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지가 없는 군인은 살인자에 불과하다." 라는 말이 있다. 일상에서의 살인과 전쟁에서의 살인은 타인을 해한다는 의미에서 똑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의 차이에 의하여 전쟁쪽은 묵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모든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해야 한다며 입을 모으고 있지만, 스스로가 추구하는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타인에 대한 존엄성은 사라지며 오직 스스로의 소중함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너무나도 이기적이며 개인적인 동물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스스로가 쫓는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은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때도 명백히 들어난 사실이며, 20세기의 온 세상을 피로 물들게 만들었던 "이데올로기" 역시 다수의 인간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형태를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켰던 예였다. 대한민국 역시 이데올로기로 인한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었으며, 그 이전에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의 상처와 흉터를 이 세상에 깊게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2차 세계대전의 그늘에 가려진 한 비극은 스페인 내전이라 불리워지는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 the Bell Tolls)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로도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이"(Earnest M. Hemingway)는 바로 작가 자신이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장편소설중 하나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역시 헤밍웨이가 쓴 "무기여 잘있거라"와 더불어 전쟁중의 사랑과 비극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가장 가치있고 심오한 소설로 손꼽히는 전쟁문학으로 잘 알려진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략하다. 미국 대학 교수였던 로버트 조던은 공화파로서 파시스트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게 된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량 하나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그는 산속 한 동굴에서 사흘을 지내게 되는데 그 안에서 여러 게릴라 군을 만나고, 불쌍한 여인이었던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명령대로 조던은 교량을 폭파하는데 성공하지만 적의 총탄에 맞아 부상당하게 되고, 사흘을 함께 했던 게릴라 동료들과 울부짖는 마리아를 먼저 떠나 보내고, 스스로는 그 자리에 남아 적들과 싸우다 전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소설의 더 자세한 이해와 분석을 위해서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스페인 내전은 부유층이 주류였던 파시즘 성향이 강한 극우 국가주의파, 민주주의와 자유를 꿈꾸었던 중산층이 주류가 된 공화파의 대립이었다. 국가주의파는 파시즘의 산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한 원조를 받고 있었으며 공화파는 프랑스와 멕시코, 소련과 전 세계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모여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세는 처음에는 공화파 쪽으로 기울었으나 끝내는 국가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나게 된 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위한 많은 무기들의 시험장소가 된 곳이었으며 이데올로기 분쟁의 씨앗이 된 사건으로, 결국 이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헤밍웨이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고 지었을까? 이 제목은 사실 16세기의 시인중 하나인 존 던(John Donne)의 시의 제목으로서, 마야 엔젤루의 "새장의 새가 왜 노래하는지를 나는 아네"처럼 시에서 그 이름을 따온 소설이다. 우리가 "종"이라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은 엄숙하고, 장엄하면서, 기쁜 것으로 교회의 종소리나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혹은 크리스마스의 종소리다. 그러나 제목의 "종"은 이와는 달리, 사람이 죽었을때 그를 보내기 위한 "조종"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종은 동료를 보내고 장렬하게 전사한 주인공인 조던만을 위해 울리는 종일까? 깊게 생각해보면 이 종은 주인공만을 위한 종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싸우던 조던의 "난 지난 일년동안 내가 믿어온 신념을 위해 싸워왔다.만일 우리가 여기서 이긴다면,우리는 어디에서나 이길 것이다." 라는 독백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정복과 파괴의 측면이 강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전쟁에 임한 그는 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헤밍웨이 역시 공화파 쪽에서 그 신념을 가지고 싸워온 사람이지만 그그 전쟁 후에 이 소설에서 부각시켰던 것은 공화파, 민주주의, 자유가 아닌 "신념" 그 자체이다. 파시즘을 믿고 있던 사람들 역시 스스로의 "신념"을 위해서 싸워왔을테고 그 가운데서 조던처럼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본문 내에서도 헤밍웨이는 단순히 공화파만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글을 전개하지 않았으며 편파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조던의 "신념" 그 자체를 묘사해 나갔다. 유럽을 제패한 영국도, 국제경찰 노릇을 하겠다던 미국도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위협만을 두려워 했던 스페인 내전 그 한가운데서, 많은 지식인들과 중산층들이 힘을 합하여 평화를 지켜내려 했었던 그 "신념"으로부터 말이다.
유태인 학살과 유럽의 많은 나라에 큰 상처를 남겼던 독일과 이탈리아, 아시아를 제패하려 했던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사람을 위해서만 종은 울리지 않음을 헤밍웨이는 강조한다. 국가의 숭고함과 자존심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 나라들에 의한 피해국가들은 당연히 인정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들 모두 하나의 "생명"과 "죽음"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은 그 "존엄성"을 위해서 사람을 분류하지 않고 언제나 울려퍼진다. 그들 하나하나가 가졌던 귀중한 가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짐을 애도하기 위해서...
오늘날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은 스스로의 이익과 위대함, 존엄성을 전 세계에게 꾸준히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테러"라 칭해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그것들은 "위험하다" 라고 세뇌시키듯 인식시키는 중동의 국가들에겐 특별한 가치를 부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에겐 그저 밟혀도 괜찮을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 "신은 우리편이다." 라고 말했던 현 미국 대통령 조지 H. 부시의 아버지인 조지 W. 부시는, 정말 신은 자기들만을 위해 편을 들어주고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던 이라크는 신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죽여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중동 각 지역으로 보낸 미군들을 위해서만 종은 울려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이 지난지도 벌써 몇십년이 지났고 현재까지 살아있는 전쟁의 생존자들은 얼마 남지도 않은 21세기의 초반을 살아가는 우리는, 전쟁에 대해 어느정도 무감각해져 있다. 물론 2001년 9월 11일 WTC의 비극이 일어난 이후로는 모두가 다시 테러에 민감해지긴 해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디서 올지 모르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의 개념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인간 복제, 낙태는 한 인간의 개별성을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우리는 아직까지 그것들의 이득에 암묵적으로 끌려가고만 있다. 이 중 어디서, 우리는 만인을 위해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헤밍웨이가 이 글의 제목을 빌렸던 존 던의 시를 살펴봄으로써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부정할 수 없는 진리지만 그 진리를 따라가기 보다는 벗어나기를 바라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 인간 개체 하나하나는 떨어져 있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인간"이라는 가치있는 분류에 속해져 있는 "통합된 한 분류"이다. 종은 그룹화 되어있는 인간에게 상대적으로 울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종이 자신에게는 울려지지 않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그리고 그대는 인류에 속해져 있으며, 인류는 한 덩어리, 하나의 개체이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존 던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건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구라파는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