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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동 교수에게 던지는 공개질의2-<묵가 5월호 내용> - 3회연재

민진규 |2007.05.07 10:46
조회 42 |추천 0

< 문화평론가 김사민씨가 묵가 잡지에 기고한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김양동 교수에게 던지는 공개질의2 - 3회 연재



  3. 전각이 인장을 삼켰는가?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개념정의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 교수는 전각(篆刻)에 대해 ‘협의로는 인(印)을 각(刻)하는 것을 가리키나, 일반적으로 완성된 인장(印章)까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인장이란 틀 안에 전각이 있다는 여초 김응현의 견해와는 달리 김양동은 전각이란 틀 안에 인장이 포함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역사에 대한 무지와 무(無) 개념이 낳은 결과로 보인다.

  유물로 전하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고대 은나라의 인장이 3천년의 역사를 가졌는데 비해 그가 말하는 전각의 역사는 고작 400년의 역사를 넘지 못한다.

  김양동 교수의 주장을 빌면 전각이란 용어는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의 인물인 주량공(周亮工, 1612~1672년)의 에서 인을 다루는 사람을 ‘전각가’라고 이름붙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에 따르면 은 주량공의 말년에 집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400년 역사를 가진 전각이 3000년 역사를 가진 인장을 포괄하는 용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개구리가 황소를 한 입에 삼켰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서예평론가 김기동은 란 글에서 ‘오랜 세월동안 새(璽), 인(印), 인장(印章), 인신(印信) 등으로 불려왔던 인장의 명칭은 무시된 채, 후대에 사용되어진 전각이라는 명칭 속에 종래의 명칭을 분류한다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개념정의에서부터 잘못되다보니 이후 인장과 전각을 나누는 기준 역시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으며, 시대구분도 일정한 기준도 없이 결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에서 ‘고대 인장은 그 사용방법에 따라 봉니(封泥) 시기와 주인(朱印)시기로 나눈다. 봉니 시기는 종이 사용 이전 주로 청동인으로서 죽간(竹簡)이나 목독(木牘)을 묶은 진흙 위에 찍던 시기이며, 주인 시기는 종이와 인니의 사용이 시작된 시기 즉 420년 동진 이후를 말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김양동 교수는 이 같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반면 중국의 전각학자 등산목(鄧散木)은 김양동 교수와 전혀 다른 논지를 펴고 있어 주목된다. 등산목은 전각학이란 책에서 ‘인(印)은 최초 목관에 점토를 메우고 그 봉인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황제로부터 진실한 사자임을 표시하는 증거로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즉 종이가 없었던 시점에도 인장은 황제의 신물(信物)로 존재했다는 말이다.

  


 

중국의 전각학자 등산목(鄧散木)



  등산목이 옳은가, 김양동이 옳은가?

  김양동 교수의 고대 인장에 대한 시대구분법이 옳은지 등산목의 주장이 옳은지는 생각의 방향만 달리하면 금새 드러난다. 인장은 종이와 진흙에만 찍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완원(阮元)의 산우금석지(山右金石誌) 권10에 따르면 돈황에서 발견된 서기 1세기 정도 된 비단에는 검은색 문자가 찍혀있다고 한다.

  비단, 먹, 인장 등은 상(商) 대에도 이미 존재했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왕실에서 짠 비단을 어의(御衣)로 사용하였으며, 개선장군에게 금포(錦袍)를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가 기원전 1100년이다. 종이가 발명된 것이 AD 100년으로 볼 때 무려 1천 년의 시간의 차이가 난다. 돈황에서 발견된 ‘문자가 찍힌 비단 유물’은 인장이 봉니로 시작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이 같은 증거들로 볼 때 김양동 교수의 시대구분은 객관적인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재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중기 이전은 인장시대로 그 이후를 전각시대’로 나눈 부분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

  먼저 전각의 틀 안에 인장이 포함된다고 정의해놓고서는 인장시대와 전각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인장은 전각의 하위개념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전체를 전각시대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인장사를 인장시대와 전각시대로 나눠 기술한 기준은 앞에서 언급한 ‘실용성과 예술성’이란 잣대였다.

  그렇다면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조선의 옥새나 어보, 현재의 국새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그의 잣대로 볼 때 옥새는 전각이 아니라 인장에 속한다. 중국 인장사(印章史)를 간추린 에서는 다음과 같이 옥새의 유래에 대해 밝혀놓고 있다.

  “새(璽)는 곧 인장(印章)이다.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제후와 대부 씨족의 족장들의 인장에 대한 통칭이었다. 그러나 새(璽)의 의미가 보(寶) 보다 높은 품계로 진시황이 전국새(傳國璽)를 제작함으로써 천자황제의 높임말만을 새(璽)라 일컫게 되었다.”


[다음연재글]

4. 인장은 예술성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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