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른이 되면...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될 거야.
제비꽃잎 같던 속눈썹에 가려진, 조금은 젖어있는 눈동자로 나를 보던 s는, 그렇게 읊조렸다.
1, 2년도 걸리지 않을 그의 서른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그 이상의 연장선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의 말은 내 의식을 조용히, 그리고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s는, 금세 미소를 띈 표정으로 검은 아스팔트 위에 두 팔을 벌려 일직선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어때? 나 잘하지? 아직 안 취한 것 같지?”
그가 조금 걸었던 보이지 않는 발자국의 선들, 그 선들을 나는 길게 늘여보려 애썼었다.
아스팔트 딱딱한 도로는 너무 어두웠다.
Y의 목소리는 그렁그렁한 큰 울림을 갖고 있었지만, 그 끝은 늘 자기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가곤 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몹시도 술에 취한 채, 가로등 붉은 불빛이 낡은 담벼락으로 떨어지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입구의 구멍가게에서 산 소주 한 병을 반쯤 물마시듯 들이킨 그는,
술병을 건네주며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한참 동안 같은 말만 되뇌었다.
“씨팔, 씨팔... 씨팔”
병은 깨졌고, 그의 손은 어깨를 놓치게 되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괜시리 가로수에 발길질을 해댔었다.
S와 처음 만난 건, 그가 어떤 일에 휘말려 있던 때였다.
나는 우연히 제삼자의 입장이 되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게 되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작고 날렵한 뿔테 안경 속의 눈동자로 나를 맞이하곤,
클림트의 그림이 새겨진 머그컵에 커피를 따라 주었다.
사건의 전말을,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그는 너무나도 차분히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어깨가 보였다.
왠지 모르게 그 어깨를 잡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손은 이미 식어버린 머그컵을 매만질 뿐이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조금 떨다가 겨우 미소를 지어내곤 푸념처럼 말했다.
“누가 그랬어. 나는 온실에서 키워진 것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일부러라도 상처를 줘야 한대.“
그렇게 어색하게나마,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가 속내를 꺼내고는, 약해 보이지 않으려 늘 웃음을 담아낸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게 거리낌 없이 대하던 Y도, 나를 늘 조심스러워했다.
그가 내개 말을 거는 일도 드물었고, 내가 그에게 무엇을 물어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술에 취해 붉은 낯빛이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저 놈, 후후~으흐, 저 놈은 말이야, 후후...”
하는 마침표 없는 말을 간혹 꺼냈을 뿐이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항상 같았고, 언제나 엉엉 큰소리 내며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때로는 그저 메마른 큰 소리로, 때로는 절규하듯, 때로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나는 그 자신이, 그가 자주 부르던 ‘못다핀 꽃 한송이’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질곡이란 마술을 부리는 삶의 운명은 언제나 그를 쫓아다녔었던 것 같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었다.
“다음에, 다음번엔 말이지, 정말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보자구. 몸조심하고...”
S는 내게 미안하단 듯이 말했다.
“어쩌지. 전에 네가 사왔던 쥬스를 저 녀석이 그만 자판에 쏟아버렸지 뭐야.
자판은 쓰지도 못하게 되었어. 그보다 네가 사온 건데 얼마 마시시도 못하고...
미안해서 어쩌지?“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말이야, 내가 못했던 걸 네가 했으면 좋겠어. 난 실패했어.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못했던 걸... 네가... “
그의 말을 내가 이해할 순 없었다. 그가 하지 못했던 것, 그가 실패했다는 것.
내가 할 수 있을 거란 것. 그것에 대한 물음이 내 머리 속에서 회오리칠 때
그는 다시 명랑하게 음악을 듣고 싶다 했다.
Goodbye sadness가 듣고 싶다 했다.
인연, 그리고 그 기억의 선이 언제 끊길지를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른이 되면.... 서른이 되면....을 말했던 S는 서른이 되자 누군가와 결혼해서 먼 곳으로
떠났고, 귀여운 딸아이와 부인을 남기고 Y는 갑작스럽게 쓰려져 일어나지 못했다.
일상은 내게 언제나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
제초제를 음료수에 타 마셨던 사람과의 기억,
봄날 하얀 목련꽃 아래로, 6층 아파트 창문에서 몸을 던졌던 사람과의 기억,
이제는 아련해진 몇몇 소중한 사람들과의 짧은 기억들을
시간에 묻어가며, 그렇게 일상은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