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높이 날기 위해서는 열심히 지상훈련을 해야 하듯이, 고구려에게도 광개토태왕의 비상(飛上)이전에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처음부터 강대국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을 때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작은 분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궁궐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비류국이 새로 생긴 나라라고 얕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비류국을 이기자, 이번에는 강대한 부여국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왕을 중신으로 강한 리더십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대를 바탕으로 주변 소국들을 하나하나 정복해가면서 힘을 키웠습니다. 고구려는 개방적인 자세로 능력있는 인재를 포용하고, 유목과 수렵생활을 하는 선비족, 말갈족 등도 활용할 줄 알았습니다. 서기 1세기 태조대왕 시대에 고구려는 서쪽의 후한을 공격하여 약탈도 하고 포로를 잡아오기도 했습니다. 북방 유목국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약탈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약탈로 유지되는 국가경제는 오래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고구려는 요동과 평안도, 연변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면서 그곳의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했습니다. 또 풍부한 철 자원과 많은 가축 특히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음으로써 고구려는 안정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순조롭게 발전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에게 위협이 된 나라는 바로 조조의 위나라였습니다. 246년 위나라는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왔습니다. 고구려 동천왕은 위나라 대군과의 두 번의 전투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자 교만해졌습니다. 적을 얕잡아 본 동천왕은 성급히 공격하다가, 위나라의 반격을 받아 그만 크게 패하고, 심지어 수도가 일시 함락되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민우, 유유, 유옥구 등의 활약에 힘입어 고구려는 다시 위나라를 물리쳤습니다.
고구려는 다시 군사력을 정비해서, 259년에 공격해온 위나라 군대를 물리쳐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이후 북쪽의 부여와 숙신 방면으로 세력을 키웠고, 날락, 대방군을 쳐서 소멸시켜버리는 등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차레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342년 모용선비족이 고구려를 공격해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적의 주력군이 오는 길을 잘못 판단하여, 그만 수도가 함락되고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 말았습니다. 고국원왕은 아버지의 시신과 어머니를 돌려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적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굴욕을 겪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고국원왕은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과 만나 전쟁을 했습니다.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고국우너왕이 죽는 또 한번의 굴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의 발전이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시련은 고구려를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고구려가 2본 전진을 하기 위한 1보 후퇴였습니다. 구국원왕의 좌절은 경험했던 소수림왕은 고구려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소수림왕은 크게 3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율령 즉 법과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국가 전체에 통용되는 단일한 법률로 인해 통치 시스템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두번째는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인정하여 널리 받아들인 것입니다. 불교는 전통의 종교에 비해 체게가 잡힌 교리를 갖고 있고, 당시 국제적으로 널리 숭배되는 수준 높은 종교였습니다. 불교는 고구려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한 것입니다. 태학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국가의 인재가 되었습니다. 태학출신의 인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가 바로 광개토태왕 시기가 됩니다. 광개토태왕 역시 유능한 인재 덕택에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고구려에 실패가 없었다면 이와 같은 내부 혁신이 늦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고구려는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구려가 큰 성장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위기를 겪은 후에 새로운 혁신을 통해 자기 발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출처 : www.lovekogur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