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요한 기념교회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노년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면서
에베소에서 살았다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A.D 6세기에 비잔틴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요한의 무덤이라고 전승되어온 자리에 큰 교회를 건축하여,
성요한 교회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도요한 기념교회
복원사업이 한창 중이더군요.
옛날 동전을 사라고 끝까지 따라다니던 현지인은
지금도 순례객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도요한 기념교회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는데 한 사내가 끝까지 따라옵니다.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이라면서 옛날 동전과 부스러기들을 보이면서 사라고 합니다
(노란 옷을 입은 권사님 옆에 따라 붙는 사내와, 입구 왼쪽에 서 있는 사내).
물론 거의 가짜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진품도 있다고 하는데
한 나라의 유물들이 이런 식으로 관광객들에게 유출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짜라고 할지언정
관광객들을 상대로 속이는 장사이니 기분이 좋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울러 입구에서 표를 파는 직원들의 불친절 또한
터키를 돌아다니는 동안 최악의 서비스였습니다.
사도요한의 무덤
이것이 사도요한의 무덤이며
네 기둥은 마태, 마가, 누가를 뜻한다고 합니다.
사도요한 기념교회
회교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기독교 유적이 이렇게나마 남아있는 것이
조금은 신기하기 까지 했습니다.
누가의 무덤
의사이며 동시에 역사가이며 복음전도자였던 누가!
그의 유해는 요한이 에베소에 있을 때 모셔다가
나중에 콘스탄티노플로 이장되었고 후에 머리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에 보내져 은쟁반 안에 보관되었고
몸은 파도바 시에 있는 성 기우시타나교회에 보관중이라고 합니다.
누가의 무덤
누가의 무덤임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던 황소그림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1장과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비유중 황소를 누가복음에 적용하여
황소복음이라 불렀기 때문이랍니다.
본래 처음부터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고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의 신전으로 사용하던 곳을
기독교 국가가 된 이후에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했다고 추측한다고 합니다.
누가의 무덤
미국에 있는 의사들과 우리를 안내했던 이승수선교사 등이
주축이 되어 이곳에사 한글 표시판을 세웠다고 합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우리의 한글을 발견하니 마음이 좋더군요.
말은 있으나 언어가 있는 미문명국가에다가
우리의 한글을 가르치려는 사업이 추진중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문화예술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우리말과 맞춤법 강의 시간에 들음)
우리의 한글이 너무나 과학적이고 배우기 쉽기 때문에
세계언어학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세종대왕상도 있다고 합니다. 언어학에 공로한 사람들에게 주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 한글날도 그렇고...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덤 전체 모습입니다. 오른쪽에 황소 그림이 있고
가운데 부서진 곳에도 있습니다.
오데온
2세기에 세워진 곳으로 도시의 행정관들인 상원의원들의 집회 장소였다고 합니다.
23줄의 계단에 1,4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때로는
콘서트 같은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옆에는 기원전 3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통치 때 세워진
시청건물인 프리타네이온이 있습니다.
크레테스 거리
셀수스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거리입니다.
크레테스 섬에서 왔다고 여겨지는 크레테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은 신성한 횃불을 운반 할 때 이 도로를 이용했고,
그들을 본 모든 시민들은 옆으로 길을 비켜주었다고 합니다.
크레테스 거리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본 거리!
그 옛날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련지 상상이 갔습니다.
가이드 선교사님 말 안듣고 혼자 올라가서 냅다 담아씁니다.
귀찮은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을 듯...
트라잔 분수
2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부분적으로 복구가 되었습니다.
정면에는 실물크기의 트라잔 황제의 동상이 있었지만 현재는
오른쪽 발과 몸통의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높이 12미터의 2층 건물이며, 앞쪽으로 삼면에 물웅덩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도미티안 신전
플라비안 왕조의 후손이었던 도미티안은 81년에 황자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직한 행정관이었으나 후에는 "군주이며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도미티아의 묵인하에 암살된 후 원로원의 포고령에 의해
모든 동상들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이 신전은 도시에서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로 그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헤라클레스 게이트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에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앞쪽의 승리의 여신인 니케의 부조물로 장식된 돌덩이는 원래
이문에 세워져 있었으나, 헤라클레스와 네마에안 사자의 싸움을 묘사한
부조물이 새겨진 두 개의 돌덩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드리안 신전
2세기에 만들어진 고린도 양식의 신전입니다.
4세기에 복구작업을 걸쳤고, 최근에는 남아있는 신전의 돌조각들을 가지고
새로이 복구되었습니다.
이 신전은 비교할 데 없는 로마 건축의 뛰어난 본보기라고 합니다.
여러 인물들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행운의 여신 니케
부조위에 새겨진 니케!
나이키가 여기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테라스 집들
몇 채는 1985년 복구공사가 끝났을 때 처음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도시의 부유한 시민들이나 귀족혈통을 가진 성직자들이 살던
일층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모자이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증막까지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이 상상이 갑니다.
스콜라스티시아 목욕탕의 열탕은 지금도 보존상태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수세식 변기통도...
멤미우스 기념비
이 기념비는 BC 86년에 에페수스에서의 로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써
독재자 술라에 의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에페스인들은 로마에 반항하여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폰투스의 왕인 미트리다테스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이 지역에 있는 모든 로마시민들에 대해 대 학살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하룻밤에 8만여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기념비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승리의 개선문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같이 동행했던 일행분들이십니다.
물론 저는 사진을 찍느라고 빠졌습니다.
세계 최초의 광고판
터키 에베소의 셀수스 도서관 앞에는 창부의 집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르켜 "사랑의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도서관 주변에 유흥업소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물이 여러군데 남아 있습니다.
이 대리석 광고판도 "사랑의집"을 나타내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 "사랑의집"을 가르키는 안내판이 대리석 거리 바닥에 남아 있습니다.
이 안내판에는 발모양과 하트와 조그만 동그라미와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장식한 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옛날 로마 여인의 발모양은 하나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발이 예뻐야 몸매와 성품도 아름답다는 것이 로마인들의 통계학적인 관념이었다고 하더군요.
하트는 마음과 사랑을 뜻하는 것이고, 동그라미는 돈을 뜻한다고 합니다.
여인의 가슴에는 지금은 지워져 알 수 없지만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은 발자국이 표시하는 방향으로 오세요.
이곳에 올 때는 약간의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여인들의 사랑과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발자국보다 작은 미성년자는 오지 마세요"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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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지역을 몇 장 담아 보았습니다.
이 에베소 지역은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카이스터강과 메안더강이 에게해로 빠져 나가는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 도시였는데, 이 천연적인 항구는 점차적으로 진흙이 메워져, 현재 이 도시의 유물들은 바다로부터 6-8㎞ 떨어진 내륙에서 발굴되고 있습니다.
에베소가 폐허가 된 것은 대지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6세기 중엽 진흙으로 덮여진 항만에서 모기들이 생겨나 사람들을 괴롭혔고 모기가 가져다 준 말라리아 병 때문에 사람들이 이 도시를 버려두고 도망가고 12세기에 쳐들어온 셀죽 터키인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마저 이 도시를 떠났다고 합니다. 셀죽 터키인들이 회교도들인 때문입니다.
여행 당시 이 에베소 지역을 맨발로 다녔던 저는 세계최초의 광고판에
가만히 발을 한번 대어 보았습니다.
크기를 맞춰 보고 싶다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광고판에 한번그냥 발을 맞추어 보고 싶은 얄팍한 인간의 마음에서였습니다.
수천년전의 수많은 남성들이 윤락가에 드나들면서
맞추어 보았을 이 광고판에 다만 호기심으로 맞추어 보았지만
묘한 감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지난날의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광고판에 발을 맞추어 보았던 그들의 발자취는 지금 어디에 남아 있을까?
덧없는 인생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붙잡고 가야 할 곳은 어디이며
어디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지를 다른 어느 큰 성지순례지보다
비록 작은 광고판이었지만 짧은 순간에
많을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준 나에게는 의미있는 광고판이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셀수스(두란노서원)도서관과
바울이 재판받던 원형극장, 바울이 재판받으러 다니던 도로
몇 장의 사진을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