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Morning, Mr. Paik?
예술가란 이름으로
아직까지 캠코더, 컴퓨터, 카메라를 든 예술가보다는 붓을 든 예술가에 익숙한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미술은 ‘oil on canvas'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예술가의 작업실에 물감 통이 어지럽게 놓여 있으리라 추측한다. 대다수 관객의 편견에 절반은 부합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것을 깨뜨리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지나치게 급진적이지도, 전통적이지도 않으면서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스펙트럼 내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세기의 두 예술가를 비교하면서 채플린이 인물보다 작품으로 인지도를 쌓은 반해, 피카소는 미학적 성과에 걸맞지 않게 화려한 여성편력과 기행으로 작품보다 인물이 알려진 경우라며 둘을 대비시켰다. 흔히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란 직함과 동일시되는 백남준의 경우는? 피카소의 조형어법이 관객에게 공감보다는 부담의 소지가 되는 까닭은 기존의 회화 재현술로부터 ‘과격하게’ 이탈한데에 있다. 같은 이치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관습적 감상 기술로는 즐길 채비를 충분히 갖췄다 할 수 없다. 기법 면에선 달랐으나 피카소와 백남준의 예술사적 기여도는 조형적 완결성이 주는 감동보다 미학적 정보가 변모한 현실을 통찰하는데 주력했다.
조지 오웰이 1948년 집필한 디스토피아 정치 소설 <1984>에서 독재자 ‘빅 브라더’가 감시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미래상을 예고한 1984년의 첫날(1월 1일), 백남준은 전세계 TV를 통해 오웰이 염려했던 미디어를 오히려 오브제화 하여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오웰씨! 좋은 아침이죠?”
미디어에 의해 고급 정보가 장악되고 제어되는 역학은 동의할만한 수준이며, 관객이 전시장을 직접 찾아 구체적 미술 오브제를 관전하던 종래 통념을 뒤집고 추상적 ‘전파’ 형식으로 환원된 신종 예술품이 세 나라 도시의 안방 브라운관으로 실시간 방문하는 신개념 예술품이 대두한 것이다.
백남준이 TV 브라운관을 예술적 소재로 고려한 <자석TV>가 제조된 60년대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위성 전파 예술로 관람 방식의 변화를 촉구한 80년대나, 그가 떠난 2006년, 그리고 오늘, 미디어 아트 관람의 질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 까닭은 미디어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미디어 아티스트의 느린 행보와 예술품을 유미적 감상 대상으로 전제하고 들어가는 세간의 상식이 부딪혀서 일 것이다.
홍콩 로이든 스쿨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학과 음악사, 미술사 전공, 독일로 건너가서는 음악사 수학한 백남준은 전자음악에도 심취했다. 다양한 예술적 편력은 훗날 그의 풍성한 예술적 변주로 구현된다. 그는 문화 건달그룹으로도 불리는 전위그룹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1960년대부터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 공연, 뮤직 일렉트로닉 TV전 등 수많은 공연과 전시회를 연다. 1960년에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을 발표하면서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가 넥타이를 자르는 등 파격적인 행위예술을 펼치며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플럭서스를 통해 당대의 도드라진 예술가들과 예술적으로, 인간적으로 교유한다. 플럭서스의 창시자이자 미국 건축가 조지 마치우나스, 그의 정신적 쌍둥이로 일컬어지는 전위미술가 요셉 보이스, 음악과 소음, 삶과 예술의 구분을 배척했던 쇤베르크의 제자 존 케이지와 플럭서스 친구들은 백남준의 동반자였고, 예술적 형제였다.
1970년대의 스타, 무당으로서의 예술가, 사회 운동가로서의 예술가, 교육자로서의 예술가, 독일의 국민적 예술가로 유명한 요셉 보이스는 제2차 세계대전 공군 부조종사로 복무하는 도중 동양적 샤머니즘(토템신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 굿을 벌이기로 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의 계획은 보이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를 아쉬워한 백남준은 1990년 한국에서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을 벌인다.
동양의 선종사상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소음을 음악으로 격상시킨 존 케이지의 음악에서 참선의 세계를 느낀 백남준은 그를 오브제로 한 많은 작품을 제작한다.
미모의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의 인연은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발 등에서 활동하며 극단의 실험적 음악운동을 이끈 무어만은 백남준의 성공적인 뉴욕 상륙을 도왔으며, 1964년부터 10년간 구미 각국을 돌며 유명한 반나체 콤비 공연을 벌인 파트너였다.
1998년 백악관 만찬에 초대된 백남준은 당시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으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흘러내린(속옷도 입지 않았다!) 대형 사고를 쳤다. 이것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잠시 말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시의적절한 행위 예술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예술의 ‘바람직한’ 창작과 감상은 정보 전달의 시의 적절성과 매체 선별 능력에 있을 것이다. 뇌졸중 상태인 자신의 약체를 매체 삼아 행한 이 해프닝은 최상의 정치적 예술이다. 그를 단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으로 한정할 경우 담지 못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