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Nobody Knows, 2004)1) ― 영화의 제목은 영화의 내용과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4남매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굳어가는 막내의 시신을 앞에 두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날 밤 공항에서 누가 무엇을 묻고 돌아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4남매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결코 눈물로 호소하고 있지는 않다. 한 명 쯤은 울 법도 한데 4남매 중 누구도 울지 않는다. 막내 유키의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그저 동생의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어떠한 서러움이나 절망도 묻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한 후에도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모르는 세상을 탓하거나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영화 속의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실, 이런 연기는 아역 배우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의 연기가 아니거니와, 실제로도 아역 배우들은 연기 경력이 전무하다고 한다.2) 감독은 이 연기 경력이 전혀 없는 아이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은 채 상황에 대한 설명만 해 주었고,그저 보통의 아이들이 집에서 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을 뿐이다. 우리의 바로 옆집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여느 평범 - 상황의 평범이 아닌, 신체적 정신적 의미의 평범 - 한 아이들의 무덤덤한 표정과 일상은 오히려 그 어떤 극적효과보다 잔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게다가 영화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생활비가 떨어져 음식을 구하러 돌아다닐 때에도, 급수가 중단되어 공원에서 몸을 씻을 때에도, 심지어 유키가 의자에서 떨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한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카메라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영화에서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비참한 현실에 비분강개하고 있지도, 감정의 동요를 강요하고 있지도 않다. 다 잘 될 거라는 희망도, 비극적인 미래에 대한 절망도 묻어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은 감독이 이 영화를 객관적인 방식으로 연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이처럼 극도로 절제된 감정표현과 주관의 개입은 이 영화를 영화라기보다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생각되게 한다. 이것은 이 영화를 단순한 드라마가 아닐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관객들로 하여금 슬픔을 넘어선 허무감, 죄책감, 무력감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실제와도 같은 아이들의 생활은 참담함을 느끼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들 역시 사건의 공범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끔 몰아간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은연중에 ‘결국 그들을 방치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우리’라는 죄책감이 형성된다. 영화 속에서 그 누구도 아키라와 동생들을 적극적으로 돕거나 알려고 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우리들 또한 아무런 힘이 없는 그저 ‘시선’일 뿐인 것이다. 감독은 유키의 죽음을 관객들에게조차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다.2) 아키라가 유키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도 유키가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과 놀람. 그렇게 영화를 지켜보는 동안 느껴지는 무력감은 보는 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때문에 감독은 모든 책임을 아이들의 엄마에게 전가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를 비정한 인간으로 매도하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영화 초반부의 엄마는 비록 철없는 어린 엄마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살피고 챙기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고, “엄마는 너무 이기적이야.”라는 아키라의 말에 “엄마는 행복하면 안 되니? 나도 행복하고 싶어.”라고 대답하는 엄마의 심정에 우리는 공감했다. 결국 엄마는 아이들과 놀고 장난치던 모습처럼 밝고 경쾌한 모습으로 “크리스마스 땐 돌아올게”라는 말만을 남기고 떠난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무심하게 엄마를 보낸다. 엄마가 반드시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하는 희생정신이 투철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절대적 법칙은 없다. 그녀 역시 보통의 여성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고, 그러기엔 아버지가 다른 네 명의 아이들은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이 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이 그녀의 범죄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무책임을 정당화 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엄마를 잃은 아이들은 엄마가 포함된 세계에서 점차 벗어나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엄마는 네 아이들에게 하나의 ‘세계’이자 ‘신’이었고,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한 신이 정한 절대적인 규칙이고 금기였다. 그러던 그들의 소우주에서 신이 사라졌다. 언제까지나 자신들을 보살펴줄 것이라고 믿었던 신의 부재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또 그들은 그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관객들이 저 버림받은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의외로 자신들이 버려진 현실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 없이 담담하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리고 베란다의 한줌 햇살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아이들이 엄마가 정한 금기를 깨고 조심스레 세상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성장’의 과정이다. 그리고 남들처럼 밖으로 나가 뛰어놀 수 있고 그들 이외의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는 -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하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누리고 있는 당연한 - ‘자유’를 누리게 된다. 엄마가 사라지고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속에서 비로소 아이들은 ‘성장’하고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지는 아이러니이다.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노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웃음 속에 슬픔은 자리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모두가 슬퍼해야 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래도 아이들은 살아있다. 자란다.”, 그 어떤 슬픔과 연민, 동정심과 죄책감의 유발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따스한 영상 속에서 아이들은 영화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막내를 잃은 후 남은 세 남매는 그래도 여전히 네 명이다. 막내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한 명의 외부인.3) 그렇게 아이들은 세상과 소통하고 성장하였다. 온화한 햇살 속에서 다 헤어진 옷을 입고 집을 향해 걸어가는 영화의 마지막, 네 아이의 뒷모습이 여느 다 자란 어른보다도 듬직하고 크게 느껴졌던 영화,『아무도 모른다』였다.
1)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1988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이다. 실제로,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아이를 포함하여 서로 다른 아버지를 가진 이 4남매는, 엄마에게서 버림받은 후 6개월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살았으며, 결국 남매 중 가장 어린 여자아이가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빌딩에 살고 있던 거주자들 누구도 이 큰 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2) 관객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관객들은 더 감동을 얻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국민 누구나 아는 아역 배우가 등장해서 이들의 슬픔을 연기했다면, 그 배우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연기라고 인식하지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영화는 4남매의 화분 중 유키의 화분이 땅에 떨어져 깨어지는 장면을 통해 유키의 죽음을 암시하지만, 유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다.
3) 학교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아키라와 친구가 된 소녀. 칸 하나에가 연기했다. 칸 하나에는 스즈키 세이준의 에 출연, 아역 배우들 중 유일하게 연기 경력이 있는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