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띠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처음 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때늦은 봄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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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입가에 품위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비너스란다.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나는 장면이지.
그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그렇게 슬퍼졌을까
초록색이 도는 우윳빛의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럽고 아름다운 얼굴.
가냘픈 몸을 휘감은 채 바람에 날리고 있는 긴 금발의 머리카락과
커다랗게 열린 조개 껍데기를 밟고 선 무방비해 보이는 하얀 맨발.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는 눈속 깊은 곳의 그 신비로운 슬픔 때문이었을까.
미안하다. 내눈가에 가득 고이는 눈물을 본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침통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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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다이어트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세상돌아가는 분위기란걸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즘은 뚱뚱한 사람을 단순히 둔감하고 무신경하게 보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게으르고 절제심이 없으며 자기관리를 하지않는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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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자마자 체중을 기록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 되었다.
다이어트가 어려운 것은 몸속에 장착된 수백만년이나 된 생존 본능 씨스템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는 원시적 육체와 현대적 문화 사이의 딜레마일 수 밖에 없다.
돌도끼 시대의 인간은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그악스럽게 지방을 저장한다.
인간의 몸은 지금처럼 지방이 남아도는 환경까지는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진화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꼭대기까지 닿으면 굴러떨어지게 돼 있는 바위인줄 알면서
그것을 끈임없이 밀고 올라가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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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희미하게 영정이 보였다. 나는 약간 비틀거리며 분명 이제는 아주 늙어버렸을
아버지의 모습을 보기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늘 보띠첼리의 비너스를 바라 보았던 것은 다른 뭔가를 보지 않기 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이 시시각 눈앞에 떠오를 때마다 비너스는 그것을 차단시켜
나를 다른 문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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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뭄 구석구석에 모피처럼 지방을 뒤룩뒤룩 두르고 코끼리 다리로 당당하게 서있는 알몸의 여인.
그녀는 또 다른 여신. 빙하기의 비너스엿다.
빙하기의 예술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성을 상상햇으며 그것은 바로 거룩한 밥의 모습이었다.
......
내가 이태리 식당에서 지금까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보았듯이
아버지 역시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아들을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뚱뚱한 아이의 기억을 갖고 떠나버렸다.
비너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나를 멸시한다고.
아버지에게 천천히 절을 한 뒤 나는 고개를 돌려 입속의 밥알을 뱉었다.
작가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에서
부분 감상:
오랜시간 무엇에 대응하며 바로잡기위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심한 열등감으로 각인되면서 평생 갈등을 겪게될 수도 있는
유년의 작은 상처에서 부터 시작한다.
책장 넘기는 내내 즐거운 상상으로 읽었던 책이다.
하지만 가볍지 않은.....
by..mini/at the ses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