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서북쪽으로는 남산이 있다고 해서 한강과 남산의 머리글자를 따 불린 곳, 한남동. 남산을 뒤로하고 한강을 향해 쭉 뻗어 있는 한남동은 한눈에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눈치 채게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의 고급 빌라가 많은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외교 1번지. 외교통상부장관 공관을 비롯하여 30여 개국의 대사관 및 영사관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태원보다 훨씬 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다국적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세상 모르고 사는 사람들 여기가 옛 나루터인 줄 모른다. 목멱산 자락에 산새 노래하는 줄 알았지….”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 에스컬레이터 구역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이런 시구 옆에는 새들이 날아드는 옛 나루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한강진이란 이름은 조선조 때부터 쓰이던 것으로, 이를 통해 그 시절 이곳에 배가 닿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강과 꽤 멀리 떨어져 있어 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 우리나라 최초의 이슬람 사원은 한남동의 대표적인 건물 중의 하나이다.
한강진역에서 빠져나오자 푸른 수풀로 온통 뒤덮인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그랜드하얏트 호텔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곳 역시 한남동인데다 전망이 좋아 그 일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을 것 같아 길을 찾아 거기로 오른다. 알고 보니 길 주위가 한국 제일의 갑부촌甲富村이란다. 여기가 한국 제일의 부촌이 된 것은 삼성, 엘지, 현대자동차 등 국내 최대 그룹의 총수는 물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 오너들의 저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촌의 신경망은 ‘새봄길’. 꾸불꾸불한 그 길을 따라 얼마 안 가 삼성타운이 나타났다. 그 입구가 금년 10월 오픈 예정으로 지금 건축공사가 막바지 단계에 들어간 미술관. 3개 동으로 구성된 이 미술관의 이름은 미정 상태.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의 작품들을 대거 이전하여 교통이 편리한 서울에 개관한다고 하니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미술관 위는 이건희 회장의 사저이자 영빈관이기도 한 승지원.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의 시애틀 자택을 벤치마킹했다고 전하는 승지원은 세계의 경영·금융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는 최첨단 홈네트워크 시스템이 구축돼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선 종종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의 모임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이 회장이 일본 후지제록스, 미국 휴렛팩커드 등 세계 굴지의 기업 회장들과 함께 식사 겸 회담장으로 이용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새봄길 좌우로 고급 빌라와 저택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으나 지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면적에 비해 주민수가 적어서도 그렇지만 부촌 특유의 폐쇄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대문마다 유명 안전회사의 마크가 붙어 있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대신 슈퍼나 미용실, 약국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게 필요치 않아서다. 부동산중계업소도 얼마간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에서도 부호들의 집값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모두가 직거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삼성타운을 벗어나면 이태원동과 경계를 이루는 길이 나온다. 하지만 대로와 만나기 위해서는 얼마간 더 걸어야 한다. 그때부터 서민생활과 관련된 가게들이 얼굴을 내민다. 하얏트 호텔은 그 출발점에 서 있다. 호텔 라운지에 들어서자 피아노에 맞춰 재즈와 클래식의 선율이 흐르고, 그 한쪽에 자리 잡은 파티오는 무척 안온하다. 그곳 창문에 다가가자 드넓은 풀장과 반라의 차림으로 선탠을 즐기는 투숙객들이 보인다. 호텔 상층부로 올라 한강진역 일대(한남1동)와 한남동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인 유엔 빌리지(한남1동)를 조망한다. 흥미롭게도 그 두 곳은 외교공관들이 밀집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한남동은 흔히 ‘대사관동’이라 불리곤 한다. 외교통상부장관의 공관도 물론 이곳에 있다.
단국대학교 너머의 유엔 빌리지는 지금 최고급 빌라 건축공사가 한창이고, 거기서 길 하나 건너 서쪽에는 순천향대학 부속병원이, 이태원동과의 접경지대엔 76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을 연 이슬람 중앙 성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부촌에 최고급, 외국대사관, 이국적인 것들이 조용히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한남동은 남산 기슭의 ‘야생화공원’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다 순식간에 막을 내린다. ‘남산 제 모습 가꾸기’ 사업으로 태어난 야생화공원은 말 그대로 자연이다. 바퀴로 움직이는 것을 절대 사절하는 이 공원은 남산 정상과도 이어지는데, ‘메트로폴리탄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네 잎 클로버를 찾느라 정신없는 사람들,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젊은 부부, 개를 끌고 나온 나이 든 사람들, 여기에 외국인들까지 합세하여 깊은 호흡으로 상쾌함을 마신다. 이런 녹지대의 존재 덕분에 한남동은 옛 정취, 다시 말해 ‘남산을 베개 삼아 한강으로 다리를 곧게 뻗어 복록이 대대손손 넘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터’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남동의 ‘한’은 발아래의 한강을, ‘남’은 바로 그 머리 부분인 남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아름다운 곳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