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오빠~ 가을이~ 히~ 나 오늘 친구들이랑 술 한잔 했다? 으흥~"
특유의 코웃음 소리.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가을이, 너 아직 술 살 수 있는 나이 안되잖아."
"친구네 집에 놀러왔는 데~ 냉장고에 맥주랑 소주가 있어서~ 친구랑 마셨어~ 으흥~"
“많이 마셨어? 얼마나 마신거야, 발음이 조금 꼬이는 거 같은데...”
“딱...!! 소자 3잔 으흥~ 기분이 무지 묘해~”
여자친구가 술 먹고 전화한다는 게 이런 느낌인걸까? 친구들은 상당히 귀찮으면서도 걱정스럽다는 데, 내겐 그저 귀엽기만 하고 계속해서 가슴이 설레이기만 할 뿐이었다.
“근데 오빠~ 나... 고백할 게 하나 있는 데...”
“응? 뭔데?”
“말해도 될까 모르겠네... 사실은 친구랑 의논하다가 술 먹고 전화하는 게 아무래도 말할 때 편할 거 같기도 해서...”
“굉장히 비밀스러운건가 보네? 괜찮아, 말해봐.”
“말하면... 오빠가 헤어지자고 할지도 모르는 데...”
공기가 무거워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 걸까. 헤어졌던 그 남자와 다시 사귀기로 한걸까. 아냐, 다시 사귀게 됐다면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는 게 무섭지는 않을거야.
“무슨 일인데, 하하. 가을이, 네가 오빠 곁을 떠나지 않는 한 오빠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일은 없어.”
“사실은... 나 중학교 1학년 때... 동네에 아는 오빠가...”
동네 아는 오빠가? 아니면 오빠랑인가? 사겼다던가, 이런 건 별로 문제 될 건 없는 데.
나랑 사귀기 전에도 다른 사람이 사겼었으니까. 더 큰 일인가?
“동네에 아는 오빠가 나더러 이쁘다구... 난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그냥 했었는 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게... 추행이었어...”
머리에 쥐가 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물구나무를 선 듯이 머리에 피가 쏠리는 듯 했다.
가을이가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일단 과거에 조금 안좋은 일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 그것보다 가을이를 달래고 차근차근 말하는 것이 나을거라 생각했다.
“가을아, 울지마. 괜찮아.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울지마, 뚝.”
“하지만 나 이 얘기를 친구 말구, 오빠한테만 처음 얘기하는 거란 말야... 내가 이 얘기 꺼내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 지 알어?”
“아니... 그러니까 괜찮다구... 가을아, 울지 말구... 오빠 말 좀 들어볼래?”
띠띠띡 띠띠띡
하필이면 이럴 때 휴대폰 베터리가 다되어서 말썽인지...
“가을아, 오빠가 휴대폰에 베터리가 없거든? 충전기 꼽고 다시 전화할게. 1분도 안걸릴거야. 전화 꼭 받아야 돼. 알았지?”
“전화 안하면 어떻게 해? 나 기다린단 말야... 엉엉...”
“걱정마, 꼭 전화할게. 조금만 기다...”
띠리릭... 휴대폰 베터리가 밉다. 조금만 더 늦게 꺼졌으면 좋았을 걸.
왠지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새 베터리로 갈아끼우고, 충전기에 휴대폰을 꽂은 채 가을이에게 전화를 했다.
“어, 가을아. 휴~ 다행이다. 전화를 받아서...”
“오빠~... 엉엉... 전화 안하는 줄 알았어... 친구도 아마 전화 안올거라고 이대로 헤어지라 그랬어... 오빠~...”
아, 가을이의 친구란 놈은 왜 울면서 불안해 하는 애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말을 해서는 상황을 더 곤란하게 만드는 건지...
“내가 왜 전화를 안해... 전화 한다고 했잖아, 지금도 이렇게 전화 했으니까 울지마...”
“미안해, 오빠... 정말 미안해...”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야. 잊을 수 있다면 잊어버려. 가을아, 오빠 사랑하지?”
“응, 사랑해...”
“그래, 그거면 됐어. 가을이가 오빠를 사랑해주고, 곁에 있어주면 그걸로 된거야. 지난 날 떠올릴 필요없이 그거면 충분한거야. 오빠도 우리 가을이 사랑하니까 울지마, 알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낯 간지럽다. 여자친구라고는 해도 17살이었을 당시 사랑하냐고 물었으니...
“울지 말구, 가을이 너 아직은 술 많이 못마실테니까 일찍 자구, 내일 웃으면서 통화하자. 알았지?”
“응... 먼저 전화해야돼, 오빠?”
“알았어, 내일 아침 6시에 오빠가 전화할게.”
사실, 글로 써보니 몇 줄 안되는 데, 실제 달래는 데 약 4시간정도 통화했었다. 그 4시간이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왔던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2월이 되고,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가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때 가을이랑 농담으로 했던 말이 “너나 나나 작년에도 같은 3학년이더니, 올해에도 같이 1학년이네.”
3살 차이라는 게 이렇게 묘한 거였더라. 내가 군대를 갔다오는 2년 2개월을 3년이라 생각하고 대학교 2학년이 된다면, 가을이도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대학교 1학년을 보내고 또 다시 같은 2학년이 되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면서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수업시간도 얼마 되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기엔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주말이면 의정부까지 올라가 가을이를 만나고는 했다.
별 것도 아닌 내용으로 1시간 통화는 기본이었고, 조금만 통하는 게 있으면 3시간도 훌쩍 넘겨 통화했고, 주말에 만나면 잠은 잊은 채 밤새 군것질하며, 얘기하기 바빴다.
그리고 3월이 되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