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잠시 한 눈을 팔다가 발목을 잡혔을 뿐이다. #2. 너의 현재를 좀먹는 과거가 나의 미래를 좀먹는 현재를 만들어. 네겐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어떻게 보면 단순한 과거와의 단절. 우리의 현재를 지켜주는 일이 그 뿐이라면. #3. 나사를 조여, 아파. 피가나. 하지만 잘 잠가놓았어. 이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거야. 날 갖고 싶어? 그렇다면 너에게 열쇠를 줄게. 하지만 열쇠만 줄 수는 없어. 내게서 풀어낸 이 자물쇠로 똑같이 너를 잠그게 될거야. 그래도 열쇠를 받겠니? 나의 고통은 너의 고통. 나와 함께 해. 너에게 열쇠를 줄게. #4. 소용돌이 치며 빨아들이는 고통의 심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친다. 그리고 넓은 소용돌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위로, 위로, 위로, 헤엄쳐 오른다. 하지만 소용돌이 입구의 구심력은 헤어나려는 사람의 발버둥보다 항상 두배쯤 크다. 그러니 고통의 심연에서 헤어나오려는 사람들은 무조건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허우적 대며 내려가는 길은 고통의 극한. 그러니 내려갈 생각을 안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경우 혼미한 상태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또는 자신에게서 배어나는 고통을 누군가에게 덜어내려고 악착같이 그를 잡아 끌다보면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고통을 맛보게 된다. 침잠하라. 태풍의 눈에 도달하는 길에서는 피비린내가 나서 아무리 해도 구역질이 멈추지 않을 것이며 너의 심장은 소리를 지르다 못해 발작 증세를 보일 것이다. 그러니 침잠하라. 심연의 가장 밑바닥까지 닿아본 사람은 기다릴 줄 알게 된다. 웅크리고 웅크리고 웅크리고 가장 작은 자세로 심연의 한복판에서 침잠하라. 그 태풍의 눈에 웅크리고 열 다섯번쯤 피를 토해내는 고통을 이겨내며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 그 피로 갈증을 달래어 삼백 열 아흐레를 버텨낸 사람에게만 가능한 축복, 고통의 심연은 소용돌이치기를 멈출 것이다. 소용돌이 치지 않는 그 밑바닥은 다만 어둡고 추워진다. #5. 자신에게 돌아올 고통이 두려워 아무도 나를 열어주지 않아. 괜찮아, 이젠 딱지가 앉을 때도 되었어. 어쩌면 이젠 너무 녹슬고 낡아 더이상 열리지 않을지도 몰라. 애쓰지 않아도 돼. 내가 열어줄게, 라는 말 이제 믿지 않겠어. #6. 얼만큼 왔는지 모른다. 질척한 바닥에 손끝이 닿는다. 따끈따끈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자궁 같다. 웅크린다. 웅크리고 잠이 든다. 웅크리고 잠이 들어 악몽을 꾼다. 웅크리고 잠이 들어 악몽을 꾸면서 운다. 웅크리고 잠이 들어 악몽을 꾸면서 울다가 소스라친다. 웅크리고 잠이 들어 악뭉을 꾸면서 울다가 소스라쳐 깬다.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거미줄처럼 목구멍을 찢으며 솟아나 고통의 벽에 그림을 그린다. 검붉은 그림에 금이 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분다. 엄마의 자궁같은 질척한 바닥이 딱딱하게 굳어 갈라진다.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을 질끈 감는다. 웅크리고 노래를 부른다. 여기는 고통의 심연. 모든 고통의 종류들이 모여 지칠 때까지 날 갉아먹다가 포기하는 순간 돌아서 버리는. 그래서 웅크리고 노래를 부른다. 너는 어디 있니. 나를 이곳에 버린 너는 어디 있니. 이 노래가 그에게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또다른 고통. 모든 희망은 대치되는 절망으로 바뀌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갉아먹힌다. 너는 어디 있니. 이 곳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노래. #7. 고통의 심연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하나. 사랑하지 않는 것. #8. 구해줘. 날 열어줘. 날 봐, 피흘리잖아. 넌 어디 있니. 열어주겠다고 했잖아. 도망갔구나. 자신에게 채워질 자물쇠를 감당하기 어려웠겠지. 하지만 이 열쇠와 자물쇠에는 비밀이 하나 있어. 열어준다면 말해줄게. 열어주기 전엔 말해줄 수 없어. 그게, 룰이야. #9.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침잠하여 고통의 소용돌이를 멈춘 후에는 다시 위로 헤엄쳐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 모든 기력이 소진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잔잔한 심연이라 할지라도 밑바닥에서부터 수면위로 헤엄쳐 오르기가 쉽지 않다. 이 단계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때문에 고통의 심연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이 단계에서 포기하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면 영혼이 이 심연에 녹아버린다. 껍데기만 남아 살아가게 된다. 오히려 발을 들여놓기 전보다 못한 삶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는 고통의 심연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은 채 안전한 울타리를 친다. 그런데도 천 명 중에 한 명은 고통의 심연에 발을 들여놓고 발을 들여놓은 천 명 중에 한 명은 심연의 소용돌이를 멈추고 소용돌이를 멈추게 한 천 명 중에 한 명은 수면위로 기어올라오고 수면위로 기어올라온 천 명 중에 한 명은 드디어 사랑하게 된다. 이 한 사람 덕분에 그 고통의 심연을 극복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고 이 한 사람 덕분에 지구상에 아직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게 되고 이 한 사람 덕분에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랑을 꿈꾸게 된다. #10. 천 명의 천 명의 천 명의 천 명 중에 단 한 사람, 너이길 바라면 안되는 걸까. 네가 이 열쇠를 받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