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사셨던 분들은 읽기가 부담스러운 문장이 있을것입니다. 이러한 문장은 제가 지어낸것도 아닐뿐더러, 6년동안의 남한생활을 바탕으로 느꼈던 여러가지 감정들과 질문들 혹은 저에게 하는 이야기를 종합하여, 작성한것임을 밝혀둡니다. 물론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을 놓고 다수를 평가한다는건 심각한 오류라는것을 알지만, "몸에 좋은 약이 쓰다"는 속담을 되새기면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북한-남한으로 사용되었다는것을 참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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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한인인가. 남한인인가?
천국에 오다.
2001년 6월. 미얀마 항공을 떠난 비행기가 태국을 거쳐 남한에 도착할 무렵 천국에 온듯한 느낌이였다. 도로가 막힐정도로 많은 자가용승용차들, 하늘을 찌를듯 높이 선 대형건물들. 호화스럽게 장식된 상업간판들,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 등 모든 것이 나에겐 낯설었지만 천국에 온듯한 감정은 숨길수가 없었다.
그렇다 난, 배고픔과 막연한 자유의 환상을 품고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은 땅에 홀몸으로 정착한 탈북자다. 남한에서 보낸 6년, 매일 아침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번갈아 보며,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평범한 대학생이다.
난 집에서 2남1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꾸지람이 많은 엄마와 점잖으신 아버지 밑에서 인민학교, 고등중학교 9년간의 생활을 하고,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어머니가 새로 시집을 가게 되자 집을 뛰쳐나온 방랑아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3년동안 한국인 선교사의 보살핌속에서 3년간의 생활을 하고 2001년 "자유의 땅"이라고 부르는 대한민국으로 왔다.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난 남한에 온지 보름도 안되어 19살이라는 흔히 않은 나이로 안산동산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나의 주장과 달리 남한으로 데리고 온 선교사는 굳이 고등학교를 고집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고등학교 1학년부터 다니게 되었다. 덕분에 3년동안 운명에도 없었던 “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고등학교시절을 보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라는 말도 몰랐다. 남한은 이 용어가 우리말로 굳어진지 오래지만, 고유어를 고집하는 북한인인 나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더 황당한것은 친구들도 이 말의 뜻을 모르는것이였다. 아니,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다”가 맞는 말일터이다.
"형이 우리학교 와서 좋아요-_-;"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본 모의고사가 점수를 발표하는 날이였다. 큰 기대는하지 않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내가 꼴찌였다. 하지만 나는 성적과 등수에 관해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공부보다 남한 문화적응이 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였다. 더욱이 안산은 고교평준화가 안된 지역이라 "안산동산고등학교"는 그야말로 수재들만 들어올수 있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남한에 온지 15일만에 학교에 들어가서 등수를 바라는것은 큰 무리라는것을 난 짐작부터 알고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의고사 등수를 발표한후 한 친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친구: "형이 우리반에 와서 너무 좋아요-_-;"
나 : "왜?"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친구: "형이 들어오기 전에는 내가 꼴찌를 맡았었는데, 형이 들어와서 꼴찌를 면했어요-_-;"
그냥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그냥 북한사람이라는 관심에서도 아니고, 또 반가워서도 하는 말이 아니였다. 물론 이 친구는 반은 장난으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겠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면 이 친구는 나를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더불어 나에게는 남한의 단면적인 교육체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해주었던 것이다.
경쟁이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 하자. "내가 왕년에 잘 나갔다", "북에서는 학습담당위원(학급에서 학습을 책임진 간부) 을 할정도로 공부를 잘했어.." 등 자기 자랑을 하면 사람들은 비웃을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난 북에서 공부만큼은 꼴찌는 아니였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 공부는 둘째치더라도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스트레스, 커리큘럼 등 외래어를 몰랐고, 그렇다보니 학교친구들과 만나도 대화가 통할리 없었다.
그땐 정말 죽고싶은 심정이였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수학공식에서 사용하는 용어등 모든것이 나에겐 생소했고, 그렇다보니 수업시간에 설명하는 거의 대부분을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수업시간동안은 정말 지루했고, 쉬는시간에는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아서 심심했다. 난, 남들보다 3살이나 많은 형의 신분이였고, 북한에서 온 이방인이였고, 대화도 제대로 통하지도 않은 외계인이였고, 공부도 학급에서 꼴찌인 처지를 고려했을때 나와 놀아줄 사람을 생각한다는것은 나에겐 정말 "꿈" 과 같은거였다. 나와 놀아줄 사람도, 나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도, 나의 눈물을 닦아줄 사람도 대한민국 그 어디에든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신문이였다. 당시 우리집은 (안산다리공동체) 한겨레 신문을 구독했었고, 난 매일 학교로 가지고 갔었다. 1면부터 광고까지 한글자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었지만, 이해가 될리 없었다. 그렇다고 신문마저 읽지 않는다면 정말 학교에서 할일이 없었기때문에 하루종일 신문만 읽었다. 내가 가지고 갔던 신문을 다 읽고나면 주변의 친구들이 가지고 온 경향신문이나 조선일보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읽다보니 나름대로 한겨레의 논조와 조선일보의 논조 또한 해석이 가능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겐 큰 사건이 터졌다. 2002년 6월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서해교전이 터진것이다. 학교가는 버스라디오에서부터 TV, 신문 등 모든 매스컴이 일제히 특집으로 보도했고, 그것을 접했던 나의 심정은 정말 참담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학교에서 터졌다. 당시의 한문을 담당했던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서해교전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북한을 쓸어버려야 한다느니", "탈북자를 받지 말아야 한다느니" 등 탈북자였던 내 앞에서 험한 이야기를 하시는거였다.
한문선생님과 학급친구들이 나의 신분을 모르고 있었다면 꾹 참았을것이다. 하지만 전교생이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 선생님 또한 잘 알고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의미는, 나한테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후 손과 발이 덜덜 떨렸고, 머리속은 윙윙 울리는것 같았다.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선생님 한문시간인데 수업합시다" 드디여 내가 정적을 깨고 한마디 했다.
"강철 너 이리 나와!!" 한문선생님의 호령이였다. "난 강해!, 난 강해!" 이런 마음으로 칠판 앞으로 걸어나갔다. "선생님한테 무슨 버릇이야!" 라는 호통과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였다. "에라 이런 학교에서 멀 배워? 그냥 다른 친구들처럼 집에서 놀아야겠다" 라는 생각과 동시에 난 이미 안산동산고등학교 자퇴를 결심하고 있었다.
자퇴를 결심한 나였기에 무서운것도 예의도 없었다. "씨X 한문시간이면 한문을 가르쳐야 하잖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조선일보의 논리로 서해교전을 해석하지 마! " 이번엔 나의 호령이였다. 40명의 학생들이 앉아있는 친판앞에서 선생님과 나의 대결이였다. 생각보다 내가 당당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알수 없지만, 선생님의 자존심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 너 따라와!"
한문연구실(?) 로 선생님을 따라갔다. 앉으라고 자리까지 친절하게 마련해주더니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 난 서해교전에 대해서 조선일보의 논리와 한겨레의 논리로 설명하면서 북한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선생님을 설득시켰던것 같다. 내 말에 동조했는지, 아니면 내가 측은해보였는지 알길이 없지만, 선생님은 사과하기 시작했다. 정이 그리워서였을까?, 아니면 억울해서였을까? 선생님의 사과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속된말로 쪽팔리게 눈물을 닦을수 없었다. 며칠을 굶었어도, 중국에서 칼에 찔렸어도, 감옥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내가, 쪽팔리게 형이 돼가지고 눈물이 나왔다.
한문연구실에서 나온후, 세수를 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평상시같으면 쉬는시간에 학급친구들이 떠드는것이 정상이였으나, 그날은 평온했다. 아니, 내가 무서웠기 때문에 신경을 거슬리고 싶지 않았을것이였기 때문이다. 안산 실업고 짱이라고 하는 학생부터, 나이트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1:1, 2:1 로 상록수역에서 평정했던것에 대해서 전교 학생들이 이미 알고있었으니까...
물론 이것이 고등학교 시절 전부는 아니다. 좋은 추억도 많다. 매번 교장실로 불러서 기도해주시고, 성인식도 치뤄주시고, 학용품도 주시던 유화웅교장선생님, 나에게 "강냉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시고, 나와 매일 장난쳐주시던 김재호 체육선생님, 나에게 "오마이뉴스"를 보라고 강력히 권고하시면서, 광주에서 한주먹 했던 김창하선생님,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어사전을 주시면서 남한언어를 공부하라고 하시던 선생님을 비롯하여 동산고등학교 모든 선생님들이 도와주셨다. 그리고 나를 한국에 데리고 와준 이영석 삼촌과, 중국에서 방황하고 있는 북한사람들을 위해 2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주신 차승만 삼촌도 적응에 보탬에 될 이야기면 뭐든지 설명해주셨고,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아야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북한인?, 혹은 남한인?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북한과 관련하여 특강제의가 들어오곤 한다. 북한에 대한 진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겠다는 사명감때문에 혹은 적은 수입의 강의료때문인지는 알수 없지만 될수록이면 응하는 편이다. 특강을 하고나서 1시간가령 질의응답시간을 가지면, 과연 저 사람이 대학생일까 하는 의문이 들정도로 이상한 질문이 쏟아졌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북에도 술 담배가 있습니까?", "북한에도 사탕과자있습니까" 부터 비롯하여 "김정일한테 정말로 기쁨조가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어떤 기준으로 뽑고..." "사람고기 먹어보았습니까?" 등등 이상한 질문들이 수없이 쏟아지곤 한다. 그래도 대학생이면 북한과 남한에서 살면서 가장 큰 차이점이나 공통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질문을 해야 체면이 서겠지만, 그러한 질문은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정도다.
사람들이 자주 하는 질문들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공통점이 존재한다. 반세기 넘게 서로 적대관계로 있어서 북에 대해 왜곡되게 배워서인지는 알수 없으나, 북한을 이상한 나라로 보는것 같다. 50대 사람들과 얘기해보다면 자신들은 북한사람들이 "뿔"이 있는줄로 알았다는 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은듯 하다. 물론 지금은 그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지금 신세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얼마 벗어나지 못한듯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북에도 술이나 담배, 사탕과자가 있느냐, 식인종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고기를 먹느냐는 질문이 나올수 있을까.
남한에 살다보면 북한에 대해서 궁굼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연령대가 다른데, 20대는 주로 "저리가서 혼자 놀아!"라는 반응, 30대는 "신기하다"는 반응, 40대는 "공감한다"는 반응이다. 그래서 종종 20대인 친구들에게 “군대에 갔다오면 내 얘기가 어느정도 이해될것”이라고 농담조로 이야기 하곤 한다. 반면 40대이상과 이야기하면 “아 김치국물에 말아먹는 국수가 최고지", "도시락 귀퉁이에 고추장을 싸가곤 했지” 라고 한다. 이런것을 비추어볼 경우 북한은 남한의 60~70년대와 비슷한것 같다.
난 북한사람도, 남한사람도 그렇다고 외계인도 아니다.
북한이 지금 남한의 60, 70년대와 비슷한것 같으니까 한마디만 더 해보자.
그렇다면 나는 영화에서 흔히 볼수 있는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서 2000년대로 온것일것이다. 그런 내가 주위 상황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주위에서 부르는 노래도 다 낯선 것이고, 입고 다니는 옷도 새로운 패션일 것이고 건물도, 언어도 모든것이 새로울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성에서 날아온 외계인도 아니고 유럽에서 온 이방인도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얼마 전에 깨어나 혼돈을 겪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 누군가 우쭐한 얼굴로 “너 이거 알어?”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불쌍한 사람이다. “그때는 이런게 없었으니 모르는게 당연하지”라고 해야 맞는 말일것이다. 기분 상하게 “너 이런 것 못 먹어봤지?”가 아니라 “옛날에는 이런게 없었기 때문에 모르겠지?”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듣는 사람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 처지에서 보자면 살면서 겪는 모순이 많다. 우리는 분명히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사건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한 사건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보기를 강요받았다. 남한 사람이 빨갛다 라고 배울때 나는 북한에서 파랗다로 배웠다. 남쪽에서 빨갛다고 하면 나는 파랗다고 말했을 것이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보다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혼란을 겪으면서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땅에서 6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왔다. 아니 지금도 이러한 혼란이 진행형이다.
내가 경험한 세 나라는 단지 시대와 빈부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가치관을 더욱더 혼란스럽게 한다. 북한은 교육과 사회복지 혜택에서는 사회주의 노선을 적용한다. 그러나 ‘선군사상’이니 ‘자폭정신’과 같은 구호에서 드러나듯 군국주의 사회와 흡사한 면도 많다. 여기에 성분을 따지는 간부선발 원칙과 수령을 아버지로 섬겨야 한다는 주체사상의 종착점, 남성 우월주의 생활환경 등의 봉건적, 유교적 관습도 사회 곳곳에 넘쳐난다. 내가 태어나 살았던 북한은 이처럼 사회주의와 군국주의, 그리고 봉건주의가 공존하는,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나라였다.
그런 내가 잠시 들른 중국은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 마인드가 복합된 나라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TV를 켜면 뉴스 첫머리에 “장쩌민 동지의~” 하며 떠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북한 TV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남한에도 "땡전뉴스"라는 이름으로 땡하는 동시에 전두환 대통령은~ 라고 시작한 시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것이다.
그러나 뉴스 도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광고를 보면 사회주의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진다. 광고 얘기가 나왔기에 한 마디 더 하자. 지금 중국 광고를 떠올리면 길바닥에서 목청껏 소리치다 못해 꽹과리까지 두드리며 "삥걸라~" ,"삥걸라~"라고 다니는 행상이 떠오른다.한국의 광고가 소비자의 섬세한 감성을 자극한다면 중국 광고는 “사세요, 사세요∼”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댄다. 요란한 사회주의적 정치선동에 익숙해진 중국 소비자를 겨냥한, 광고주의 탁월한 전략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중국을 거쳐 도착한 남한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에 걸맞게 정치체제와 사고방식,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자본주의 국가였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사형수의 이야기가 있듯이 돈이면 모든것이 다 되는 사회였고, 돈없고 빽없으면 인간취급도 받기 힘든 곳이였다. 과연 이곳이 같은 동족의 땅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북한과 달랐다. 사회주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복합, 자본주의. 이렇게 지구상에 현존하는 세 유형의 정치, 사회, 문화 형태를 두루 경험하며 겪은 가치관의 혼돈은 참으로 컸다.
사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나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남한에서 고등학교 다닐 당시만 해도 종이에 글을 쓰고 지웠다 하는 방식이 편했지만 이제는 이게 편하다.
언젠가는 북한 사람 모두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남한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북한에 있는 사람보다 적어도 몇십년은 앞선 세상에 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나는 북한의 몇 십년 훗날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수구초심"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듯이 아직도 같은 탈북자의 집에 찾아가 먹는 북한 음식이 더 맛있고, 남한의 친구들과 얘기하는것보다 북한친구들과 얘기하는것이 나에게는 더 편하다. 길거리를 걸어가는 아가씨의 짧은 미니스커트나 가수의 열창에 열광하는 10대 청소년도 아직 낯설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남한의 옛 사람인지 북한의 미래인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신은 나를 선택했다.
지금까지 내 운명은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다. 여지껏 1주일에 한번씩 로또를 해보지만, 행운이 떨어져 당첨된 일도 없고, 이쁜여자가 다가와 사귀자고 속삭이는 행운은 없지만, 노력한 만큼은 결실을 거뒀다. 이것도 행운이 아니겠는가. 또 10번의 조-중 국경을 넘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익사해도, 난 해당이 안되었고, 같은 감옥에 수감되었던 친구가 죽었어도 난 죽지 않고 여기서 글을 쓰고 있다. 다른사람에 비해 고등학교도 무사히 마쳤으며 이젠 대학교 졸업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난 이것을 "신의 선택"이라고 부른다.
반면 잃은 것도 많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이다. 신이 모세에게 이방인의 삶과 가족과의 이별을 주었다면, 신은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시켜주었다. 나는 가족을 남겨두고 기약 없는 길을 떠났다. 눈물 훔치며 집을 떠나던 그 순간이 영원한 이별의 순간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난 운명에도 없었던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된것이다. 신은 항상 선택된 자에게만 불행끝에 행복을 주시는가부다...
그러나 또 아침이 밝아오면 태연하게 등교해서 웃으며 하루를 보낸다. 외로움과, 남한사람들의 이방인 취급도 싫었지만 난 지금까지 아무 탈없이 살아왔다. 착한 탈북자 중 일부는 훌륭한 남한 여성을 만나기도 하고 좋은 양부모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소수일 뿐 탈북자 대다수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혈육도 친지도 선후배도 없는 세상에서 새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 아무리 인간성 좋고 성실하다 해도 남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가진것도 없는 가난한 탈북자를 친구로 여기는 남한 사람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좀 생각해준다면 동정의 대상이라고나 할까. 나 자신, 무슨 죄를 짓고 남한에 온 몸이 아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아니 주위의 시선이 마치 내가 죄인인양 바라보는것 같다.
남한으로 오는것이 현명한 선택인가.
나의 전공이 신문방송학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평소 탈북자 관련해서 인터넷에 실린 기사보다는 리플을 더 꼼꼼히 보는 편이다. 탈북자 관련 기사에 가장 많이 붙는 리플은 ‘남쪽이 발전하는데 벽돌 한 장 보태주지 않은 당신들에게 우리 세금으로 3000만원이 넘는 정착금을 주는 것이 아깝다’는 것이다. 나 또한 정착금을 받은 사람이지만 이런 글을 볼 때면 받은 돈을 모두 돌려주고 한국을 떠나고 싶다. 다른 탈북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기껏 주고서도 이렇게 얘기하면 오히려 “감사”가 “분노”로 변한다.
탈북자들이 벽돌한장 쌓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나는 솔직히 남한의 발전은 ‘조국을 위해 벽돌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진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밝혔듯이 모든 사람이 자기 이해관계를 따라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 남한이 이만큼 발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탈북자에게 나라를 위해 벽돌을 쌓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상하지 않을까. 남한 사람에게 ‘북한을 위해 하루 30분만 더 일하자’고 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통일을 위해, 남조선동포들을 위해 하루 1시간 더 일하기 운동이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정치선동 여부를 떠나 북한 주민은 순수한 심정으로 1시간을 남조선 동포를 위해 바친다고 생각했다. 이건 단적인 예지만, 북한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한 심정인지 생각해보시라.
반면 남한은 어떤가. 쌀이 썩어간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썩어간다. 얼마전, 내가 다니는 학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적이 있다. 학생들이 먹다 남은 밥을 버리는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모범을 보여야 할 식당에서 학생들에게 판매하고 나머지인 국과 반찬을 버리는것을 보면서, 이밥에 고기국을 한번 먹어보고 죽는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하는 북한사람들이 생각났다. 배고파서 죽어가면서, 내가 집에 들어오면 주겠다고 옥수수밥 누릉지를 주머니에 넣은채로 죽어간 할머니가 생각났다. 물론 이건 남한의 한 면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뿐이다. 곳곳에서 썩어가고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을 생각해보시라.. 오죽하면 음식물쓰레기로 인해서 한해에 몇조원이라는 돈이 투자된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겠는가? "흥부와 놀부"라는 전래동화가 있듯이 동생은 배고파서 죽어가고, 형은 음식이 너무 많아 돈주고 버리는게 과연 정상적인것인가. 인간의 기본소양인 이성과 감정이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시라.
나의 이런 생각을 이해해줄수 있는 남한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궁굼하다. 아니 정말 있을까 의문이 간다. 얼마 안되는 식량을 북한에 보내주면서 등가교환을 요구하는 몇몇의 언론들과 사람들을 보면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든다. 아예 모기한테서 피를 짜먹으라고 말하고 싶다.
“기름과 물이 섞일수 없다”는 북한속담이 있다. 전 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전제로 남한에서 탈북자와 주민간의 통일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거창한 한반도 통일론도 그렇다. 1만명도 안되는 탈북자도 통일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2500만의 북한주민을 통일시키겠다는것인가.
북한사람들이 배운게 없고, 무식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당신이 북한에 가서 산다고 생각해보라, 아마 남한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보다 당신은 더 적응하지 못할것이다. 학문도 그렇다. 한번 남한으로 온 탈북자들의 인생을 살아보고 난후 과연 그런 얘기가 나올까 싶다. 또한 난 인생에 학문이 전부라고 보지 않는다. 북한속담에 "백번 들은것보다 한번 보는것이 낫다" 는 것이 있고 남한에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성어가 있다. 물론 경험과 학문이 합쳐지면 금상첨화일것이다. 난 이런 사람들에게 비싼 서울대 과외에 돈을 뿌리기전에 인간의 기본소양부터 갖춰라고 권하는 바이다.
몇몇의 남한 사람들은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북한보다 발전된 국가에서 사는 자신이 다행스럽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진정한 행복을 아는가. 인간의 욕구가 행복해지는 데 있다면 나는 남이든 북이든 중국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데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행복한가.
살다가 문뜩 자기 자신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랐을 때 구름 아래 성냥곽처럼 보이는 아파트의 한 공간을 가지기 위해 일생을 아등바등 사는 인생들이 참으로 불쌍하게 여겨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땅에 내리고 나면 나 또한 그런 인생을 살고 있음을 발견한다. 남한이 ‘경쟁에서 살아남자’라면 북한은 ‘굶지 말고 살아남자’이다. 남한이 배터져 죽는다면, 북한은 굶어죽는다.
생존이라는 문제에서 보면 남한이 훨씬 낫다. 그런데 남한 사람들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법을 잊은 것 같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그러니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인사가 없다. 집에 문 닫고 들어오는 순간 ‘아, 드디어 안전지대에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집밖에 나서면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