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엔 꽃놀이패, 노정부엔 마지막 도박판
드디어 7년여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 6·15 공동선언에서 후속 정상회담을 약속했기에 그렇게 놀랄 만한 역사적 사건은 아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북한체제의 속성상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론이 없다. 그럼에도 정상회담 개최 시기와 장소, 그리고 의제 등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선 8월 28일까지는 불과 3주밖에 남지 않았다. 그만큼 남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데드라인에 걸려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임기가 6개월밖에 남지 않은 노무현 정부는 재임 기간 동안 뚜렷한 업적이 별로 없고 국민들의 지지도는 바닥을 맴돌고 있다.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을 넘어 대선 정국에서 범여권으로부터 걸림돌 취급마저 받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모든 악재를 일거에 만회하고 정권 재창출을 주도할 수 있는 회심의 카드였다.
북한으로서는 6·15 공동선언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진했던 경제협력을 본격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핵문제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북미 간 담판을 위해 남한을 종속 변수로 묶어 둘 시점이 되었다. 남한의 대선 정국에 개입하고 차기 정권에도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정상회담은 유효한 수단이기도 하다.
북한은 정상회담 개최에 동의하면서도 시기는 주변 정세와 남북관계 상황을 검토해 결정하겠다고 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적기(適期)인 셈이다. 결국 정상회담을 서둘러 개최하게 된 것은 남북 정권의 서로 다른 이해가 마지막 순간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개최 장소가 평양으로 결정되었는데 실사구시 차원에서 장소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주장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이다. 회담에서 장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6·15 공동선언에서 서울 답방을 명문화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잘 알고 있다. FTA 같은 통상회담도 장소를 번갈아 개최하는데 하물며 남북정상회담을 평양에서 연속 개최한다는 것은 국가 위신은 물론 회담 전략으로서도 하수임을 자임한 꼴이다.
정상회담 실무준비회담을 개성에서 개최키로 한 것도 허허벌판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을 했던 역사적 경험을 살리지 못한 단견이다. 편하게 모시기 위해 평양 회담을 제안한 이유는 말 그대로 옥류관 냉면이나 먹고 대동강 뱃놀이나 하고 가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냉철한 회담 전략에 따라 회담을 일방적으로 주도하겠다는 속뜻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회담의 의제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정상회담 개최는 성급하고 위험하다. 단순히 남북의 최고 지도자가 갖는 것은 2000년 1차 정상회담으로 족하다. 남한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임기 말 노무현 정부로서는 뚜렷한 의제 없이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회담의 실효성도 의문시될뿐더러 차기 정부에 이행 의무를 떠넘기는 무책임한 일이다.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을 장담하고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 관한 남북합의서에는 어느 구석에도 그런 구절이 없다. 우리민족끼리 한반도의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 조국통일문제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북핵 불능화를 다룰 차기 6자회담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고 남남갈등과 한미동맹 이완을 초래할 섣부른 평화선언을 감행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전격적으로 발표된 2차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잃을 것이 전혀 없는 꽃놀이패라면 노무현 정부로서는 마지막 도박판이다. 단판 승부를 벌이려는 지도자를 바라보는 국민들이나 경선을 불과 열흘 정도 남겨둔 한나라당으로서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상회담은 개최 자체보다 그 결과에 따라 평가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정부나 여야 정치인들의 국가와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양식과 책무를 촉구할 뿐이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남북 정상회담, 따져볼 일이 많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핵 폐기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회담이어야 한다. 북핵 폐기 2단계 조치(핵 프로그램 신고와 핵시설 불능화)가 논의되고 있지만 속도가 너무 더디다. 과연 북이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대로 핵을 완전히 포기할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여는 것은 자칫 우리가 북의 핵 보유를 용인해 주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 가는 것도 우리로서는 큰 양보다. “김 위원장은 서울 답방 약속을 지키지도 않았다”며 굴욕감을 토로하는 국민이 많다. 자존심 굽혀 가며 평양까지 가 핵 문제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온다면 국가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된다. 회담 의제(議題)도 사전에 합의되지 않았다고 하니 뭐가 그리 급했는지 모를 일이다.
정부 일각에선 “평화체제 수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섣부른 기대다. 1953년 정전(停戰)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려면 정전협정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의 동의도 있어야 한다. 남북이 합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더욱이 북은 평화체제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은 ‘시니어 파트너’로, 우리는 논의의 직접 당사자가 못 되는 ‘주니어 파트너’로 치부했다.
평양회담이 6자회담을 촉진할 것이라는 관측도 근거가 희박하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오히려 북이 6자회담에서 관철하지 못한 요구들을 평양회담에서 꺼낼 가능성이 높다. 경수로 공사 재개(再開)도 예상되는 요구 사항 중 하나다. ‘경수로’ 세 글자만 나와도 노 대통령은 “6자회담에서 논의할 문제”라며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실질 임기가 4개월밖에 안 남은 대통령이 북에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할까 봐 큰 걱정이다. 대통령 스스로도 “내가 도장 찍고 합의하면 후임이 거부 못한다” “북이 달라는 대로 다 주어도 남는 장사”라고 했기에 더 그렇다. 북과의 어떤 합의도 퇴임을 코앞에 둔 대통령이 제대로 이행하기는 어렵다. 결국 차기 정권에 넘겨야 한다. 무리한 합의는 다음 정권에 경제적 부담은 물론 첨예한 남남 갈등까지 떠안길 수 있기 때문에 삼가야 한다.
정상회담의 정략적 이용 가능성은 더 심각한 문제다. 이 정권 사람들은 회담 동기(動機)의 순수성을 강조하지만 다수 국민의 눈에는 대선 판을 흔들려는 저의가 있는 것으로 비친다.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반대 세력을 반(反)민족, 반평화로 몰아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북이 정상회담에 합의해 준 것도 반보수, 반한나라당 세력의 대선 승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남북문제로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낡았다. 노 대통령과 범여권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국민은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실망스러운 체험을 했다. 노 대통령이 동기의 순수성을 보여 주려면 2002년 평양을 방문해 일본인 납북자들을 데리고 나온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처럼 우리 납북자들과 국군포로들을 데리고 올 각오를 다져야 한다.
동아일보 8월 9일자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