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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플라멩고의 역사이신 마녀의 스승님 조광선생님_01

정선희 |2007.05.18 18:51
조회 86 |추천 0


...76세 현역 "내 기록 내가 깬다"

[중앙일보 2004-03-16 16:26]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여기 일흔을 훌쩍 넘은 무용수가 있다. 그것도 체력소모가 엄청난 '플라멩코'를 춘다. 젊은 무용수들도 "가장 추기 힘들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춤이다. 주인공은 조광(76). 국내 최초의 플라멩코 댄서다. 이미 '대가(大家)'의 반열에 오른 그의 소망은 딱 하나. 바로 100살까지 무대에서 발을 구르는 것이다. 17~1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그가 '조광 스페인 플라멩코'(오후 7시30분, 2만~3만원, 02-586-0056)를 공연한다.

#출발점은 발레


1945년, 해방 직후였다. 그는 열 여섯살이었다. 명동의 극장'시공관'에서 춤 공연이 열렸다. 입장료는 빵 하나 값. 그는 우연히 극장으로 들어갔다. 영화관도 TV도 없던 시절, 객석은 꽉 찼다. 막이 올랐다. "그 때 처음 발레를 봤어요. 5분간 객석을 압도한 독무(獨舞)가 충격이었지". 일본에서 발레를 배운 유학생들이 해방을 맞아 가진 귀국 공연이었다. "정지수씨는 '매', 한동인씨는 '화랑'이란 창작 발레를 추었지". 뒤늦게 알았지만 월북 무용수인 두 사람은 고전 발레를 처음 국내에 들여온 선구자들이었다.


조씨는 "죽어도 춤을 추겠다"며 부모를 졸랐다. 토목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반대는 심했다. 대신 어머니가 고집을 꺾었다. "국내에는 선생이 없으니 일본으로 가라"는 의견을 따라 열일곱살 때 현해탄을 건넜다. 유명한 '핫토리 시마다 발레 스쿨'에 입학했다. 그러다 스페인 무용을 발레화한 '사랑은 마술사'란 작품을 만났다. 그는 스페인춤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스페인 춤을 배울 곳은 없었다. 5년 후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발레리노로 이름을 날렸다.


#종착점은 플라멩코


마흔살 때였다. 73년이니까 결혼한 이듬해였다. 그는 혼자서 스페인으로 떠났다. "신혼보다는 무용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무려 20년 동안 벼르던 꿈이었다. 공항에서 스페인 땅을 밟았을 때 그는 울컥했다. "황홀했죠. 당장 내일부터 스페인 리듬을 배운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어요."


그는 스페인 최고의 플라멩코 무용학교인 마드리드의 '아몰데 디오스'에 들어갔다. 스페인어를 몰라 일본어로 레슨을 받았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쉬지 않고 춤을 췄어요. 연습이 끝나면 발이 아파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죠". 밤마다 소금물로 찜질을 했다. 그리고 또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이내 두각을 나타냈다. 발레로 다져 놓은 기본기가 '재산'이었다. 플라멩코에는 세 바퀴를 돈 뒤, 앉았다 벌떡 일어서는 고난도의 동작이 있다. 그는 세 바퀴가 아닌 네 바퀴를 돌았다.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6개월만에 경력 5년의 베테랑들을 압도했다. 스페인에 머물던 6년간 그는 플라멩코를 뼈 속까지 속속 새겨 넣었다.


79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올린 귀국 공연은 만원이었다. 기립 박수까지 터졌다. 스페인 출신인 고(故) 안익태씨 부인은 그의 공연을 보고 "스페인에서도 볼 수 없던 열정이 넘친다"며 극찬했다.


그는 국내 플라멩코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됐다. "플라멩코는 '살풀이'처럼 나이가 들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는 그의 활동은 지금도 왕성하다. 결국 한국 무용을 전공한 부인 한순호(국립 무용단 1기생)씨까지 플라멩코 댄서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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