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 도쿄 특파원 등을 거치며 ‘일본통’으로 잘 알려진 조양욱(52) 일본문화연구소 소장이 알고 지낸 지한파 일본인들의 한국 이야기는 한류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냥 갑자기 열광하고 빠져들고 하는 한류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인생과 일에 있어서 불쑥 다가선 한국, 한국인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의 이해를 넓히고 교류하는 것이다. 이 책이 얘기하고 있는 한류의 진실은 이런 것이 아닐까?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진짜 친구를 한 명이라도 가지게 되면 상대에 대한 민족관이 달라지리라 믿는다” /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사람들과의 진실된 우정과 사랑이 바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조 소장이 최근 펴낸 에세이 ‘열 명의 일본인, 한국에 빠지다(마음산책)’는 일본인 10인의 한국과 인연 맺은 다양한 사연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인의 한류열풍을 보고 으스대는 국수적인 관점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교류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책에 등장하는 일본인 10명의 나이와 직업도 다양하다. 30대부터 칠순이 넘는 나이까지, 한국고전 문학박사, 사진작가, 문화기획자, 시인, 소설가, 가수, 출판인, 한국문학평론가, 방송 프로듀서, 신문기자 등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입을 모은 한 마디는 “한국을 사랑합니다”이다.
책에 소개된 일본인 10명의 오랜 한국사랑의 이야기와 느낌들을 간략히 정리했다.
기무라 요이치로(木村洋一郞)
[사진=마음산책 제공] “앞으로 NHK 한국관련 특집은 내가 다
책임지겠다”며 의욕이 넘치는 그. 그에게 첫 한국체험은 고교시절 한국 고교생들과 친선교류를 위한 일주일 간의 한국여행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과 부여, 경주, 부산을 돌면서 한국 고교생들과 어울렸다. 김치와 마늘 냄새의 강렬함,실외에서 술 마시는 아저씨들의 모습이 한국의 첫인상으로 각인됐다. 한국인은 파워가 넘치면서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상대라고 느꼈다. 이후 게이오대학 시절 제2외국어로 서슴없이 한국어를 고르더니 한국 정부의 국비장학생으로 연세대학원에서 ‘장면 정권의 대일정책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NHK 도쿄 본사 보도국 제작센터에서 근무하는 그는 “광복 후 60년을 맞아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그 움직임을 좇는 기획을 하고 싶습니다. 소중한 이웃인 한국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일본은 또 어떻게 바뀌어 한국과 어떤 관계를 이뤄나갈까. 요즈음 한창 요란한 ‘한류 붐’과 달리, 역사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실감이 살아나는 그런 프로그램…. 구체적으로는 파묻혀 있는 인물이나 역사에 스포트라이트를 댄 장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으면 한다”라고 말한다.
“나중에 딸이 한국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저는 기꺼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는 게 그의 다짐이다.
사기사와 메구무(鷺澤萌)
ⓒKyodo News “나는 1/4이 한국인이다”라며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던 그. 한국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른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일본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불리함에도 그는 그랬다.
그런 그는 이양지, 유미리와 함께 일본의 한국계 대표 여성 작가였다. 한국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한국계 뮤지션 사와 도모에의 노래 ‘마음’을 좋아했다는 그는 2004년 봄, 홀연히 서른다섯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하룻밤을 같이 자고 나니 시들해지고 마는 사내가 있다.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슬슬 피하기까지 하다가 엉겁결에 몸을 허락하고 나니 별안간 마음마저 빼앗기고 마는 사내도 있다. 나에게는 한국이 두번째 사나이와 비슷하다.”라며, 1993년 6개월간 머물던 한국을 떠나며 당시의 심정을 이렇듯 절묘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야마모토 마사후미(山本將文)
[사진=마음산책 제공] 그가 카메라를 잡은 뒤 한국인의 모습을
포착하기 시작한 것은 어린 시절 종종 대하던 ‘치마저고리를 입은 이웃 사람들’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그는 무턱대고 렌즈를 들이대는 몰인정이
대신 피사체와 대화를 나누고 정이 통하는 사진을 위해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입학해 한국말부터 익혔다. 이후 그가 렌즈에 담아낸 한국인들은 주로
핍박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경상남도 합천에 많이 사는 원폭 피해 한국인들, 동토 사할린에 버려진 한국인들, 연변 조선족들, 북한
주민들 등이 그들.그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아픔을 짐작할 수 있을까? 어려우리라. 조금이나마 그 아픔을 함께 느끼는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고민하고 궁리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저 한국에서 사는 것이 유일하게 그 아픔을 대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한국에서 지냈다.”고 말한다.
마유즈미 마도카(黛まどか)
ⓒ조선일보 일본 전통시가인 하이쿠(俳句,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글자의 정형시로 주된 주제는 자연과 계절) 작가. 미당 서정주 시인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시에 반해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2001년 8월부터 부산에서 서울까지 영남대로의 하이쿠 기행을 감행한 시인.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스페인을 꺾을 당시 스페인의
마드리드 광장에서 한국팀이 골을 넣자 환호성을 지르다 현지인들에게 무수한 눈총을 받았던 그. 그는 1988년 도쿄 기모노 여왕을 수상한 경력까지
가지고 있다. 이런 그의 바람은 “기회가 온다면 서울에서 판문점을 거쳐 백두산까지 걸어가 한반도 종단을 이루고 싶다”는 것. 그가 한국 땅을 밟으면서 느꼈던 소감도 “무슨 연유일까? 이국 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곤 흘러가버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듯한 아련한 그리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라는 것.
사노 료이치(佐野良一)
[사진=마음산책 제공] 한국 출판사 직원, 한국일보 일본지사 기자,
문화 기획자, 일본 잡지의 한국문화관련 기고자 등 팔방미인. 젊은 시절 난생 처음 본 상형문자 같은 한국어 서적에 질려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제는
한국 없이는 못 사는 사람. 가수 김연자의 일본 컴백 공연과 연극배우 추송웅 씨의 ‘빨간 피터의 고백’,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 일본
공연에 징검다리를 놓는 등 한국문화의 일본 전파자.그는 “주변의 나뭇잎들은 다 색깔을 바꿔서 이런 계절이야말로 서울에 가서 경복궁 길이나 덕수궁 길을 걷고 싶은데, 언제 갈 수 있을지…. 가고 싶어서, 친구들을 보고 싶어서 죽겠어요. 지금 TV 기획으로 인사동, 낙원동 등 창덕궁 주변거리에 관한 걸 생각하는 중입니다. 내게는 청춘 시절 추억의 거리죠.”라고 말한다. 몇 해 전 뇌일혈로 쓰러져 아직도 몸 가누기가 쉽지 않은 그의 안타까운 바람이다.
사와 도모에(澤知惠)
[사진=마음산책 제공] 1995년 도쿄예술대학 졸업논문 가운데 최우수
논문으로 뽑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쓴 그. 그는 졸업 이듬해 자신의 뿌리를 더듬는 노래 ‘나는 누구일까요?’를 표제로
한 앨범을 냈다. 그런 그의 어머니는 한국인,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날의 행복’ 수필로도 유명한 고 김소운 선생. 그는 지금도 열세번째 앨범을
내며 부지런히 일본 각지를 돌면서 음악을 통한 한일 우호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그가 어느 해 8월 15일에 적은 일기에는 ‘패전의 날입니다. 아시아 태평양의 나라들로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기념해야 할 날입니다. 한일 양쪽의 피를 이어받은 저로서는 이날이 오면 항상 온갖 감정이 뒤섞입니다.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떠올릴 때도 그렇지만 전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선은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세계 이곳저곳에서 울부짖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내 노래 ‘선(The Line)’을 불렀습니다.’라고 적혀있다.
히라이 히사시(平井久志)
[사진=마음산책 제공] 일본 최대 통신사인 교도통신 기자로서는
두번째로 한국에 파견한 어학연수생. 그는 귀국 후 1985년부터 본사 외신부에서 본격적인 한국 전문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등 스포츠 이벤트부터 민주화 항쟁, 6·29선언, 대통령 선거 등 굵직한 사안이 터질 때마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길 여러 번, 그는
세 번에 걸친 서울 상주 특파원을 하게 된다. 그 와중에 그는 한국인 임은영 씨를 아내로 맞아 두 딸을 둔 가장이 됐고, ‘얄미운 아내는
한국인’이라는 책도 냈다.그는 “인간의 생각이라는 게 책이나 관념세계만으로 구축되면 허약하기 짝이 없다. 생활 가운데에서 단련된 사고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진짜 친구를 한 명이라도 가지게 되면 상대에 대한 민족관이 달라지리라 믿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에구사 도시카쓰(三枝壽勝)
ⓒ조선일보 일본 국립 교토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를 받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웃나라를 살펴보자는 생각으로 인생행로를 180도 홱 틀어버린 그.
1941년생인 그가 1974년 늙은 유학생으로 경희대학교의 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이처럼 한국이 인정한 한국문학연구의 거목이 될 지 누구도 쉽게 예상치 못 했다. 이후 그가 국립 도쿄외국어대학의 교수로 한국 근·현대 문학을 가르칠 때에는 유학 간 한국인들까지 그의 한국문학 강의를 들었을 정도다.
그는 “무엇 때문에 글을 썼을까? 한국 문학을 알고 배우기 위해서다. 무엇 때문에?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문학을 연구하고 이질적인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탐구하려고 했다.”고 회고한다.
오오타니 모리시게(大谷森繁)
[사진=마음산책 제공] 한국의 여러 학자들이 나서서 떠받드는 한국의 고전문학 전공자인 그.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조선 후기 소설독자 연구’는 고소설 독자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연구였다. 이런 그의 관심사는 조선후기 세책(貰冊. 18세기 조선사회 후기에 영리를 목적으로 책을 빌려주었던 것)으로 이어졌고 고소설 연구에서 세책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같은 그에 대해 구마모토학원대학의 신동욱 교수는 ‘달빛과 이야기하고 / 맑은 물과 벗하며 / 흰 옷 입은 나그네의 쉬어가는 / 쉼터도 되어 주고 / 조선의 산 어딘가에 선, 수덕사 가는 / 산 길가 어디엔가에 선 / 소나무처럼 / 솔 향기 그윽히 풍기는 선비’라는 시로 표현하고 있다.
하기와라 미노루(荻原實)
[사진=마음산책 제공] 그는 일본 군국주의가 기승을 떨치던 쇼와
초기, 히로히토 천황이 왕위에 오른 지 10여 년이 흐른 1937년에 태어났다. 서른 두 살의 늦은 나이에 대형출판사인 ‘도쿠마서점’의 사원이 돼 62세로 정년 퇴직한 그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퇴직과 동시에 보따리를 싸고 서울로 왔다. 고희를 바라보는 요즘도 그는 평균 석 달에 한 번 꼴로 현해탄을 오간다고 한다.
그는 “경희대 어학당에서 사귄 한국인에게 탈북자 한 명을 소개받았습니다. 그가 하필 서울이 아닌 양수리에 살았어요. 가서 만나 그가 겪은 북한에서 삶을 일본에서 책으로 내기로 했는데, 글쎄 그 날 그 때까지 평생 글을 써본 적이 전혀 없다는 거에요. 도리 없이 제가 주말이면 양수리로 가서 그 사람이 털어놓는 사연을 테이프에 녹음해왔죠. 아마 10번도 더 양수리를 오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욘사마’ 열풍과 다른 면의 한국에 여전히 더 큰 관심을 갖고 출판업에 매진하고 있는 그의 열정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