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작은 고구려의 유민.
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이래
고구려의 유민은 노예의 신분이었다.
고선지역시도 다를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무예에 출중하여 당나라에서 공을 세운바 있어 고선지역시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당나라의 장수가 되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당시 북방이민족 출신은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고선지는 살아생전 글을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오직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만을 학습할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고선지는 출중한 실력을 드러내었고,
그 덕에 동서 무역의 중심인 서북 변방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코끼리를 이용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인을 경악케했던 한니발을 연상케하는 고선지의 소발률국(지금의 파키스탄 북부지역)의 정복은 서양인의 가슴에도 감동을 주었음직하다.
서방세계와의 무역로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발률국은 결국 고선지의 뛰어난 지도력에 의해 점령되었고 당나라의 속을 썩이던 토번은 그 일로 말미암아 동서교역로를 잃고, 당나라는 반대로 탄탄대로의 교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말미암아 고선지는
서북지역의 4개진을 다스리는 안서사진절도사로 승격이 되고
개원의 치라는 당나라의 태평성태를 이루었던 현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게 된다.
하지만 751년 탈라스강 에서의 압바스왕조와의 대전투는 고선지 개인의 영예와 더불어 당나라의 영예를 모두 앗아가버렸고,
그 이후 당나라는 결코 중앙아시아의 영토를 차지할 수 없었고,
중앙아시아 역시도 이슬람의 세력으로 들어가
오늘날까지도 이슬람화되기에 이르는 중요한 전투였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서구사회(물론 당시에는 이슬람이었지만 결국 이슬람사회를 거쳐 유럽 사회 많은 기술, 문명이 전파되었다.)는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전래받게 되고 화약이며 나침반을 획득하게 된다.
오늘날의 문명을 가능케 했다고 인정받는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발명.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나라의 제지술이 있었고,
제지술이 전파됨에 있어 고선지 장군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그리고 서양학자들에 의해 당당하게
Korean이라 기록되는 이 고선지 장군을 알아주기를...
고구려를 중국의 변방역사로 편입하려하는
'동북공정'에 거품 물고 소리만 지를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구려에 대해,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고
알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
실제로 많은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한다.
고구려는 패배자의 역사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백제의 역사도 빼놓을 수 없다. 무참히 파괴되어 버렸기에 우리는 감히 상상해 볼 뿐이지 않은가)
패배한 국가의 고구려의 유민으로 집단 수용소에서 생활을 하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어야 했던 많은 고구려인들.
그 속에는 고선지 장군처럼 당나라의 장군으로 활약사람들도 적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서들은 이민족의 편견에 휩싸여 비방일색을 늘어놓기도 하고, 특히 고구려가 아닌가.
수나라의 문제와 양제와 당나라의 태종이 혹독한 시련을 겪고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했던 중국의 영원한 숙적.
그러한 상황에서마저 그 소임을 다하고,
중국 서북지역의 통치하며
동서 교역의 중심에 우뚝선자.
그는 바로 Korean 고선지 장군이다.
P.S.
내용 수정 받습니다.
오로지 책 한 권 읽고 저의 의견을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