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 사유 : 시간성, 내어나름, 존재 사건 1. 머리말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의 근거인 "시간성(Zeitlichkeit)"의 시간과 "내어나름(Austrag)",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이자 존재와 시간을 하나로 묶는 "존재 사건(Ereignis)"은 하나의 동일한 물음만이 끊임없이 물어진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에서 그때그때 사유된 존재의 사태들이다. 그 '하나의 동일한 물음'은 존재는 어디로부터 어떻게 열어 밝혀지는가, 존재는 어디로부터 어떻게 그의 고유함인 진리로서 머무는가를, 즉 존재 진리의 지평과 방식을 묻는 "존재의 의미" 또는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이다. 이 글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 속에 숙고된 위의 세 가지 사태들이 상이함 속에서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찾으려 시도하는 글이다. 이러한 우리의 의도는 "시간성"과 더불어 "차이"의 근거로 사유된 "내어나름"이란 시간의 "사유되지 않은 본질"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와 함께 "존재 사건"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시도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다음의 예비적인 논의를 통해 이 글의 의도는 명확해질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근본 특성(WdW, 201)", "본성(das Wesende)" (WiM, 17), 즉 존재로서의 존재를 "열어 밝혀짐", "감춰져 있음으로부터 밝게 드러남", "환히 자신을 밝히며 우리 가까이에 머묾", "탈은폐", 그렇게 숨김과 감춤 없이 밝게 드러나 있다는 뜻으로 "진리"로 사유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 근거인 어떤 무엇임으로서의 존재, 말하자면 명사적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은폐와 어둠, 즉 비진리로부터 비은폐와 밝음에로 열어 밝혀지는 일어남, 사건으로, 말하자면 동사적 존재로 이해돼야 한다. 그러한 진리가 존재가 존재로서 있는(본재하는), 다시 말해 존재가 "비은폐된 존재 자체"(WiM, 18)로 밝혀지는 영역이란 의미로 존재의 의미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진리"는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참조 WiM, 18). 하이데거는 그러한 진리, 탈은폐가 서구 시원의 그리스인들이 "Anwesen"이란 말로 이해하고 있는 존재의 본래적 의미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wesen"은 "머물다", "체류하다", "존속하다"란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접두어 "an"은 단순히 대상이 우리에게 접근한다는 뜻이 아니라 은폐와 어둠으로부터 우리에게로 환하게 드러남이란 의미에서의 '가까움'이다. 따라서 'Anwesen'의 존재란 자신을 환하게 밝히며 우리들 자신인 인간을 향하여 가까이에 머무는 머묾, 즉 탈은폐 혹은 진리다. 이처럼 존재가 본재하는 사태가 혹은 존재의 고유함이 진리이기에, 존재는 그 어떤 존재자와도 차이가 난다. 존재는 "존재가가 아님(das Nicht-Seiende)"(WiM, 45)이다. 그러나 존재자의 편에서 보면, 존재자는 그렇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의미, 다른 방식, 즉 진리로 있는 존재 덕분에 비로소 "오히려 무가 아닌"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컨대 산과 한 채의 집은 존재 진리의 환한 밝음 안에서, 그것을 통해, 각기 산과 집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존재자와 관련해서 "존재하게 함"인 존재는, 마치 공간의 개방된 여지가 모든 가깝고 먼 사물들을 능가하듯이,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는 "단적으로 초월적인 것(das transcendens schlechthin)"(SZ, 38)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어디서나 한 존재자의 존재로서 존재자에 속한다. 존재자가 존재 덕분에 존재하는 "존재의 존재자"이듯,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속하는 "존재자의 존재"다. 말하자면 존재는 그의 진리에서, 혹은 모든 존재자를 능가하는 초월에서 언제나 다만 존재자의 존재라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에게 속하는 "함께 속함", 즉 존재는 자신을 환히 열어 밝히고, 존재자는 그 밝음 안에 들어서서 하나의 존재자로 존재함으로써 하나를 이루는 "함께 속함"이 차이의 사태라고 말한다. 따라서 차이에서 물어져야 할 차이의 근거란 곧 두 상이한 존재와 존재자를 동시에 "하나로 묶는 것",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단일하게 하는 것"인 차이의 근거를 "시간성"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내어나름"으로 사유한다. 이렇게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차이로 있는 존재는 인간과 관련해서는 동일성으로 있다. 존재는, 마치 빽빽한 숲 속에 빛이 들기 위해서는 빈터를 필요로 하듯, 자신의 환한 열어 밝힘을 위해 그 개현의 장소를 필요로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밝게 드러나는 그 진리의 장소를 인간의 사유함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렇게 존재를 사유하는 존재 사유는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자신의 사유함을 통해 존재가 열어 밝혀진 진리로 있도록 하는데 인간의 본질, 그의 고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h ten) "존재의 목자(Hirt)" ( H, 19, 29)다. 그 같은 방식으로 존재의 열어 밝혀짐, 존재의 진리에 대해, 다르게 말하면 존재와 인간의 관련에 대해 사유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특성을 빛의 비유 안에서 서구 전통의 형이상학과 대조해 말하면,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의 빛과 그 빛의 원천인 해(최고 존재자, 神的인 존재자를 가리키는)의 관련이 핵심 주제를 이루는 반면, 하이데거에게서는 빛 자체와 그 빛이 밝게 비추는 장소와 방식(인간, 인간의 사유함)이 중심 문제라고 하겠다. 존재의 필요로부터 인간은 존재를 사유하면서 존재를 향해 자신을 바치고 존재는 그 사유함에 열어 밝혀짐으로써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하며, 나아가 그렇게 동일한 존재 진리에서, 그것을 통해, 함께 속한다는 의미로 동일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을 "존재 사건"이라고 부른다.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함"에서 서로의 고유함으로, 즉 존재는 ≫인간을 향해≪ 열어 밝혀진 진리로 인간은 ≫존재를 향해≪ 자신을 바치는 "존재의 목자"로 있기에, "존재 사건"은 존재와 인간을 고유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하이데거는 또 다른 곳에서 "존재 사건"을 존재와 시간을 서로 향하게 하고 둘의 관련을 견지하는 사태로 사유한다. 이러한 간략한 예비적인 논의를 통해 존재의 진리란 존재가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차이로, 인간과 관련해서는 동일성으로 있는 사태로 밝혀지고 있다. 말하자면 밝게 드러난 진리로서의 존재는 그 밝음 안에서 존재자를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하게 함"으로서 "모든 존재자보다 멀리 있지만", 우리에게로 환히 열어 밝혀짐으로써 "어떤 존재자보다 인간 가까이 있다"( H, 19). 존재가 열어 밝혀지는 존재의 진리가 이처럼 동일성과 차이가 하나로 속하는 진리 사태라는 점을 앞서 파악하면서 우리의 논의를 이끌 물음들로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제시한다. i) "시간성"과 함께 차이의 근거로 사유된 "내어나름"은 시간의 본질로 이해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내어나름"은 "시간성"으로 불려진 시간의 또 다른 이름인가? ii) "내어나름"과 "존재 사건"은 어떤 관련 안에 놓여 있는가? 이 두 가지 물음은 다음의 하나의 물음으로 불러 모여진다 : 그리하여 "내어나름"은 시간의 고유함으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와 함께 "존재 사건"에 속하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의 진행을 통해 이 물음들에 해명하기를 시도할 것이다 : 2. 차이와 시간성, 3. 차이와 내어나름, 4.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 5. 존재 사건에 속하는 시간-공간과 내어나름, 6. 맺음말. 2. 차이와 시간성 앞서 언급한 대로 존재는 인간의 사유함 또는 존재 이해 안에 열어 밝혀진 진리의 존재며 존재자는 존재의 그 열어 밝혀짐의 빛 안에서, 그를 통해, 비로소 존재자로서 드러난다. 존재자의 드러남에는 그것의 근거로서 존재의 열어 밝혀짐이 전제돼 있다. "존재의 비은폐는 언제나, 그 존재자가 현실적이든 그렇지 않든, 존재자의 존재의 진리다. 거꾸로 존재자의 비은폐에는 그때마다 이미 그 존재자의 존재의 비은폐가 놓여 있다" (WG, 15). 존재자와 그것의 전적인 타자인 존재 사이의 차이의 사태는, 이렇듯 존재자는 존재의 열어 밝혀짐에서 비로소 존재자로서 드러나는 동시에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로서 존재자에 속함으로써, 존재자와 존재가 단일함을 이루는 "함께 속함"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의 초기 사유에서는 존재론의 기초 놓기란 관심 아래 이러한 차이의 사태보다는 열어 밝혀진 존재와 드러난 존재자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우선적으로 사유되고 있다("존재론적 차이"). 이와 함께 차이는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 맺는(존재자를 드러내는), 인간 현존재의 초월에서 수행되는 "구별(Unterschied, Unterscheidung)"로 이해된다. 즉 차이는 존재 이해 안에 열어 밝혀진 존재와 그 존재 이해의 빛을 바탕으로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에서 드러난 존재자 사이의 "구별"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구별"은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 맺는 단일함 속에서의 그것으로서, 여기에는 이미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함께 속함"이 명확하게 사유되지는 않았지만 사유돼야 할 것으로 간직돼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의 직접적 단일함"(GP, 454), 그 둘의 "함께 속함"(GP, 466)으로 표현하는, 초월에 속하는 그러한 "구별"은 인간 현존재와 함께 개시된다. 왜냐 하면 인간 현존재는 바로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 맺는 초월을 자신의 "특출난 점"(WG, 15), "근본 구성 틀"(WG, 18)로 갖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월 안에 초월로서"(WG, 19) 존재하는 인간 현존재는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을 수행하며 존재하는 존재자다.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은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갖고 있으며 실존에 속해 있다"(GP, 454). 이렇게 보면 존재와 존재자 사이를 단일함 속에서 구별짓는 수행으로서의 차이는 그 근거를 인간 현존재의 초월에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성 틀"인 초월은 아직 그러한 차이의 충분한 근거가 아니다. 아직 더 소급해 들어가야 할 그것의 근거가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를 이해하고 존재자와 관계 맺는 인간 현존재의 초월은 어디로부터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밝혀진 사실을 실마리로 삼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차이의 근거를 앞서 규정해볼 수 있다.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이 하나로 함께 속한다면, 또는 그것이 각기 적중하는 열어 밝혀진 존재와 그 존재 진리의 빛 안에서 비로소 존재자로 드러난 존재자가 함께 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둘 사이의 어떤 특정한 '사이에(das Zwischen)' 혹은 그 둘을 하나로 묶는 '와'의 영역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사이에' 또는 '와'로부터, 그것을 중심으로, 초월이 그리고 그 초월 위에서 (열어 밝혀진) 존재와 (드러난) 존재자를 단일함 속에서 구별하는 차이가 수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이에'의 영역과 그것을 개방하는 것은 각기 차이가 전개되는 영역과 차이의 근거를 이룰 것이다. 이 경우 차이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이렇게 바뀐다 :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 사이의 "사이에"란 어떤 영역이며, 그 영역을 열고 그리로부터 둘을 단일하게 함께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 맺는, 인간 현존재의 초월은 그가 "근원적인 시간"(GP, 362)이라고 부른 "시간성"으로부터 가능하다. "시간성"의 시간은 간직함(旣在, Gewesenheit, Gewesen), 기대함(미래), 현재화함(현재)의 근원적인 단일함이다. 하이데거는 곧 간직함, 기대함, 현재화함의 단일함, 다시 말해 '간직하며 기대하는 현재화함'이 존재자와의 모든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구와 같은 존재자의 경우를 보자. 하나의 도구를 이 도구로서 규정하는 도구 성격은 "무엇 하는 데에", "무엇을 위해"란 그것의 "사용 사태(Bewandtnis)"(GP, 415)에 의해 구성된다. "사용 사태"가 하나의 도구 존재자가 그러한 존재자로서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지(Was- und Wie-sein)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용 사태"를 앞서 이해하는 "사용케 함(Bewendenlassen)", 곧 어떤 용도를 기대함인 "무엇 하는 데에 사용케 함" 속에서 ― 말하자면 "사용케 함"이 주는 "빛의 밝음"(GP, 416) 속에서 ― 도구와 같은 어떤 것과 만난다. 그러나 이 "무엇 하는 데에 사용케 함"은 언제나 동시에 "어떤 것을 가지고 사용케 함"이다. 도구와 같은 존재자를 사용하는 우리의 관계 맺음은 그와 같은 "어떤 것을 가지고 무엇 하는 데에 사용케 함"(참조 GP, 415), 즉 도구가 그러한 도구로서 현재화되는 ('∼을 가지고'를) 간직하며 ('∼하는 데에'를) 기대함으로부터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망치는 "그것을 가지고 망치질하는 데에 사용케 함" 속에서 이러저러한 무차별한 망치가 아니라 이 특정한 망치로서 현재화된다. 즉 이 특정한 망치로서의 망치와 만나는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시간성"으로 이해하는 간직함, 기대함, 현재화함의 단일함 또는 '간직하며 기대하는 현재화함'이다. 이러한 "시간성"의 단일함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손안의 가까운 도구인 망치는 다시금 무차별함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망치와 같은 도구 존재자뿐만 아니라 존재자로서의 자기 자신 및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 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 맺음이 그와 같은 '간직하며 기대하는 현재화함'인 "시간성"으로부터 가능하다. 하이데거는 초월의 가능 근거인 '간직하며 기대하는 현재화함', 즉 기재, 미래, 현재의 단일함인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탈자적인 것(Au er sich)"(GP, 377)이라고 말한다. 즉 "시간성"은 자기 바깥에 "∼으로 빠져나감(Entr ckung)"(GP, 378)이란 성격의 "탈자"로부터 규정받는다는 것이다. "미래의 본질적인 점은 '자신으로 다가감(Auf-sich-zukommen)'에, 기재의 그것은 '무엇으로 되돌아(Zur ck-zu)'에 그리고 현재의 그것은 '무엇 곁에 체류함(Sichaufhalten bei)', 즉 '무엇 곁에 머물러 있음(Sein-bei)'에 놓여 있다. 시간성이 이러한 '무엇으로 향해', '무엇으로 되돌아', '무엇 곁에'에 의해 규정되는 한, 시간성은 자신 밖에 나가 있다"(GP, 377). "시간성"을 특징짓는 자신을 넘어 '∼으로' "빠져나감"이란 "탈자"는 미리 기대하고 아직 간직하는 가운데 향하고 되돌아가며, 어떤 것을 현재화하는 단일함을 놓지 않고 붙잡는 견딤(aushalten, durchhalten)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견딤의 단일함 속에 "탈자"의 '∼으로(Wohin)'는 "지평"("본래적인 개방성", "개방된 여지")(GP, 378)을 연다. "시간성"의 "빠져나감"이 "지평을 개방하고 열린 채로 견지한다"(GP, 378). 그리하여 "탈자"의 단일함으로부터 규정받는, 미래, 기재, 현재의 근원적 단일함인 시간성은 "그 자체 탈자적-지평적"(GP, 378), "근원적인 탈자적-지평적 단일함"(GP, 429)이다. 이렇게 탈자적이자 지평적인 "시간성"을 바탕으로 존재를 이해하면서 존재자와 관계 맺는 초월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존재 이해 안에 열어 밝혀진 존재와 그 존재 진리를 빛으로 해서 드러난 존재자의 사이를 단일함 속에 구별하는 차이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 차이의 궁극적인 근거는 "시간성"에 있다. 초월의 근본 토대로서 초월에서 수행되는 차이의 근거인 "시간성"은, 초월에 존재 이해가 속해 있기에, 다시 말해 초월은 곧 존재자와 관계 맺으며 그것의 존재를 이해함이기에 존재 이해의 근본적 가능 조건 혹은 "도대체 존재와 같은 것이 그리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지평"(GP, 22)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동시에 초월은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성 틀", "존재"(GP, 452)를 이루는 만큼, 존재 진리의 지평인 "시간성"은 또한 인간이 그의 고유함, "특출난 점"을 얻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성"은 인간에 속하면서도 인간보다 근원적이다. 말하자면 "시간성"의 시간은 존재와 인간을 동시에 떠받치고 있다. Sein und Zeit의 1부의 제목, '현존재를 시간성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에는 이미 그러한 사태가 앞서 파악돼 있다. 이로써 앞서 제기한 물음, 즉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 혹은 존재 이해 안에서 열어 밝혀지고 관계 맺음에서 드러난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의 중심인 '사이에', 그 둘의 '와'는 어떤 영역이며, 그 영역은 여는 것은 어떤 사태인가라는 물음은 다음과 같이 해명된다. '∼으로' 빠져나가는 탈자가 견딤의 단일함 속에 열어놓은, 탈자적 지평적 단일함의 "시간성"이 '사이에'를 이루며 그 '사이에'로부터 차이가 전개되고 있다. "시간성"에 대해 이러한 규정 속에 이해되고 있는 그것의 본질은 이후의 논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시간성"이란 시간의 본질은 상이한 것을, 여기서는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을, 단일하게 하는 데 있다. "시간성"의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원이다. 원은 상이한 것의 어울림, 조화를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차이의 근거를 "내어나름"으로 사유하는 또 다른 곳에서 "내어나름"을 "원을 이룸(Kreisen)"(ID, 62)이라고 말한다. 3. 차이와 내어나름 하이데거의 앞선 사유의 길에서 열어 밝혀진 존재와 그를 통해 드러난 존재자 사이의 "구별"로 말해진 차이는 그 이후의 사유의 길에서, 무엇보다도 Identit t und Differenz에서 "내어나름"이란 차이의 근거에 이르게 되는 것과 함께, 뚜렷이 사유되지 않은, 그런 의미로 아직은 뒤로 물러나 있는 그것의 사태를 가까이에 생생하게 내보이게 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존재자의 존재', '존재의 존재자'에서의 소유격의 의미를 실마리로 차이의 사태와 그것의 근거로 진입해간다. 이에 따르면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속하는 "존재자의 존재"며, 동시에 존재자는 언제나 존재와 관련된, 혹은 존재 덕분에 비로소 "오히려 무가 아니고 존재하는", "존재의 존재자"다. 이때 전자의 소유격은 목적격적인 소유격으로서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를, 그리고 후자의 소유격은 주격적인 것으로서 존재 덕분에 존재하게 된, 존재에 속하는 존재자를 표현한다. 이러한 이중의 소유격을 통해 우선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존재자(와의 차이에서)의 존재와 존재(와의 차이에서)의 존재자 사이의 차이란 서로에게 속함, "함께 속함"이란 점이다. 이러한 "함께 속함"으로서의,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이제 '존재자의 존재'에서의 목적격적인 소유격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밝혀짐으로써 사태 부합적인 내용을 펼쳐 보인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Sein, welches das Seiende ist)를 가리키며, 이때 'ist'는 타동의 의미, 이행, 넘어옴의 의미"(ID 56)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존재자(와의 차이에서)의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이며, 이 "존재하게 함"은 존재자로 넘어오는 이행의 일어남이란 것이다. "여기서 존재는 존재자로 넘어옴의 방식으로 본재한다"(ID, 56) 그렇지만 존재자로 이행하는 이러한 존재의 넘어옴은 마치 존재자가 존재 없이 있다가 비로소 이 존재에 의해 관여되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자 바깥에서 존재자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이 존재의 넘어옴은 존재가 언제나 다만 존재자에 속하는 존재란 그의 자리를 벗어나는 이행이 아니라, 스스로를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자로 이행하는, 혹은 "비은폐 안에 열려 펼쳐지며 비은폐된 것으로"(WhD, 144) 들어서는, 탈은폐하는 넘어옴이다. 한편, 이러한 탈은폐하는 존재의 넘어옴에서 존재자는 비로소 존재자로서 들어선다.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자로 이행하는 존재의 탈은폐가 존재자를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로서 밝게 드러냄으로써 존재자이게 한다는 것이다. 존재자는 '존재자의 존재'인 존재의 탈은폐에서, 그것을 통해, 오히려 무가 아니고 존재하는 '존재의 존재자'가 된다.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넘어옴, 이행이란 존재의 탈은폐 혹은 존재의 진리로서, 존재자의 편에서는 "존재하게 함"의 사태다. "존재는 (존재자를) 넘어서 탈은폐하며 (존재자로) 넘어오며, 존재자는 그러한 넘어옴을 통해 비로소 그 스스로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서 도래한다(ankommen)"(ID, 56). 여기서의 "도래"란 비은폐 안에 "간수됨(sich bergen)", "그렇게 간수된 채 우리 가까이에 머묾(anw hren)", 그럼으로써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존재함(Seiendes sein)"을 말한다(ID, 56). 이와 같이 '존재자의 존재'인 존재는 존재자로 자신을 열어 밝히며 넘어오는 ≫동시에≪ 존재자는 그 존재의 열어 밝힘에서 '존재의 존재자'로 간수됨으로써,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로부터 나눠지면서도, 번갈아 서로에게 향하며 함께 속한다. 이로써 앞서 두 가지 소유격의 의미를 통해 "함께 속함"이라고 미리 규정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란, 탈은폐하는 존재와 그 존재의 탈은폐에서 존재자로서 들어서는 존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서로로부터 갈라짐과 서로에게 향함의 단일함, 동시성의 사태로 드러나고 있다. 차이의 사태가 그와 같이 밝혀진다면, 그것을 인식의 실마리로 삼아 들어서야 할 차이의 근거 또는 '차이를 내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태일 것이다. 우선 그 차이의 근거는 탈은폐하며 존재자로 넘어오는 존재와 그 존재의 탈은폐에서 존재자로서 들어서는 존재자 사이의 "사이에" 혹은 둘의 '와'를 이루는 "동일한 것(das Selbe)"이어야 한다. 존재의 넘어옴과 존재자의 도래의 중심인 그 '동일한 것'은 그리로부터 그리고 그리에로 그 두 차이나는 것을 단일하게 묶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그 "동일한 것"을 "사이-가름(사이-나눔)(Unter- Schied)"이라고 부른다. "사이-가름"이 탈은폐하는 존재와 도래하는 존재자가 그리로부터 서로로부터 나눠지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함께 속하는, 둘 사이의 중심인 "사이에"란 영역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렇게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서로로부터 나뉨과 서로에게 향함의 "사이에"로서, 그 둘을 동시에 "와"로써 묶는 "사이-가름"은 그 나뉨과 향함의 단일함, 동시성이 팽팽히 유지되도록 견지하는 "내어나름(Austrag)"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존재의 넘어옴과 존재자의 도래란 두 상이한 것의 단일함, 동시성을 견지하는 "견딤(Aushalten)"(ID, 63)을 수행하는 "내어나름"이 "사이-가름"으로서 "사이에"의 영역을 밝게 트이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태 부합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존재자를 넘어 존재자로 탈은폐하는 존재와 그 존재의 탈은폐에서 존재자로서 들어서는 존재자는, "내어나름"이 "견딤"의 단일함 위에서 "사이-가름"으로서 열어놓은 "사이에"'에서, 서로로부터 갈라지면서도 동시에 번갈아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함께 속한다. "내어나름"에 의해, "내어나름"의 영역으로부터 존재와 존재자는, 마치 서로의 발을 잡고 돌 듯, 서로를 향해 번갈아 돌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내어나름"에 대해 "하나의 원을 이룸,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를 향해 번갈아 돎"(ID, 62)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존재와 존재자의 단일함, "함께 속함", 즉 차이의 사태가 "내어나름"에 의해, "내어나름"의 영역("사이에")으로부터 전개되는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그러한 차이로부터 들어서야 할 그것의 근거 혹은 '차이나게 하는 것'은 "내어나름"이란 점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내어나름"을 차이의 최종적 근거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에게 "내어나름"은 아직 차이의 앞선 근거, "차이의 본질의 앞선 장소"(ID, 59)일 뿐이다. 이후의 논의에서 차이의 본질의 궁극적 장소는 "존재 사건"으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내어나름"에 의해 전개되는, 탈은폐하며 넘어오는 존재와 그 탈은폐의 밝음에서 존재자로서 들어서는 존재자의 단일함의 사태란 그렇게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간수하는, "밝게 트이며 간수함(lichtendes Bergen)"(WdW, 201)인 존재가 지배하는 사태다. 다시 말해 차이란 존재의 탈은폐 혹은 존재의 진리로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팽팽히 전개되는 차이는 곧 "내어나름"의 영역으로부터, "내어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을 열어 밝히며 그 열어 밝힘에서 존재자를 드러내는 탈은폐의 존재가 내어지는 존재 진리의 사태인 셈이다. 따라서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 "내어나름"이 탈은폐의 존재를 내줌으로써 그 탈은폐의 밝음에서 존재자로 들어서는 존재자와 존재의 단일함의 사태인 차이가 전개된다. 그렇게 본다면 "내어나름"은 존재자와의 차이로부터의 존재, 혹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지배하는 차이(Unterschied)"(WdW, 201)인 탈은폐의 존재가 내어지는, 존재 자신에 속하는 진리 방식과 지평이며, "차이로부터 사유된 존재"(ID, 57)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내어나름"의 방식으로 "내어나름"의 영역으로부터, 다시 말해 "내어나름"만큼 존재자와의 차이로부터의 존재, 즉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드러내는 탈은폐의 존재가 내어진다는 이 같은 사실에는 뚜렷이 말해지지 않은, 그러나 사유돼야 할 다음의 사실이 함께 말해지고 있다. "내어나름"에서 내어진 탈은폐의 존재란 우리를 요구하며 관여하는, 우리에게로 열어 밝혀진 현존(Anwesen)의 존재, 그렇게 밝게 드러난 진리의 존재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존재는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자신의 열어 밝힘에서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간수하는 "존재하게 함"으로서 "모든 존재자보다 멀리 있지만", 동시에 우리들 자신인 인간에게 내어진 현존의 존재로서 "어떤 존재자보다 인간 가까이" 머무는 존재다. 우리 가까이에 머무는 현존의 존재가 그처럼 "내어나름"의 영역으로부터 내어지는 만큼, 존재를 사유함으로써, 혹은 끊임없이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본질로, 즉 "존재의 목자" 혹은 "존재자에서 존재가 실현되는 틈새(Bresche)"(EM, 172)로 존재하는 인간 현존재 또한 그 "내어나름"의 영역에 들어서서 그것을 떠맡아야 한다.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그렇게 "내어나름"의 영역에 들어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존재는 존재로서, 다시 말해 밝게 드러난 진리의 존재로 본재하며, 동시에 인간은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h ten) 목자(Hirt)로서의 그의 고유함을 얻는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결국 "내어나름"을 차이에서 지배하는 존재 자신의 지평과 방식이자 동시에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 그의 고유함에 이르는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써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인 "시간성"의 시간에 대한 규정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 "탈자"의 단일함으로부터 밝게 트이게 된 "개방된 여지"인 "시간성"은 존재 진리의 지평을 이루는 동시에 차이를 수행하는 또는 존재자와 관계 맺으며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성 틀"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해진 바 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그러나 하나의 물음으로 모여질 물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 i) "시간성"의 시간에 대한 규정이 "내어나름"에서 다시금 동일하게 말해질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내어나름"의 영역인 "사이에'"를 앞서 "시간성"으로 불렀던 시간의 다른 이름으로, 그 '사이에'를 여는 "내어나름"을 시간의 본질로 보아야 하는가? ii) 또한 "내어나름"이 그처럼 존재자와의 차이에서의 존재가 내어지는 지평으로서 동시에 그 내어지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들어서야 할 영역이라면, "내어나름"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 존재와 인간이 동일한 곳에 함께 속한다는 의미로 동일한 동일성의 본질 유래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존재와 시간을 하나로 묶는 '와'로서 사유하는 "존재 사건"과 어떤 관련 안에 놓여 있는가? 우리는 나중의 두 번째 물음부터 해명을 시도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존재 사건"과 그것에 고유하게 속하는 사태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4.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 존재와 인간은 서로의 본질로부터, 서로에게 속함의 방식으로, 함께 속한다.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기 위해 혹은 진리로서 본재하기 위해 그 열어 밝힘의 장소로서 인간의 사유함을 필요로 한다. 존재는 이 필요로부터 인간의 존재 사유를 자기의 것으로 사용하여 거기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렇게 인간의 사유에 내맡김으로써 존재는 존재로서, 즉 그의 고유함, "근본 특성"인 진리로서 본재한다. 숨김으로부터 자신을 환하게 드러낸 존재는 현존(Anwesen)의 존재로서 우리들 자신인 인간 가까이에(an) 본재한다(wesen). 존재의 진리는 또한 인간이 그의 고유함을 얻는 영역이다. 인간은 그의 사유함에서 밝게 드러난 존재의 진리를 통해 비로소 존재자 가운데서 존재자와 관계 맺을 수 있고, 그러한 존재자로서 도대체 존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존재 사유는 인간에게 속하지만, 인간을 그의 본질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인간보다 근원적이다. 즉 존재 사유는 "인간의 속성으로서 인간이 갖는 한 태도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인간을 갖는 일어남(Geschehnis)이다"(참조 EM, 150). 인간 또한 그와 같은 그 자신의 내밀한 필요로부터 존재에 대한 탈자적 응대의 관련으로 있으며, 그 "응대의 관련"(ID, 18) 자체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함을 사용하는 존재의 "필요해서 사용함(Brauchen)"이란 단순히 이용하고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사용함"으로서 인간의 사유를 "본질에 들어서게 함이며 본질에서 지킴(Wahrung)" (WhD, 114)이다. 때문에 존재의 요구는 인간에게는 강요나 폭력이 아니라 "존재의 목자", "존재의 이웃"( H, 29)인 그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호의며 선물이다. 그래서 "존재의 호의에 대한 메아리"(WiM, 49)로서의 존재 사유는 자신을 사유하도록 내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본질에 이르게 한 것(존재)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간직하는 "지킴"과 그것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쏟는다는 의미로, 자신을 바치는 "감사함"으로서 수행된다(WhD, 79 이하). 존재와 인간은 서로를 향한 필요로부터 혹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밀한 유한성으로부터 존재의 진리를 중심으로 ― 존재는 자신의 열어 밝힘을 위해 그 진리의 장소로 불러 세운(요구한, 필요해서 사용한, 자기의 것으로 삼은) 인간의 사유함에 자신을 내맡기고 동시에 인간은 사유함을 통해 그리에로 자신을 바침으로써 ― 서로에게 속하며, 그렇게 서로 속함의 방식으로 함께 속한다. 존재와 인간이 그리로부터 그리에로 함께 속하는 "동일한 것"인 존재의 진리를 하이데거는 "존재 사건"으로 부른다. 존재의 진리가 이렇게 호명됨과 함께 존재보다는 그를 위해 물러나 있는, 존재가 존재로서 있는 진리 자체, 탈은폐 자체가 또는 "함께 속함"보다는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이 뚜렷이 사유된다. "존재 사건" 안에서, 그것을 통해, 존재와 인간은 ≫인간에게로≪ 열어 밝혀진 존재와 ≫존재를 향한≪ "응대의 연관" 또는 인간 본질에 대한 연관과 존재의 진리에 대한 연관으로서 함께 속하고, 그렇게 "동일한 것"에 함께 속한다는 의미로 동일하다. 그리하여 존재 사건이 존재와 인간의 '사이에', 둘을 하나로 묶는 '와'로서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 다르게 말해 존재의 진리에 대한 연관인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그 안에 살고 있는 "가까움"( H, 20/21, 29, 37)인 "함께 속함"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로 "저 가까움에서 가장 가까운 것"(ID, 26)이며, 동일성의 본질 유래를 이룬다. 이렇듯 "존재 사건"이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인 만큼, 여기에는 다음의 사실이 함축돼 있다고 말해야 한다. 즉 차이의 앞선 근거로서 존재자와의 차이로부터 존재를 내줌으로써 차이를 전개하는, 동시에 그 내어지는 존재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인간이 들어서야 할 "내어나름"과 "존재 사건"은 따로 떨어진 상이한 두 사태가 아니라 어떻게든 하나로 어울려야 한다는 점이다. Identit t und Differenz의 서론에서 밝히는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은 분명하게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동일성과 차이의 함께 속함이 이 글에서 사유돼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차이가 얼마만큼 동일성의 본질에서 유래하는지는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 사이에 지배하는 어울림에 귀기울임으로써 독자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ID, 8). 여기서 하이데거는 "내어나름"에서 전개되는 차이는 어떻게든 "존재 사건"에 고유하게 속하는 동일성의 본질에서 유래하며, "내어나름"과 "존재 사건"은 하나로 어울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차이가 동일성과 함께 동일성의 본질 유래인 "존재 사건"에 속하는 한,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 사이의 어울림은, 차이를 전개하는 "내어나름" 또한 "존재 사건"에 속하는 방식의 어울림이어야 한다. 그와 같이 "내어나름"이 "존재 사건"에 속함으로써 "존재 사건"은 "차이의 본질의 앞선 장소"인 "내어나름"에서 멈출 수 없는 차이의 최종적인 본질 유래를 이룬다. 우리는 이로써 "존재 사건"이 동일성과 차이로서의 존재 진리라고 앞질러 확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은 보다 사태 부합적인 해명이 뒤따라야 할 주장으로 남는다. 5. 존재 사건에 속하는 시간-공간과 내어나름 앞서 "내어나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진 바 있다 : "사이-가름"으로서 "사이에"를 열고, 그리로부터 존재의 넘어옴과 존재자의 도래 사이의 단일함을 견지함으로써 차이를 전개하는 "내어나름"은 존재자를 드러내며 우리에게로 열어 밝혀진 존재(현존)가 내어지는 지평과 방식인 동시에 그리로부터 내어진 존재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들어서 떠맡아야 할 영역이다. "내어나름"이 그와 같이 우리에게로 열어 밝혀진, 우리 가까이에(an) 머무는(wesen) 현존(Anwesen)의 존재의 진리 장소("an")인 동시에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인간 현존재(Dasein)의 "거기에(da)"를 이룸으로써 존재와 인간을 동시에 떠받치는 한, "내어나름"은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 존재와 인간의 동일성의 본질 유래인 "존재 사건"에, 그것의 고유한 방식과 영역으로, 속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내어나름"이 "존재 사건" 밖에 놓인다면,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할 수 없고, 그 경우 존재는 열어 밝혀진 진리의 존재로서 본재하지 않으며 또는 비진리로서 아직 밖에 머물며, 즉 감춰지며, 인간은 그의 본질인 존재의 진리에 대한 연관 자체 혹은 "존재의 목자"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차이의 본질의 앞선 장소"인 "내어나름"이 그처럼 "존재 사건"과 하나로 어울림으로써 동일성의 본질 유래인 "존재 사건"은 차이의 본질의 최종적인 장소다. 다시 말해 "존재 사건"은 존재와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차이의 본질로서 "내어나름"의 방식으로 그리로부터 차이를 전개하고, 즉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간수하는, "밝게 트이며 간수함"인 존재를 내주고, 존재와 인간과 관련해서는 동일성의 본질로서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존재의 진리 사태다. 이로써 우리의 논의를 이끄는 두 가지 물음 중 후자의 물음,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은 어떤 관련 안에 놓여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일정하게, 다시 말해 "내어나름"이 얼마만큼 "존재 사건"에 속하는지에 관해 해명한 셈이다. 그렇지만 "내어나름"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 사건"에 속함으로써 하나로 어울리는가? 우리는 앞서 "시간성"이란 시간의 성격에 대한 규정, 즉 존재 진리의 지평이자 인간이 그의 고유함을 얻는 영역이란 점이 "내어나름"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제기한 우리의 첫번째 물음, "그렇다면 '내어나름'을 시간의 본질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명을 시도함으로써 여기에 답하고자 한다. 우리는 결국 이를 통해 다음의 물음을 묻고 있는 셈이다. "내어나름"과 "존재 사건" 사이의 관련이란 혹 "내어나름"이 시간의 고유함으로써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와 함께' "존재 사건"에 속함으로써 하나로 어울리는 관련인가? 이 물음에 결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다시금 "존재 사건"에 속하는 "내줌(Reichen)"의 "시간-공간(Zeit-Raum)"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드러내는 존재의 진리를 존재의 보내줌(geben, schicken)으로, "존재 사건"을 "존재를 보내주는 것"으로 사유한다. 즉 "존재 사건"이 "Es gibt Sein"의 'Es'이며, 존재는 'Es'의 보내줌(geben)에 의해 "보내진 것"(Gabe)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Es"인 "존재 사건"으로부터 보내지는 존재, 즉 자신의 열어 밝힘에서 존재자를 드러내며 우리에게로 이른, 내어진 현존(Anwesen)의 존재는 어디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내어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내줌"의 "시간-공간"이다. 하이데거는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으로 사유하면서 "시간성"이라고 부른, 미래, 기재, 현재의 단일함의 "개방된 여지"를 이번에는 "시간-공간"으로 호명하면서, 그 "시간-공간"이란 시간의 본질, 다시 말해 "시간-공간"을 밝게 트이게 하는 것을 현존을 내주는 "내줌"이라고 말한다. 앞서 탈자적-지평적인 "시간성"을 자기 밖에 '∼으로' 빠져나감이란 "탈자"에 의해 밝게 트이는 것으로 사유한 하이데거는 이제 "우리에게로 이름", "우리를 관여하며 가까이 머묾"이란 의미의 현존을 내주는 "내줌"이 "시간-공간"의 시간을 열어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탈자의 "시간성"에서는 미래, 기재, 현재가 각각 "무엇에로 향해(Auf-zu)", "무엇으로 되돌아(Zur ck-zu)", "무엇 곁에(Bei)"로서 ≫∼으로≪의 탈자로부터 규정받는 반면(GP, 377), 여기서는 미래, 기재, 현재의 본질적인 점이 ≫우리에게로≪ 이르는 현존을 내주는 "내줌"에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에서 "우리에게로 이름", "관여함"이란 의미의 현존이 내어지며, 미래, 기재에서도 또한 그와 같은 의미의 현존이 내어지고 있다. '더 이상 현재가 아닌' 기재는 단순히 측량될 수 있는 시간의 흐름에서 과거 어느 시점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미치며, 관여하며, '아직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로-도래함(Auf-uns-Zukommen)"의 현존이 우리에게 내어진다(ZS, 13). 이러한 미래, 기재, 현재는 서로를 향해 자신을 내주는 방식으로 단일하게 어울려 있다. '아직 현재가 아닌' 미래는 우리에게로 이르면서 '더 이상 현재가 아닌' 기재를 내주며, 기재는 거꾸로 도래에게 자신을 넘겨준다. 이렇게 번갈아 서로에게 향하는 미래와 기재의 관련은 또한 동시에 현재를 내준다. 미래, 기재, 현재에서 서로를 향해 자신의 현존을 내주는 이러한 "내줌"으로부터 개방된 여지인 "시간-공간"의 단일함이 밝게 트이게 된다. "내줌"이 미래, 기재, 현재에서 그때마다의 그것들의 고유한 현존이 내어지게 하며,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갈라지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시간-공간"을 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줌"이 열어놓은 "시간-공간"은 도래하는 것의 현존, 기재하는 것의 현존, 현재하는 것의 현존 등 모든 현존이 내어지는 지평을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환한 밝음 아래 존재자를 드러내며 우리에게로 이른, 우리를 관여하며 가까이에 머무는 존재가 "내줌"의 방식으로, 그리고 "내줌"의 "시간-공간"의 영역으로부터 내어지는 것이다. 또한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존재하게 함"("현존하게 함")인 존재 또는 존재자와의 차이에서의 존재가 그처럼 "내줌"의 영역으로부터 우리 가까이에 내어지는 만큼, 끊임없이 "현존의 관여"(ZS, 12)를 받는, 다시 말해 자신에게로 이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인간은 그 "내줌"의 영역에 들어서 그것을 떠맡아야 한다 : "현존으로서의 존재에는 우리들 인간에게 미치는 관여가 알려지고 있다. 우리들은 이 관여를 받아들이고 떠맡음으로써 인간임의 특출함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현존의 관여를 떠맡는 것은 내줌의 영역에 들어서 있음에 연유한다"(참조 ZS, 23/24). 그렇게 "내줌"의 영역에 들어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그 자신의 특출함으로, 즉 존재를 지키는 자로 그리고 존재는 우리 가까이에 머무는 진리의 존재로 본재한다. 그리하여 "내줌"의 "시간-공간"이란 시간은 존재가 내어지는 지평인 동시에 인간이 그의 본질을 얻는 영역을 이룬다. 그렇지만 "내줌"의 시간 스스로가 존재를 내어주는 것은 아니다. "내줌"의 시간으로부터 내어진 존재는, 앞서 말한 바처럼, "존재 사건"이 "보내준 것"(Gabe)이다. "존재 사건"이 "내줌"의 방식으로, "내줌"의 영역으로부터 존재를 보내는 것이다. 존재가 그리로부터 보내지는 "시간-공간"을 여는 "내줌"은 다시금, "존재 사건"이 존재를 보내주는 지평과 방식으로서, "존재 사건"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내줌(geben, schicken)"은 "내줌"에서 그리고 "내줌"은 다시금 "보내줌"과 함께 "존재 사건"에서 연유한다. 그리하여 "Es gibt Sein"의 "Es"인 "존재 사건"의 "geben"은 존재의 "보내줌(schicken)"이자, 존재가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시간의 영역을 밝게 트이게 하는 "내줌(reichen)"이다. "존재 사건" 안에서, 그것을 통해, 존재는 시간의 열려진 영역에 내맡겨지고, "내줌"의 시간은 존재가 보내지는 존재 진리의 영역으로서 바쳐짐으로써, '존재'와 '시간'은 그 "동일한 것"인 "존재 사건"에 함께 속한다. "존재 사건"이 존재와 시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 말하자면 존재와 시간, 시간과 존재를 하나로 묶는 "와"로서 존재와 시간이란 "두 사실(Sache)을 서로 향하게 하고(zueinander halten), 둘의 관련을 견디는(aushalten) 사태(Sachverhalt)"(ZS, 4)다. 6. 맺음말 "존재 사건"에 속하는 "내줌"의 시간에 대한, 말하자면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 사건'으로 물음의 위치가 바뀐 사유의 길에서의 시간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이와 같이 논의하는 것을 통해 다음의 사실이 뚜렷해졌다. 즉 "내줌"에 의해 밝게 트이게 된 "시간-공간"의 시간은 존재자를 드러내며 우리 가까이 이른 존재가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지평인 동시에 인간이 들어서서 떠맡아야 할 영역이다. 이로써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인 "시간성"과 "내어나름"의 '사이에'가 동일하게 보여주는, 존재와 인간을 동시에 떠받친다라는 성격이 "내줌"의 "시간-공간"의 시간에서 다시금 확인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앞서 제기한 우리의 물음은 다음과 같이 보다 긴박하게 물어질 수 있게 된다. "탈자"의 단일함에 의해 열린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인 "시간성"의 시간 또는 "존재 사건"의 "내줌"에 의해 밝게 트인 "시간-공간"의 시간과 동일하게 존재가 내어지는 지평이자 인간이 그의 본질을 얻는 곳으로 사유된 "내어나름"의 "사이에"'는, 하이데거가 사유의 길에서 그때마다 다르게 불렀던 시간의 다른 이름이며 "내어나름"은 "탈자", "내줌"과 함께 시간의 본질인가? 그리하여 "내어나름"은 시간의 고유함으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와 함께 "존재 사건"에-그것의 고유한 방식과 지평으로서-속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확정적인 대답을 피한 채로 이를 여전히 물음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탈자"의 "시간성"과 "내줌"의 "시간-공간"에 대해 말해진 규정이 "내어나름"의 "사이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기에, "내어나름" 또한 마찬가지로 시간의 고유함이다라는 방식의 해명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물음의 사태 부합적인 해명을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에서 동일하게 물어진 하나의 물음인 존재의 의미,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을, 그 동일함 속에서 변화를 동시에 그 상이함 속에서 견지되는 동일함을 놓지 않고 파악하는 철저함 속에서, 숙고하는 사유가 아직도 필요하다 : "들어서서 오름이 길이라고 불린다면, 이 '길'에서는 언제나 '존재(Seyn)의 의미'에 대한 동일한 물음이, 오직 그 물음만이 물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길에 들어서 있기에] 물음이 서 있는 위치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모든 본질적인 물음은, 그때마다 보다 근원적으로 물어지려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점진적인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미 이전의 것에 이후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이전-이후의 관계란 더욱이 있을 수 없다. …… '변화'란 본질적이어서, 하나의 물음이 그때그때마다 그 물음의 위치로부터 철저하게 물어질 때만이 비로소 그 폭이 규정될 수 있다(BzP, 84 / 85). 우리는 그러한 사유에 우리의 물음에 대한 결정을 미루면서, "형이상학의 시기에 존재의 역사는 시간의 사유되지 않은 본질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고 있다"(WiM, 18)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며,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이 말하고 있는 것에 귀기울인다. "오히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그것의 본질의 앞선 장소인 내어나름에서 토의함으로써 존재의 역운을, 시원에서부터 그 완료에 이르기까지, 꿰뚫고 있는 어떤 것이 나타나고 있기조차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