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기
참고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준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 판사 이재구-
Any time은 2시간? Any time은 '곧, 즉시, 언제든지'라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 민족은 항상 서두르는 것에 익숙해 있다. 미국인들을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한국말을 아는지 물어보면 아는 단어들 중 꼭 나오는 것이 '빨리 빨리'이다. 나도 물론 이러한 일상 생활에 익숙해 있음은 물론이다. 누군가 '곧' 온다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몇 분, 아니 몇 시간 후라고 생각할까?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인 옐로스톤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간헐천(Geyser)이 분포되어 있다. 전세계에 있는 6-700개 중 4-500개가 그 곳에 분포되어 있다. 가이저가 온천과 다른 것은 수증기와 뜨거운 온천물을 화산이 폭발하듯 주기적으로 분출시킨다는 것이다. 옐로스톤에 있는 가이저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올드 페이스풀(Old Faithful)이다. 보통의 가이저는 분출주기를 예측할 수 없고 분출량도 할 때마다 다르지만 가장 변함없이 예측가능하게 솟아오르면서도 그 규모가 거의 40m에 이르는 등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올드 페이스풀에는 이를 보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통나무 건물 가운데 하나인 100년이 넘은 여관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묵으려면 6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볼만한 가이저가 공원의 서쪽에 위치한 노리스 지역에 있다. 바로 이카이너스(Echinus) 가이저이다.
지난 해 5.경 미국연수 기간을 끝낼 무렵 가족들과 함께 미국의 옐로 스톤 국립공원을 여행한 적이 있다. 이카이너스 가이저는 Norris Geyser Basin 지역에 있다. 이곳은 곳곳에서 하얀 수증기가 솟아오르거나 뜨거운 온천이 분출하여 흐르고 있는 곳이다. 우리 나라에 이런 온천지역이 있었다면 전 지역이 온천으로 개발되었을 것이지만 미국 사람들은 온천욕에 관심이 없어 분출하는 뜨거운 물들이 그대로 지표면을 따라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걸어서 약 1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관람코스(Trail)를 따라 걸어가다가 Echinus라는 이름의 가이저가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 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커다란 분화구 같은 곳에 짙은 푸른 색의 물이 차오르면서 많은 수증기를 발산하고 있었고, 표면의 곳곳이 끓는 물처럼 거품을 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니 어떤 중년의 남자가 곧(any time) 분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아 있는 일행은 한 시간 전에 왔을 때도 any time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었으니 정말로 곧(any time) 분출할 것이라고 했다. 옆의 안내문을 보니 1시간에서 75분 간격으로 분출을 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분출 전과 분출 후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분출 직후의 사진은 물이 분화구 안쪽으로 쪽 빨려 들어가서 물이 차지 않은 검붉은 색의 흉측한 모습이었는데 이것을 보면 바로 분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후 1시간 정도 물이 차 오르고 서서히 물이 끓기 시작하다가 심하게 끓으면 분출 직전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갔을 때에는 가운데 부분에 거품이 일고 있었으므로 분출 직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계속 30분을 기다려도 상황이 변하지 않고 거품이 이는 곳이 약간 늘어나고 수위가 조금씩 더 차오르는 것 이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아이들이 장기간의 여행으로 피곤해 하고 처도 다리가 아프다면서 주차장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도 화장실 가는 것이 급해져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냥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 날 밤은 북쪽 약 20km 정도에 있는 맘모스 핫 스프링 지역의 공원 내에 있는 숙소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은 다시 남쪽 약 40km 지역에 위치한 곳의 옐로스톤 호수(West Thumb 지역)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폭설로 인해 동쪽의 애스번 산을 통해 내려가는 길이 막혀 노리스 지역으로 우회하게 되었다(그 곳은 5월 말까지도 눈이 내린다). 나는 처와 아이들에게 오전 시간을 할애하여 이카이너스 가이저를 보러가자고 했다. 우리는 급할 게 없었고, 가이저의 분출주기가 1시간에서 75분이므로 길어야 2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천천히 이동하였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이 거의 차 올라 있었다. 기다리던 사람 중 한 명이 곧(any time) 분출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전날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1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정말 1시간을 거의 기다렸는데도 분출이 되지 않고 수증기만 하얗게 올라오고 물의 완전히 차 올라서 넘쳐 흘러 나가는 것 이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중간에 기다리다가 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딸애와 한 살 터울의 아들이 왜 이리 오래 기다려야 하느냐고 하면서 돌아가자고 투정을 부리기 시작하더니 서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하였다. 주위 다른 사람들이 민망하기도 하고 잠깐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랴 하는 생각에 딸을 데리고 약 300미터 쯤 떨어진 빅센 가이저를 보여 주러 갔다. 빅센 가이저는 아주 조그마한 가이저로서 주기가 10분 정도라서 물이 3-4미터 솟아오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고, 물이 분출하다가 멈추면 조그만 구멍 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새끼 가이저로서 손색이 없었다. 다시 이카이너스 가이저로 돌아가는데 하얀 수증기로 가득한 곳을 뚫고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급히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분출은 끝나고 거의 비어 버린 검붉은 분화구만이 커다란 입을 벌린 채 뿌연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딸에게 'you just missed it'하면서 약을 올린다. 딸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처에게 어땠느냐고 물으니 정말로 멋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분출할 때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딸은 더욱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었다.
이카이너스는 물속에서 솟아오르는 Fountain Type의 가이저이다. 연못 속의 물이 파도처럼 밀려나오면서 울컥 울컥 솟구치는 모습이 과히 상상이 되었다. 나도 2번이나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제도 못 보았는데 오늘 또 못보다니. 이미 오전을 이곳에서 다 보냈고 아직도 볼 것은 많은데 어떻게 할 것인지 망설여졌다. 딸은 꼭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울먹였다.
그래서 얼마나 있어야 다시 분출할지 알 수 없지만 혹시 모르니 약 30분 주위를 돌아보면서 상황을 보기로 했다. 그 옆에는 puff and sniff라는 재미있는 곳도 있고 green dragon이라는 가이저도 있다. 이러한 가이저는 분출은 하지 않고 가스와 수증기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내뿜기도 하고 물을 튀기기도 한다.
다시 30분 있다가 돌아가 보니 아직 물이 다 차오르지도 않았다. 직전 분출의 한시간 전보다도 훨씬 양이 적게 차올라 있었다. 실망한 딸을 데리고 다시 주차장으로 갔다. 이미 점심때가 되어 간단히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어떻게 할지 정하기로 했는데 딸과 나는 무조건 다시 보아야 한다고 했고 처와 아들도 다시 보러가는데 찬성하였다.
딸은 아예 책을 준비하여 가지고 갔다. 우리 가족은 두꺼운 옷을 걸치고 가이저 주변에 설치된 관람석 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아서 비장한 각오로 기다렸다. 딸은 책을 읽었고 나도 가이저에 대한 안내 책자를 읽었다. 이곳의 비지터 센터에서 산 가이저에 관한 책에 의하면 이카이너스의 분출 주기는 1시간에서 4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가이저 앞에 설치된 안내판이 75분으로 적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1시간 반이 지나도 솟아오르지 않으면 기다리다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우리 가족은 무조건 끝까지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으므로 별로 조바심은 나지 않았다. 옆에 앉은 미국인 모녀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 우리 가족이 3번이나 온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30분쯤 지나자 물이 제법 차 올랐다. 분화구 주변의 모든 돌들은 가이저의 산(酸) 성분에 의하여 검붉은 불가사리처럼 오톨도톨했는데 물이 차오르는 것은 돌들이 잠겨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시간쯤 지나니 많은 돌들이 잠기면서 물이 꽉 차올랐고 넘쳐 흘러가기 시작했다. 오전에 우리가 갔을 때의 상황과 비슷한 정도였다. 약 30분이 지나자 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출을 지켜본 처의 말에 의하면 솟아오르기 전에 심하게 끓는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 갑자기 분출을 시작한다고 했고, 가운에 말고 다른 부위에서도 끓어오르다가 갑자기 솟아오른다고 했다. 어쨌든 우리는 끝까지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으니 조바심은 없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또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려고 했다. 이들은 우리보다도 먼저 와서 기다리던 사람들이니 약 1시간 30분 이상은 족히 기다린 사람들이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 any time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막 가이저를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분출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분출의 시작을 외치면서 그들을 불렀다. 옆에 앉은 모녀는 가이저가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터지는 것이고, 이들이 떠나는 시점이 바로 분출하는 때라고 하면서 흥분하였다. 약 10분 정도 감격적인 분출을 보았다. 사진을 찍었지만 분출할 때 생기는 엄청난 수증기가 심하게 날라오곤 했다. 울컥하고 약 5미터에서 10미터 정도 솟아오르면 잠시 후 그 파장으로 연못의 주변에 파도가 치듯이 물결이 밀려나온다. 정말 장관이었다. 조그맣게 솟아올라서 끝났나 싶었는데 다시 크게 올라왔다. 처와 아들이 본 직전의 것에 비하여 훨씬 오래 지속되고 분출량도 많았다고 했다. 분출이 많아지면 지하의 다른 온천 저장소를 자극하면서 더 많은 양의 분출을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카이너스 가이저는 옐로스톤의 역사만큼이나 그 특성이나 분출량이 변해왔다. 레몬 쥬스 정도의 신맛을 띠는데 이러한 산성의 물이 가이저 주변의 주변 돌의 색과 모양을 섬게와 같은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가이저는 곧게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고 모든 방향으로 튀어 오르고, 주변의 벤치가 가이저에 아주 가깝게 설치되어 있어서 물이 사람들에게까지 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공중에서 식은 물이라서 화상을 입을 염려는 없고 산성의 정도는 사람에 위험한 정도는 아니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다만, 카메라나 안경의 렌즈에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길 수 있다.
모든 가이저들은 지진이나 해와 달의 인력 등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즉 각본대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고 시시 각각으로 분출장소나 시간, 정도가 달라진다. 처도 다시 보기를 잘했다고 했고, 딸과 아들은 손을 마주치면서 좋아했다. 옆에 있던 모녀가 아이들에게 좋은 교훈(Good Lesson)이 될 것이라고 했다.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아이들에겐 결코 보여주지 않는 자연의 섭리를 느끼게 해 준 것이기 때문이란다.
가이저는 그냥 아무 때나 분출해 주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지구의 저 아래쪽에서 꿈틀거리는 작용을 느끼게 해주면서도 또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가족은 그 날 이후 자연을 보는 눈이나 마음 자세를 바꾸게 되었다. 옐로스톤을 떠나는 날까지 이카이너스에 매료된 마음은 계속되었고, 아이들도 그날이 제일 재미있었다고 했다. 옐로스톤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을 만났고, 그랜드 캐년 지역과 폭포도 둘러 보았지만 이카이너스에서 오랜 기다림 뒤에 가졌던 감동에 비하면 그리 크지 못했다.
(http://www.gigagraphica.com/geyser/echinus/echinus_m1.html에 9초간의 짧은 분출장면을 볼 수 있다. 아래의 파도같이 밀려나오는 부분과 땅속 깊은 곳에서 밀어내는 울컥거리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상상하면서 감상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