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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감동이야기"

신광철 |2007.05.07 18:43
조회 165 |추천 0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감동 스토리와 경치를

 

   송부 드립니다. 뜻있는 5월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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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어느 일류대 졸업생이  
한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사장이 면접 자리에서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을 목욕시켜드리거나 닦아드린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다." 라고 그 청년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부모님의 등을 긁어드린 적은  있나요?" 라고 다시 묻자
청년은 잠시 생각했다.

"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등을 긁어드리면  
어머니께서 용돈을 주셨죠."

청년은 혹시 입사를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사장은 청년의 마음을 읽은 듯
"실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위로했다.

정해진 면접 시간이 끝나고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세요"  
하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닦아드린 적이 없다고 했죠?
내일 여기 오기전에  
꼭 한 번 닦아드렸으면 좋겠네요.

할 수 있겠어요?  

청년은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반드시 취업을 해야하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그의 학비를 댔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는 도쿄의 명문대학에 합격했다

학비가 어마어마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그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 해야 할 차례였다.

청년이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일터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시니까
틀림없이 발이 가장 더러울거야.
그러니 발을 닦아드리는게 좋을거야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아들이 '발을 씻겨드리겠다'고 하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발을 닦아준다는 거니?"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닦으마!"
어머니는 한사코 발을 내밀지 않았다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닦아드려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렸다.  

"어머니 오늘 입사 면접을 봤는데요"
"사장님이 어머니를 씻겨드리고 다시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꼭 발을 닦아드려야 해요.

그러자 어머니의 태도가 금세 바뀌었다.
두말없이 문턱에 걸터 앉아  
세숫대야에 발을 담갔다.

청년은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어머니의 발등을 잡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까이서  
살펴보는 어머니의 발이었다.

자신의 하얀 발과 다르게 느껴졌다
앙상한 발등이 나무껍질처럼 보였다.  

어머니!  
"그동안 저를 키우시느라 고생많으셨죠."
이제 제가 은혜를 갚을게요.

아니다 고생은 무슨....
오늘 면접을 본 회사가 유명한 곳이거든요  
제가 취직이 되면 더 이상 고된 일은 하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세요.

손에 발바닥이 닿았다.  
그 순간 청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들은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의 발바닥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저히 사람의 피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이 발바닥에 닿았는지 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발바닥의 굳은살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없었던 것이다.

청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더 숙였다.

그리고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새어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또 삼켰다.  

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한쪽 어깨에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청년은 어머니의 발을 끌어안고  
목을 놓아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다음날 청년은  
다시 만난 회사 사장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장님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셨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어머니의 발을 살펴보거나  
만질 생각을 평생 하지 못했을거에요.

저에게는 어머니 한 분밖에는 안 안게십니다.
이제 정말 어머니를 잘 모실 겁니다.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
.
.

"인사부로 가서 입사 수속을 밟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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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을밀대란 ' 윗미르터(윗밀이언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기에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논데서,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아들)'이

이곳을 지켜 싸운데서 온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대의 봄맞이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현무문 -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현무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북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모란봉(최승대가 있는 봉우리)과 을밀봉 사이에 있어 평양성 북방 방위의 요충이었다

 

 

 평양성 - 평양시 중구역 , 평천구역

고구려는 427년  조건이 유리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지난시기 수도방위의 교훈과 강력하여진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새 수도용 평양성을 건설하게 되었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 서, 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해자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잡았다.  그 둘레는 약 16km이다.

산성과 평지성의 잇점을 종합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창안해낸 평산성형식의 새로운 수도성이었다

 

 

정릉사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며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릉을 옮겨올때에 그앞에 지은절이다

오래 전에 허물어져 모습을 감추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찾아냈으며,

그에 기초하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발굴할 때 여기에서는 18채의 건물터와 10개의 회랑터, 1개의 탑터 , 그리고 물도랑이 드러났다.

 

정릉사 8각9층탑

 

보광전

 

 

東明王陵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이능은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5세기에 재축조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며,1993년에 대대적으로 개건되었다.

부여에서 태어난 동명왕(고주몽, 혹은 추모)은 어린시절부터 무술에 능하고 지략이 출중하였는데,

뜻을 같이 했던 오이, 마리, 협부 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동명왕은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고 외적들을 물리치면서 1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고 있다.

 

 

무관상 : 부분노, 부위염, 무골, 묵거

 

문관상 : 오이, 재사, 송양왕

 

제 당(전실높이 10m, 제실높이 13m)

 

 

 

 대동문 -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947년 중건 하였다가 1011년 화재로 파괴된 것을 그후 다시 세웠다가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 재건하고 1852년과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완성한 것이다.

 

 

 

 

開城市

 

왕건 왕릉 - 개성시 해선리

고려 태조 왕건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는

송악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온 만수산의 나지막한 등성이 위에 자리잡고 있다

943년에 창건된 것을 1994년에 개건하였다

 

開城市

왕 건왕릉 - 개 성시 해선리

 

 

선죽교 -  개성시 선죽동

선죽교는 고려시대 후기의, 길이 8.35m, 너비 3.36m인 석조 다리이다 .

『고려사』에 의하면 이 다리는 1216년 이전에 건설되었고 건설 당시의 이름은 선지교였다.

그후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 다리에서 피살된 때부터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난간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가 있는데 난간이 있는 다리가 선죽교이다.

이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사람이 다니지 못 하도록 설치한 것이고

난간이 없는 다리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그 곁에 새로 놓은 것이다 .

선죽교 옆에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로 전한다

 

 

 

 

숭양서원 - 개성시 선죽동

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1573년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

고려의 유학자였던 포은 정몽주가 살던 집자리에 고려시대 말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 1573년에 고쳐지어 문충당이라 부르다가

1575년에 사액을 받아 숭양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숭양서원에서는 정몽주 외 16세기의 철학가인 화담 서경덕과 17세기의 학자이자 문학가인

잠곡 김육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추모하여 제사하였다

 

범사정 - 개성시 박연리

개성시 박연리에 있는 1700년에 세운 조선시기 건물로 우리나라 3대 명폭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옆에끼고 대흥산성 북문으로 오르는 언덕길 중턱에 있는 정자이다 .

' 중경지'에는 1700년에 이 건물을 세우고 옛 이름대로 현판을 달았다고 쓰여있다

 

 

박연폭포 - 개성시 박연리

개성시 중심으로부터 26km 산성리의 천마산과 성거산에 끼어 계곡에 있고 높이는 35m이다.

폭포위에 박연이라고 불리는 직경 8m의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고모담이라고 불리우는 직경 40m의 용추의 물가에, 큰 '용암'이 수상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

용추의 동쪽언덕에 범사정이라는 절이 있다

옛 날 어느 만월밤 박진사라는 청년이 불고 있는 피리소리에 홀려서,

이 호수의 용녀가 그에게 반해 호수속으로 유인해가 버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슬픈나머지 폭포밑에 몸을 던졌다 .

그 이후에 호수를 박연이라하고, 폭포밑 담을 고모담이라고 부른다고한다 .

옛날부터 조선 3대폭포 중 하나이다

명유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松都三絶로 알려져왔다

 

 

 

공민왕릉 - 개성시 해선리

공민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1365년~1374년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왕릉이다.

2기의 무덤을 동서로 나란히 세운 왕릉형식으로,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서쪽)과

왕비(노국 공주)의 무덤 정릉(동쪽)으로 이루어졌다.

공 민왕은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공사를 직접 지휘하였다

 

 

고려성균관 - 개성시 방직동

고려성균관은 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고려시대(992년)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1602~1610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

고려는 건국초기 개경(오늘의 개성)에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를 세웠고 ,

992년에는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설립하고 여기에 국자학 ,대학, 4문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 6개 학과를 두고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국자감은 1298년에 성균감으로 ,1308년에 성균관으로 고쳐졌다.

 

 

개성성 내성 - 개성시

개성성 내성은 고려 수도성인 개성나성 안의 일부 구간을 막아 쌓은 성이다 .

축성 공사는 고려시대 말(1391)부터 조선시대 초(1394)까지 진행되었다 .

 

 

후 릉 -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

후릉은 조선 2대 정종과 안정왕후의 쌍릉이다.

정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왕후가 1412년에 먼저 죽고 1420년에 정종이 죽어 이 능에 묻혔다 .

 

 

황해도

 

해주 석빙고 -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고려 초기의 내부길이 28.3m, 내부높이 4.5m인 석조 건축물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咸鏡道

 

鏡城邑城 南門 - 함경북도 鏡城邑勝岩

경성읍성은 1107년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축조한 토성이다 .

1437년에 토성의 일부 구간을 석성벽으로 고쳤고 ,

현재의 성은 1616년부터 1822년까지 6년 6개월에 걸쳐 요고형 성벽으로 쌓은 것이다.

이 때 성문, 성가퀴, 해자, 못, 우물 등이 갖추어졌다

남문은 1756년에 무지개문(홍예문)으로 개축하였고,1838년에는 남문루를 고치고,

그후 수성문 현판을 달았다

성 벽의 높이는 9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성 사방에 각각 한 개씩의 성문을 내어, 정문인 남문은 수성문이라 하고 ,

동 문은 용성문, 서문은 호위문, 북문은 현무문이라 불렸으나

일 제시대에 파괴되고 현재 남문 만 남아 있다.

또 한 성가퀴 510개를 4m에 1개씩 배치하여

새 로운 공성무기에 대처토록 하였고,

이 성가퀴에 멀리 쏘는 구멍과 가까이 쏘는 구멍을 내었다 .

성 안에서는 54개의 우물자리와 12개의 못자리,

수 구문자리 등이 확인되었다

성 둘레에는 너비 34m, 깊이 4.5m의 해자가 돌려져 있었다 .

경 성읍성은 우리나라 동북방어의 중진으로,

이 성을 중심으로 위성방어체계, 중간방어 체계,

전 연방어체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성의 독특한 축성형식은 수원성 등 후세의 성들에 계승된다 .

 

 

 

 

 

동쪽 성벽

 

 

鏡城邑 정북사 - 함경북도 鏡城邑 勝岩

정북사는 조선시대 건물로, 1437년에 건립하였으나 현재의 모습은 1901년에 중수된 것이다.

12세기 초 여진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의 동북국경지대를 지키는데 공로를 세운 윤관을

추모하는 사묘로 세종 19년(1437년)에 세웠다.

윤관은 당시 우리나라 동북 국경지대에 침입한 여진족을 정벌하고 촌락 135개를 평정하였으며,

납 치되어 갔던 백성들을 찾아옴으로써 북방방위에 공을 세운 무관이었다

정북사에는 그 내력을 자세히 새긴 비가 있어 도움이 된다 .

 

 

윤관의 화상

비 각  (元帥臺에서 이곳에 옮겨옴)

 

 

鏡城 鄕校 - 함 경북도 鏡城邑勝岩

19세기 후반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勝岩山의 동쪽 기슭에 동해 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

남 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북사가 있고, 남 동쪽 약 1km되는 곳에는 옛 邑城이 있다.

다 른 향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건물들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적지 않게

파괴되어 지금은 바깥문, 대성전, 서무만이 남아 있다.

이 세 건물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구되어

오 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바 깥문 2층내부

대 성전

서 무

경 성향교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勝岩山의 동쪽 기슭에 동해 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

남 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북사가 있고,

남 동쪽 약 1km되는 곳에는 옛 邑城이 있다.

다 른 향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건물들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한 국전쟁을 거치면서 적지 않게 파괴되어

지 금은 바깥문, 대성전, 서무만이 남아 있다.

 이 세 건물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구되어

오 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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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文里24개돌유적 - 함경북도 鏡城郡會文里

함 경북도 鏡城郡 會門里에 위치한 발해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회문리 소재지에서 서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밭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돈화시 소재지 교외나 관지, 해청방, 요전자 등에서

알 려진 24개 돌유적들과 같은 성격의 특수한 기념건축물터이다 .

유 적의 기단은 남북 19.2m, 동서 13.5m의 장방형으로 생겼으며 ,

높 이는 1m 정도이다. 기단 위에는 한 줄에 8개씩, 세 줄의 주춧돌이 놓였다 .

주 춧돌이 놓인 부분은 남북 10m, 동서 7.8m이며,

주 춧돌 열 사이의 거리는 3.9m이다.

현 무암을 대충 다듬어 만든 주춧돌은 길이, 너비, 높이가

각 각 70-90cm 정도이며, 땅 속에 30cm 가량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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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군복 - 함 경북도 화대군

이 군장복은 조선시대(19세기 말)의 유물로, 구한말의 정치가

이용익 (李容翊, 1854~1907) (普成學院 設立者)이 입었 던 군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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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성읍성 - 함 경북도 온성군 종성

이 읍성은 두만강 연안의 방비를 한창 강화하던 시기인

15 세기 중엽에 처음 쌓고, 17세기 초엽(1608년)에 줄여

중 성을 쌓았으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

수 항루는 종성읍성을 개축하던 시기에 두만강 건너에서

우 리나라를 노리는

외 부 침략자들에게 대비하기 위하여 지은 3층 누정이다 .

기 둥은 흘림형으로 부정형의 주춧돌에 받들려 있고,

두 공은 없이 지은 집이다.

누 정에서는 우리나라에 침입한 적장을 잡아다가 항복을 받아낸 일이 있다 .

그 리하여 누정을 '수항루'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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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쌍계사 - 함경북도 화성군 부암리

 

 

애 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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