜: 現 정읍지역)의 송하(宋賀, 승려 출신으로 연곡사 승려 大有와 연계), 순창의 양익태(梁益泰) 등이었다. 특히 金守宗은 당시 하동지사(地師: 지관)인 이명근(李命根)을 매개로 하여 하동과 순천지방의 사대부 및 토호들과 연결을 가졌고 진주(晋州)의 거부(巨富)인 이덕일(李德一)과도 통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무신사태의 주도층은 경중(京中) 즉 서울, 근기(近畿) 즉 경기 및 황해도, 호서(湖西) 즉 충청도, 영남 즉 경상도, 호남 즉 전라도, 평안도, 함경도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지방에서의 거사강행의 움직임은 한세홍(韓世鴻)을 통해서 경중(京中) 주도층에게 전달되었으며, 경중 주도층도 모군(募軍)․모자(募資)의 실천에 들어갔다. 경중에서는 동원대상을 가동(家潼), 노속(奴屬), 전장(田莊)의 농민, 즉 전민(田民)으로 하고 「재경인역각출백여명(在京人亦各出百餘名)」하기로 모군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능한 범위가 창산군(昌山君)의 가동(家僮), 경기도 포천 사람인 양명하(梁命夏) 등의 노속, 이하(李河: 영의정인 조암 이시백의 증손)의 여산(礪山)농장의 田民정도였기 때문에 모군은 계획대로 진행되지를 않았다. 그리고 李河는 달아난 농민들을 지방관리에게 청탁할 정도로 이 계층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무신사태 실패 후 이유익(李有翼: 父는 1701년 신미옥사 때 장희빈 사사를 극력 반대한 전주李氏인 지평 李命世임)이, “오제(吾濟)는 빈한(貧寒)한데 남인(南人)은 부자가 많으니 군사를 모병토록 민관효(閔觀孝)를 설득하여 상여꾼을 매수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라고 공술한 바와 같이, 결과적으로 경중(京中)은 모병 및 수취(收聚)에 어려움이 있었다. 주도층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던 포도대장 남태징과ꡐ밀풍군 이탄’의 4촌인 금군별장(禁軍別將) 이사주(李思周)의 관군동원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사실은 경중 주도층의 여의치 못한 세력기반과 관련이 있었다. 이유익은, "성인(聖人)이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임꺽정(林巨正)이 되겠다"라고 얘기한 것으로 보아 백성들의 의적희구(義賊希求) 분위기에 무신거사를 연계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경중(京中) 주도층의 현실적 세력의 취약성 및 실천의지의 미약함 등으로 인하여 이인좌 등 지방세력과의 마찰도 두드려졌다. 경중 주도층은 그 취약성을 극복하고 거사(擧事)를 완결짓기 위해서 세가지 방향을 취하고 있었다.
첫째, 도성(都城)의 민심동요를 위한 조치의 하나로써 경종이 노론에 의해 살해되었다는「주상행시역(主上行弑逆)」의 괘서(掛書)를 종루(鐘樓)와 서소문(西小門)에 살포하였다. 이는 과천(果川)의 이익관(李益觀)이 민관효의 지휘를 받은 것이었다. 이와 함께 모득(募得)한 장사(壯士)를 잠복시켜 이광좌(李光佐)와 이삼(李森) 등 소론의 온건파인 완소(緩少)대신과 포도대장 등 무장(武將)을 제거하여 행정과 군사기구의 기능을 마비시키고자 하였다.
둘째는, 여주 및 이천의 모군을 서두르며 여주 후포(後浦)의 신윤조(辛胤祖)를 포섭, 그의 집 하인 70여명을 내응(內應)에 활용코자 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수언(南壽彦)이 거사에 협조하리라고 기대하고 그의 관군을 동원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남수언의 정치경력 및 인척관계에서 도출한 의견이며 신윤조 등의 포섭을 위한 선전에 그쳤다.
마지막으로, 現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출생의 평안도관찰사 겸 병사 이사성(李思晟)의 급부(急赴)를 종용하는 것이었다. 양성(陽城) 및 진위(振威)의 모군(募軍)이 진행되고 있을 때인 3월 6일 한세홍이 평안병영(平安兵營)을 서둘러 떠난 것은 경중 세력의 취약성 및 경중 세력과의 거사에서 평병의 비중을 말해 준다. 그런데 경중, 즉 서울에서의 이러한 방향으로 활동재개는 4월 내응(內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즉 이유익(李有翼)의 공술(供述)에, “경상도의 기병은 3월 27일로 택일(擇日)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인좌(註: 이현좌(李玄佐)라고도 함)가 내게 보낸 글에는 호남 기병(湖南 起兵)도 대체로 행하여 질 것이라고 하였고, 내응(內應)은 4월에 하고자 하였는데 4월 내응의 거사는 각자 인부(人夫)를 100여명씩 차출하여 거병(擧兵)코자 한 것이었는데, 이사성은 그 때 근왕병(勤王兵: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을 칭(稱)하고 상경(上京)하려는 계획이었다” 라고 한 것에서, 서울 즉 경중의 4월 내응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유익(李有翼: 총융사 김중기의 사돈)은 영남 및 호남 기병을 3월 27일경으로 알고 있었다고 공술하였으나, 이인좌는 공술에서, “당초에 기일(期日)은 3월 10일이었는데 소식이 없어서 나는 응병(應兵)이 당도하여 15일 거병(擧兵)하였다”라고 한 점과, “초두(初頭) 3월 및 4월에는 반드시 실패할 것인데, 그 후 다시 기병하면 이는 동우(東隅)에서 잃고 상유(桑楡)에서 걷는 것이 될 것” 이라 하는 예천(醴泉)의 이윤행(李允幸) 점괘가 경중(京中) 주도층의 계획을 변경시켰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경중 주도층의 4월 내응은 이인좌와 정세윤의 호서(湖西) 및 호남(湖南) 기병(起兵)과 일정한 시차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월 중순의 기병을 알고 있으면서도 4월 내응(內應)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유익과 임환(任還) 등이, “호병(湖兵) 즉 전라도, 충청도 병사가 기병하여 보름이 되기 전에 일어나면 관효배(觀孝輩)가 이천 및 여주 군사(軍士)를 이끌고 중간에서 일어나고, 이 때 성중(城中)이 소란해진 틈을 타서 이유익 남태징 등이 성중을 점거하면 쉽게 될 것” 이라고 이유익의 거사 계획을 공술(供述)한 점으로 볼 때, 湖南, 湖西, 嶺南 起兵을 이용한 이중거사를 추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京中의 동향과 平兵 이사성(李思晟)의 가을 거병설(擧兵說) 등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3월 초순 안성군(安城群) 및 양성현(陽城縣)의 취군(聚軍)은 결행되었다. 이 때의 규모는 대략, 최경우 집에 100여명, 권서린(權瑞麟) 집에 150여명, 평택사람 박파총(朴把摠) 마을에 50여명, 유상택(柳尙澤) 집에 50여명 등 총 300여명으로 양반 및 마병(馬兵)은 각 50여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 취병(聚兵)은 즉각적 군사행동을 위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정희량 조성좌의 영병(嶺兵)과 정팔용, 박필현, 僧 대유 등 호남군(湖南軍)이 도래하기를 기다려 합세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 거사군의 제2청룡대장인 정세윤과, 그리고 원만주(元萬周) 등은 부안에서 김수종(金守宗) 성득하(成得夏)와 전라병영의 탈취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安東 풍천으로는 이웅좌(이인좌의 동생) 조세추(曺世樞: 조세추의 조부인 조하주(曺夏疇)의 고모부가 인조임금의 친동생인 경창군 이주(李珘)임) 등이 파견되었다. 그러던 중 양성 안성 등지에서 거병 준비를 완료한 이인좌와 근기(近畿), 즉 경기 및 황해도 지방의 주도층은 각처의 고발 징후에 따라 군사를 현재의 평택 소사(素沙) 지역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곧 영병(嶺兵) 및 호남군(湖南軍)과의 연계를 위해 이인좌 신천영 등은 충청도 청주성 점거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청주에서는 소위 이인좌란을 신천영란(申天永亂)이라고 한다. 당색이 남인(南人)인 신천영은 고령申氏로 신숙주(申叔舟: 영의정)의 11세(10대)손이다. 신천영의 5대조부인 용졸재 신식(用拙齋 申湜, 1551~1623)은 형조참판, 대제학,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申湜의 외손자는 김상(金鋿: 장령 역임)으로 김상은 曺聖佐의 외증조부이며, 申湜의 외증손자가 경신환국(1680년) 때 사사된 남인의 거두인 우찬성 백호 윤휴(白湖 尹鑴: 백호의 이모부가 曺聖佐의 고조부인 조정립임)이고, 申湜의 외손녀가 소현세자의 빈(嬪)인 姜氏이며, 申湜의 외손서가 갑술환국(1694년) 때 삭탈관직된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이다. 또한 신천영의 祖父는 기사환국(1689년) 때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을 탄핵한「반송시열소두(反宋時烈疎頭)」인 신경제(申慶濟: 우윤, 무신사태 후 처형됨)이다.
신천영과 같은 문중인 단재 신채호의 5대조 신두모도 무신기병에 참여하여 화(禍)를 입었고, 단재 신채호가 조선 역사상 중요한 사건과 인물로「묘청의 난」과「정인홍」을 거론한 것은 무신사태로 풍비박산이 된 단재 가문의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천영은 청주목(現 청원군 낭성면)에 거주하면서, 그 당시 청주지방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청주 등 지방상권과 서울 시전상권과의 갈등이 무신사태가 발발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이는 거사군이 최초로 점령한 지역이 삼남물화의 집산지인 안성과 영동물화의 집산지인 죽산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무신사태의 주도세력은 향촌의 몰락한 선비와 그 당시의 지배이념과 이해를 달리하는 신천영(申天永) 등과 같은 계층이 주도하였으며, 실제 군병(軍兵)으로 참가한 계층은 군역(軍役)과 조세의 폐단에 시달리던 소농이나 양민층과 하층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