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교사 2002년 3월호 '잊지 못할 스승'에 실렸던 졸고입니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이
가슴 사무치게 그리워서 찾고 싶은 마음에 쑥스러움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립니다.
“그저 공부 못하는 것들은 싹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든지 해야지... ...”
한여름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찜통 교실에 날아든 나방 때문에 소동이 벌어진 열등반 학생들에게 학생주임이 소동의 원인을 공부 못하는 학생 탓으로 일축해 버린 말이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친척들에게 떳떳하지 못해 명절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반 평균을 깍아 먹는 놈’이라는 욕설을 밥 먹듯이 들으며, 성적표가 나온 날에는 엄마에게 밥을 더 달라는 말조차 하기도 미안해 하는 아이들이 있는 교육현실을 보면서 청소년들이 오로지 ‘공부’라는 한가지 기준에 의해 천편일률적으로 재단 당하는 모습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다름 아닌 <접속 신세대>, <도전 골든벨>과 같은 KBS의, 아니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프로그램을 만든 모 선배 PD의 이야기다. 아마 누구나 철저히 공감하는 얘기 일게다. 물론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할 정도로 공부를 못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담임선생님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전교등수 시장에서 훌륭한 상품성을 띄고 경쟁의 대열에 서서 전교 몇 등 밖으로 밀려났다고 밤새 머리 싸매고 공부할 만큼 영특한 학생도 아니었다. 하지만 필자의 학창시절 동안에는 찜통 교실에 날아든 나방 때문에도 싫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그 친구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흔히 ‘잊지 못할 스승’이라 함은 나의 인생의 중요한 획을 그을 정도로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거나, 혹은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못할 상황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거나, 또는 속칭 ‘날날이’ 혹은 ‘양아치’- 필자의 고교시절에는 그 용어가 나쁜 학생의 대명사였다. 물론 지금은 다르겠지만- 의 반열에서 선생님의 눈물나는 충고로 마음을 바꿔 일류대학에 합격했다거나 하는 경험을 통해 나오는 아주 감동적인 글이어야 하겠건만 아쉽게도 아니 어쩌면 불행하게도 필자에게는 그런 드라마틱한 경험이 없다.
지금 필자가 “잊지 못할 스승”이라는 지면을 통해 기억을 되새기고자 하는 선생님은 필자에게 따뜻한 말 한번 건넨 적이 없고 다정한 눈빛조차 나눈 기억이 없다. 아마 그 선생님께서는 필자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잊지 못할 스승의 주인공이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필자의 입장은 마치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늘 사고를 치고 화해를 나누는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형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막내 인삼이의 입장이라고나 할까?
세 마디로 끝나는 종례
고 1 때였다. 권혁남 선생님, 수더분하고 다소 촌티가 흐르는-나도 많이 컸다 선생님께 감히 이런 표현을 하고- 33살 노총각 국어선생님은 담임으로는 만점이었다. 종례는 늘 "별일 없지? 오늘 수고했다. 이상" 단 세 마디로 마무리 됐기 때문이다. 교육기관의 등급이 바뀌었다는 설렘보다는 지레 겁먹은 중압감으로 선생님이 주는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새내기들로서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담임이었던 것이다.
한 달이 지났을까? 선생님은 지나칠 정도로 말이 없으셨다. 따뜻한 말은커녕 작은 관심조차 없는 듯 보이는 무뚝뚝한 선생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한 분, 혹은 우리를 포기한 분이라는 전반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선생님들에게 경우에 따라 지독한 사랑을 받기도 하는, 매달 시험이 끝나고 붙는 전교 등수 벽보에 우리 반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올려놓는 몇몇 주력상품들에게도 선생님은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중간고사가 끝났을까. 선생님의 종례시간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어젯밤에 어디 갔었니?”, “야 임마, 10시가 넘도록 집에 안 들어가면 어떡하냐?”. “엄마가 별 말씀 안 하시던?” 하는 질문을 던지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은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질문을 받는 아이들의 답변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다 아시면서... ...”, “오늘은 일찍 들어갑니다” 아주 친근감 있는 짧은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화의 주인공은 우리 반의 주력 상품들이 아니라 조금은 미안한 표현이지만 퇴출유력 상품들이었던 것이다. 평상시에 학생주임의 호출이나 담임이 교장선생님께 혼나는 이유가 되는 그런 아이들이 선생님과 스스럼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알고 본즉 선생님께서는 반에서 문제를 일으킬만한 아이, 지나치게 조용하고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는 아이, 형편이 어려운 아이, 일년 내내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의 관심을 한번도 끌 수 없을 것 같은 아이, 20여명과 거의 매일 밤 전화 대화를 나누고 계셨던 것이다. 소외된 이웃의 진정한 친구라고나 할까? 시골에서 올라오신 노총각 선생님이 밤마다 자취방에서 무슨 일을 할게 있을까? 덕분에 밤거리를 방황하고 싶었던 친구들도 선생님의 전화를 받기 위해 일찍 들어가야 했고 학교에서 외로움에 충만해 있던 아이들도 집에서 전화를 받는 순간만큼은 그 어느 반의 반장이 부러웠으랴? 물론 선생님은 주력 상품들에게는 전화를 안 거셨다. 만약 그러셨다면 선생님의 월급으로는 전화비를 감당할 수 없으셨을 게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선생님의 지지율을 하늘을 찔렀다.
양복타기 대작전
교내체육대회. 종합우승을 차지한 담임에게 양복 한 벌을 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변변한 양복 한 벌 없이 회색 콤비 상의 단벌 신사였던 선생님을 위해 우리는 쉽게 뭉쳤다. 필자가 맹활약한 농구가 우승을 차지하며 기대를 했건만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쳤다. 우승 양복은 우리학교 베스트 드레서 이셨던 옆 반 교련 선생님께 돌아갔다. 참 불공평도 하지. 체육대회 다음날 종례시간 “느희들이 나 양복 해 주려고 열심히 했다며? 짜식들” 물론 그게 전부였다.
우리 반은 비록 반 평균 하위권을 맴돌았지만, 뭐 하나 유별나게 잘하는 것도 없고, 다른교과목 선생님들께 사소한 칭찬 하나 들을 거리 없는 그런 아이들이었지만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다. 수학이 지겹고, 영어가 짜증나고, 지리시간에 두들겨 맞고, 음악시간에는 떠들었지만 종례시간만은 즐거웠다. 아니 즐거울 틈도 없이 짧았다.
생애 첫 케이크
그러던 어느 날, 테니스를 즐겨 치시던 선생님의 회색 콤비 상의를 근처에서 농구를 하고 있던 필자가 받아 들게 됐고 우연히 떨어진 지갑 속에서 선생님의 주민등록증을 보게 됐다. 바로 내일이 생신. 우리는 쉽게 뭉쳤다. 10원, 100원짜리 동전을 모아 아주 큰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다. 만약 반장이 모으려고 했다면 힘들었겠지만, 워낙 서민층의 지지가 막강했던 터라 우리는 적지 않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선생님 생일 종례시간, 우리는 촛불을 켜 놓고 교실로 들어서시는 선생님을 향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 하지만 선생님은 촛불을 끄지 않으셨다. 정적이 흐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승의 은혜’ 노래가 이어졌다. 어느덧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33년을 살면서 생일에 케이크를 받아 본 건 처음이다.” 하시면서 선생님은 말문을 잇지 못하셨다. 시골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하시는 노총각 선생님께서 언제 생일 케이크를 받아 보셨을까? 눈물을 훔치며 선생님은 촛불을 끄셨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나눠 드시라는 우리의 요구를 뒤로 하고 선생님은 케이크를 일일이 잘라 60명 모두의 입에 친히 넣어 주셨다. 물론 그 날 우리 모두의 얼굴은 케이크 범벅이 되었고 다른 반에서는 우리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로부터 다시 평온한 한 달이 지났을까? 종례시간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우리에게 제과점 곰보빵 한 개씩을 돌리셨다. “오늘이 진짜 내 생일이다. 난 주민등록이 음력으로 돼 있거든, 맛있게 먹어라. 이상.”
▒ 김재원 * 따뜻하고 편안한 진행으로 사랑 받고 있는 그는 KBS 아나운서이다. 현재 <사랑의 리퀘스트> <세상은 넓다> <아침마당 토요이벤트> <희망을 함께 나눔을 함께> 등을 진행하고 있다. comely@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