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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 내전3

김동백 |2006.10.01 23:54
조회 20 |추천 0
한반도 정도의 크기(97,754㎢)에 인구 약 3백30만명의 서부아프리카에 위치한 라이베리아가 최근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요인으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내전이 평화적으로 종식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최근 몇 일전부터 유혈 사태로 바뀌어 미국의 개입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원래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1816 설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해방노예들을 위한 근거지로 세워진 곳이다. 이 단체는 1821-22년 곡물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다. 1824년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라고 이름 지었으며 중심 거주지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먼로의 이름을 따 몬로비아라 이름 붙였다. 미국의 노예 후손들이 건설한 국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과의 관계는 밀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라이베리아 고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미국은 라이베리아와 방위조약을 맺어 몬로비아에 도로, 국제공항, 심해항구를 건설해주었다. 1944-71년까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윌리엄 V.S. 터브먼(Tubman)이었으며 1980년 쿠데타로 그의 후계자가 축출되면서 1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트루휘그당 통치가 막을 내렸고, 동시에 내륙에 사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의 오랜 정치적 지배도 끝났다. 그리고 80년 이후 라이베리아는 계속되는 정정불안을 겪게 되었고 끝없는 내전의 상황으로 정세는 변해갔다. 내전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1980년 도우(Doe)가 이끄는 구국평의회(PRC)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후, 1989년 테일러(Taylor)가 라이베리아국민애국전선(NPEL)을 결성하고 도우 정권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내란의 종식을 위해 나이지리아, 가나, 기니, 감비아, 시에라리온이 참여하는 서아프리카제국경제공동체(ECOWAS)가 중재를 추진하여 1990년 분쟁 당사자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2년 10월부터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다. 1996년 4월 반정부의 라이베리아민주통일전선(ULIMO)이 정부 경찰부대 및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ECOMOG)과 전투를 개시하였다. 1996년 7월 31일 나이지리아에서 무장 각파와 평화협의가 열려 9월까지는 무장을 해제하고, 6-9개월 이내에 대통령과 의회선거를 실시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1997년 7월 19일 7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1985년 이후 12년 만에 실시되어 상원 26명 하원 64명 등 90명이 선출되었으며, 대통령에는 75%의 득표율을 얻은 최대 군벌 지도자인 테일러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97년 국민들의 공포심에 편승해 새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그 후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그에 대항하는 반군이 99년 봉기, 라이베리아는 다시내전에 휩싸였고 반군은 라이베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테일러를 압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S)가 중재에 나서 지난 7월 6일 오후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Monrovia) 국제 공황에서 나이지리아 대통령 오바산조와 라이베리아 대통령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두 사람의 90분간 회담을 가졌다. 회담 이후 테일러가 라이베리아로부터 떠날 것이라는데 합의했다고 발표하였으나 테일러가 미국의 군대 파견을 계속 요구하자 내전이 다시 발발하였다. 정부군은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방위에 나섰고 반군들은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시작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20여만명이 숨졌고 13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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