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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김용의 2004 선교한국)

박성업 |2007.12.03 17:26
조회 172 |추천 2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단 대표)

 

 

들어가는 말
하나님이 계속해서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고

놀라운 은혜로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삶 속에서 누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본래 예수님하고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 질 줄 모르는

그런 배경에서 자라왔습니다.

주님과 가까워질 수 없는 삶을 사는 동안

제 편에서는 주님과 가깝지 않았지만

주님께선 언제나 제 편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예수님 모르고 사는 동안에 저는

한국말은 욕이  없으면 문장의 완성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삶의 배경자체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장으로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이야기,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문장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희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표현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이 말,

모태신앙인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지만

저에게는 이게 보통 구절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계속 햇빛 고마운 것 바람 고마운 것 모르듯이

그것 얼마나 귀한지 관계없이

늘 받던 건 의례껏 있으려니 하고 감격을 잘 모릅니다.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만날 당시 그때는 저희 집안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습니다.

요정집을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비명횡사하시고

저는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잃고 뒷골목으로 떨어졌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뒷골목 인생으로 내던져진 것입니다.

아무 그림도 없고 희망도 없던 때,

왜 이런 삶이 나에게 주어 졌나 받아들일 수 없는 그때,

제 인생의 경력을 아무리 되돌아봐도

저는 그저 술집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피조물 중에 수많은 인간 중에 별 볼일 없는 인간인

제 인생에서도 가장 밑바닥을 치던 때에

가장 형편없이, 제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못 깨닫고

자학증세에 시달리던 부끄러운 청년시절에

나도 나 자신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그때에

저를 찾아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게 오셔서 주님이 들려주신 말씀은

복잡하고 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저의 인생의 가장 바닥을 치던 저에게

주님이 들려준 말씀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한마디 덧붙인 말씀이 있었는데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만큼 넌 내게 소중한 놈이다.”

이 말씀이 제게 믿어지던 날, 제 삶이 변했습니다.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그때 그 말씀으로 임해오시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입니다.

주님을 그때 만났습니다.

저는 그 한마디로 족했습니다. 충분했습니다.

더 이상 저에게 무엇을 주시지 않아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제가 주님 앞에 고백하기를

제가 지금부터는

당신이 문자적으로 당신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시기 위하여

무소유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저의 삶 가운데 워낙 약하고 세상에 흔들리기 쉬운 사람이라서

단돈 한 푼 단돈 백만 원 한 장도 보증금을 두지 않고

예수님만이 전부가 되시도록 아예 문장으로 만들어 놓고

삼십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 때 주님을 만난 이후 이제까지

예수님만이 저의 삶 전부이셨습니다.

선교라는 단어, 복잡하고 전문적인 단어를 쓰지 않아도

저에게 선교라는 의미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 같은, 이런 인생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희망이 0%입니다.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환경도 안되고,

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던 저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이 백이십 년 전,

미전도 종족이었던 이곳에 누군가가 찾아와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복음을 들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주의 종이 눈물 흘려

나를 끝까지 추적하면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나를 찾아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알 수 있었을까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또 예수님께서 저를 충성스럽게 여겨주셔서

아이들 다섯을 맡겨주셨습니다.

제일 큰애는 ‘충성’이고, 그 다음이 ‘인애’, ‘찬송’, ‘응답’이고

막내는 ‘선교’입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도전 받은 것도 아닌데

낳는 순간부터 다섯 아이들을 선교사로 바쳤습니다.

그 중에 일번 타자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나가있고,

둘째는 사역 준비 중에 있고,

삼번 타자 ‘김찬송‘이는

고국 대학의 현실을 체험하고 가야하지 않겠느냐 해서

대학1학기만 하고 지금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어도 못합니다.

그러나 영어를 못한다고 선교를 못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영어를 해야 하지만 영어를 못한다고 선교를 못한다는 건

성경에 없으니까

어쨌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교의 완성은 우리가 취사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땅에 복음을 전해준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젊음을 바친 사람은

우리처럼 감동을 받기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땅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명령에

깨끗하게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보장된 미래를 정말 주님 앞에 그냥 드렸습니다.

저도 해당할 그릇은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써주실 줄로 믿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순회선교사를 시키셨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교회 전체가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누구도 선교의 혜택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으며

누구도 선교의 책임에서 핑계 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무슨 일이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라도

이 전 세계가 주께로 돌아오는 그 날을 위해서 일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영광스러운 복음의 완성을 이루시고

선교의 완성을 이루시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그 날,

반드시 와야 하는 그 날,

대를 물려가며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세대에서 눈뜨고 선교의 완성을 바라봐야 하고

우리 모두 일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서

조그마한 일이라도 감당하려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접니다.

 

 

 

한 가지 현상, 두 가지 관점
먼저 요한복음 3장 16절~1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아멘”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서로 다른 관점과 두 가지의 태도를 대하게 되는 일을

종종 대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며칠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제자들은 42년 동안 지은 헤롯 성전의 웅장함에 압도됐습니다.

“주님 저 성전 좀 보십시오.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예루살렘 그들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긍지를 느끼게 해주는 그 성전,

42년 동안 지었고 왕의 권세를 입어 지은 그 성전이

얼마나 웅장했겠습니까? 제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허물어진 성전이 보였습니다.

심령의 성전은 다 폐허가 된 채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돌은 남아 있는데,

성전은 남아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볼 수 없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진,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결국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무너진 성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셨습니다.

그 성을 내려다보시며

가슴 저리는 울음을 우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같은 성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세 가지 비유 중,

세 번째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는 그 집에 아픔을 남기고

살아 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창기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나중에는 알거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 돌아온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와 형의 태도는

아주 달랐습니다.

아버지의 고백은 누가복음 15장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다.” 라고 말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신다면

이 구절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알 것입니다.

악한 일을 저지른, 아버지의 가슴을 쥐어뜯고 간

그 아픔도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보다 배신보다 그 못된 잘못보다도 더 큰 것이

아버지에겐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었습니다.

똑같은 죄인이며 똑같은 탕자를 보는데 아버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형은 동생이 돌아온 얘기를 듣고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말하는데 나는 한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거늘

나를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 안 잡아주고

탕자를 위해서는 소를 잡다니 하면서 분을 냈습니다.

창기와 즐기면서 모든 재산을 날리고 온 저놈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이것입니다.

한 탕자를 놓고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 줍니다.

 

 

 

 

요나 이야기
저는 지금 정서적으로 사랑이 안되고,

친근한 마음을 느낄 수가 없고,

그들이 잘 되는 걸 마음으로 바라는 게 어려운

역사의 존재였던 한 종족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고대 역사의 많은 민족과 비롯한 그 민족은

악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 기세가 등등해서 잘나가던 민족이었습니다.

아주 많은 것을 가졌고 많은 나라를 정복했고

잘난척하고 마음대로 잔인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그 죄악이 가득 차서

하나님의 그 자비와 무한한 용서가 한계에 다다라서

40일밖에 허락이 안 되는

한 비극적인 운명을 앞둔 족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앗수르였습니다.

이 앗수르 족은 악독하고 교만하고 사랑할만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정서적으로

그 앗수르는 도저히 사랑할 만 하다든지

그 민족에게 좋은 정서를 가질 수 없는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민족이었습니다.

앗수르하고는 아주 악연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앗수르에 의해서 고통당하고

끝내는 그 앗수르에 의해서 망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 중에 정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긍지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선지자로

앗수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아

40일 후면 멸망 받을 한 민족을 가운데 두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성경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대체로 요나라고 하는 사람의 얘기는

고기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얘기로 많이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기뱃속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는데 도망가다가

완전히 붙들려서 할 수 없이 선교사가 된

불행한 한 사람의 전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민족적인 감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200여 개 국이 훨씬 넘는 나라 중에

그 어느 나라보다 속이 뒤틀리면서

정서적으로 사랑하기가 어려운 가깝고도 먼 나라,

그리고 그 나라하고 축구경기가 붙었다 하면

완전히 뭉개버려야 하는 이런 감정이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한국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는 이 감정이란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요나가 앗수르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40일 후면 그들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가서 그 소식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명령을 받는 요나는 얼마나 기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겠습니까?

교만하고 잘난척하고 악독한 짓을 하고

날마다 자기 민족을 못살게 굴던 그 나라가

40일 후면 불벼락을 맞는다는데

솔직한 말로 얼마나 기분 좋은 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포하라고 하신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그들 중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가 생길 것이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 생각이 스치는 순간 요나는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 백성은 한명도 살아남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동에서 서로, 니느웨 반대편인 다시스로,

심정적으로 안하고 버틴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로 도망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배 밑창으로 들어가 잠이 깊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도망가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요나를 잡으려고 지중해 전체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워낙 스케일이 크신 분이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 인해서

민족 역사를 뒤흔들어 놓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선교한국에서 은혜 받고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이게 제일 불가사의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십 년 동안 계속 선교집회에서 은혜 받고 있는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뭐하냐니까 계속 준비운동 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필경 준비운동 하다가 죽을 사람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어쨌든 요나가 도망가다가 붙잡혀서 결국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삼일밤 삼일낮을 살려만 주시면

순종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진정한 순종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매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회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뉘우침 정도는 어느 종교에도 다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회개란 깨달을 정도만 아니라

깨달은 즉 돌이켜 일어나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이것까지를 기독교 회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요나는 진정한 회개를 안했다 이겁니다.

3장에 그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삼일 갈 길을 하루에 가면서 외쳤어요.

‘40일이 지나면 이곳은 망한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하고 전했는데 역시나

어젯밤까지 죄를 짓던 자들이 밤부터 시작해서

전체가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이거 큰일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동산에 가서 어떻게 되는가하고 기다렸는데

40일 동안 계속 회개를 하고 죄를 안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그들을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용서하셨습니다. 평안과 복을 충만히 받은 것입니다.

그때 드디어 요나의 변하지 않은 본심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요나서 4장 1절부터 3절에 표현된 말입니다.

요나서를 푸는 키는 여기에 있습니다.

요나가 고국에서 왜 도망갔는지 이유를

충분히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걸 제가 오늘날 여러분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현장체험을 하실 수 있도록 입체낭독을 하겠습니다.

“요나가 열받아 가지고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할 거라고

안 갈라고 안 갈라고 하는데 억지로 억지로 물고문 시켜서

혹시나 하고 기다렸더니 역시나 하게 됐다 이거야.

여호와여~ 아이고~ 자비로우십니다. 사랑이 무한하십니다.

아이고~ 얼마나 엄청나신지...

이놈 저놈 잡놈 아무나 사랑하세요.

아이고 죽여요 죽여.. 이게 삼절...” 

버림받아야 할 40일 후면 멸망 받아야할 민족을 앞에다 두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종이라고 하는 사람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비극입니다.

여러분 이 일은 남의 이야기,

요나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심정 이해되지 않습니까?

이때 주님께서 그의 악독함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요나가 죽이라고 버티고 앉아서

그러고도 포기를 안하고

혹시 저것들이 또 죄지으면 벼락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동산을 떠나지 않고 거기서 웃고 있는데,

햇볕이 쬐어 혼돈하여 일사병으로 죽어가니

주님께서 거기에다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늘을 만들었더니 얼마나 시원하고 좋습니까!

이 박넝쿨 사랑에 홀랑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박넝쿨 사랑지수가 100으로 꽉 찼을 때

주님께서 그걸 보시고 거기다 벌레를 예비하사

철야작업을 시키셨습니다.

줄기를 씹어 버리시고 그 다음에 아침에

뜨거운 동풍을 불어버리시니까

완전히 와스스 부서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속에서 열받고 햇빛 내리쬐고 죽을 지경이 되니까

차라리 죽이라고 하나님 앞에 막 덤비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의 종으로 쓰신 하나님도 어지간하시고

우리에게도 상당한 위로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왜 화를 내느냐”하고 물으시니

“박넝쿨로 인함이니이다.”

“그러면 박넝쿨을 위해서 네가 성을 내는 게 합당하냐”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합니다.”

이러면서 하나님께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너 이놈!! 네놈의 말로 내 얘기 좀 하자.

그렇게 아끼는 박넝쿨을 위해

네가 씨를 심었냐 거름을 주었냐 뭘 했느냐.”

”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씨하나 심지 아니하고

거름한번 주지 아니하였던 박넝쿨을 네가 아끼는 게

그토록 합당하다고 말했다면, 너 기억해라.

네가 그렇게 망하기를 원하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게 망하기를 원하는

저 니느웨 성읍에는 좌우를 분별 못하는 어린아이만 십이만 명.

육축도 많으니 그건 내가 태초에 꿈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지었고 그들을 지금까지 인내해왔고

그들을 향한 나의 사랑과 꿈을 접지 아니하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내 아들을 줄 만큼까지 사랑한다.

그들을 내가 아끼고 용서하고 기다리고 참아내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느냐. 어찌 합당치 아니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요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구원하러 오신, 구원하러 오실 예수님
이 비극은 우리 사이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40일이면 멸망할 이 니느웨처럼 이세상의 비극은

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심판은 이미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또다시 심판하러가 아니라

구원하러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선교의 대과업은 심판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심판을 따로 하지 않아도 이미 심판 받았습니다.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이 포기할 수 없는 열정이

이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 당신의 아들을 죽이셨고,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셨고,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고,

당신과 나를 여기에 세우셨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연장시키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복음 앞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 우리를 축복해 주옵소서.

근데 여러분이 열방을 걱정할 만큼 여유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다른 영혼을 부둥켜안을 만큼

여러분의 영혼이 해결되었습니까?

우리가 보는 세상, 하나님이 보는 세상,

한 멸망을 앞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주님을 사랑한다는 내가

하나님의 관점하고 상관없이

오늘 요나와 하나님 사이에 벌어지는 일,

이 기가 막힌 운명이 혹시나 나와 하나님 사이는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여러분이 잃어버린 자는 아닙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누구십니까. 주님이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에게 있어서 나의 생명을 다 줄만큼 나의 전부다.

그러면 너에게 있어서 나 예수는 도대체 누구냐?”

하고 물으시는 이 주님의 도전 앞에

예수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여러분의 무엇이 되셨습니까.

오늘 이 질문 앞에 섰으며 주님 내 생명 나의 전부가 되시옵소서.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시옵소서.

그리고 내 생에 전부를 통해서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당신이 보시는 세상이

나의 세상이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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