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모델들의 눈두덩이에 실버컬러 아이섀도를 펴 바르고, 온갖 번쩍이는 소재들로 옷을 해 입히던 디자이너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번 시즌엔 그런 시끌벅적한 요란함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언제 그랬냐 싶게 시치미를 딱 떼고 있는 새침한 프레피 걸들만이 가득할 뿐.
하지만 이번 시즌 프레피 스타일이 강세라고 해서 핑클이나 원더걸스 류의 고딩 스타일 스쿨걸 룩을 생각해선 곤란하다. 플리츠 미니스커트와 니 삭스로 대변되는 일본스타일 스쿨걸 룩은 솔직히 낡디 낡은 진부한 코드가 아닌가. 21세기의 새로운 프레피들은 그보다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면모를 보여 주는 쿨한 녀석들이다.

새로운 프레피 탄생의 포문을 열었던 쇼는 바로 발렌시아가. 지난 시즌 완벽한 퓨처리즘 컬렉션으로 전 세계 패션피플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베스트 컬렉션을 창조해냈다.
전통적인 미국의 프레피 스타일에 히피와 퓨처리즘이 폭넓게 믹스된 이 기묘한 룩들은 그야말로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변종 하이브리드 프레피라 불릴 만했다. 머스큘린과 페미닌, 유니폼과 스포티즘이 복잡하게 뒤엉킨 이 아름다운 불협화음은 무엇보다 놀랍도록 웨어러블하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특히 블랙, 네이비, 핑크 등 다양한 컬러로 등장한 블레이저들은 이미 많은 바이어들의 위시 리스트 1순위를 장식하고 있다.

보다 시크하고 실험적인 유러피언 프레피를 지향하고자 한다면 프라다 컬렉션을 꼭 체크해 두어야 한다. 소재에 관한 한 무한한 개척정신을 지닌 그녀는 이번 시즌 엠보싱과 모헤어, 울과 깃털 소재를 이용한 독특한 스커트 룩을 선보였다. 그라데이션 색조가 중심을 이룬 이번 쇼에서는 투 톤 컬러의 니트 니삭스가 눈여겨 봐야 할 아이템.

이번 시즌 전체 트렌드를 지배하는 레트로 무드를 반영한 클래식 프레피 스타일을 선보인 건 단연 샤넬이다. '우우~ 우우우~' 로 시작하는 노래가 함께 다정한 연인들의 눈싸움 장면이 압권인 멜로 영화의 바이블 'Love Story(1970)'의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우가 바로 이번 샤넬 컬렉션의 아이콘.
빨간색 니트 모자와 머플러, 울 코트와 롱 부츠 등 영화 속 제니퍼의 클래식한 칼리지 룩은 칼 라거펠트의 손에 의해 멋지게 재탄생했다. 톤 다운된 빈티지 색감의 풀오버들과 시그니처인 트위드 소재, 하운즈 투스를 비롯한 다양한 체크 패턴들이 이 레트로 프레피 룩을 위해 그가 선택한 동반자들.



발렌시아가, 프라다, 샤넬 같은 럭셔리 브랜드들이 이렇게 저렇게 업그레이드된 프레피 룩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알쏭달쏭하고 실험적인 옷들을 입고 당장 내일 아침 출근 길에 나서기엔 곤란하다고? 그렇다면 보다 현실적인 스타일링 팁을 위해 영국이 사랑하는 디자이너 폴 스미스의 우먼 컬렉션을 권하고 싶다. 박시하게 떨어지는 재킷과 복고풍의 팬츠를 매치하고 굽이 낮은 옥스퍼드 슈즈로 마무리하는 톰보이 룩은 루즈하고 여유로운 프레피가 되고 싶을 때 적격이니까.

프레피 룩의 최고 미덕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기본 아이템으로도 얼마든지 연출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라운드 네크라인의 스프라이프 니트나 아가일 패턴의 니트 베스트, 누구나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을 더플 코트(일명 떡볶이 코트)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에 동그란 프레임의 해리포터 안경과 삐딱하게 쓴 베레모를 더해 주고 트렌디한 레이스업 부티로 마무리하면 그야말로 퍼펙트! 우리도 얼마든지 라코스떼의 여대생 언니들처럼 떨어지는 낙엽을 밝으며 걸어가는 프렌치 프레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