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입니다.
하루에 샤워 두 번 세 번 해도
이 끈끈함은 가시지 않는 군요.
다들 몸 건강히 잘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 오~ 끈적 ====================================
다가온 주말.
난 약속대로 한나와 영화관에 갔다.
딱히 볼 영화를 정하고 만난 게 아닌 탓에
상영 리스트를 확인하면서 그녀가 내게 물었다.
한나 - 흐음~ 어떤 영화 좋아해요?
기억 - 시대극이나 로맨스 같은 거?
한나 - 의외네요~. SF나 액션 같은 거 좋아할 줄 알았는데.
기억 - 그런 건 보다 보면 영 거슬리는 장면이 많아서...
한나 - 어머? 어떤 장면이요?
기억
- 뭐.... 우주공간에서 불꽃이 튄다거나...
사람보다도 느린 불이 비행기를 따라잡는다거나...
쥬라기공원에 나오는 공룡이 백악기 때 공룡들이라거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현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거나....
한나 - ..... 그런 게 영화 보다가 눈에 들어와요?
기억 - 아무래도 공대생이다 보니까....
그나마 혼자 볼 땐 괜찮지만
공대생 서너 명 이상이 모여서 영화를 보면
그런 오류를 잡아내느라 입 쉴 틈이 없을 정도다.
물리학과 같은 곳과 경쟁이라도 붙으면
영화 한 편당 오류보고서가 A4용지로 10장은 나온다.
물론 그 내용을 구구절절 읊어봤자
공감하는 사람은 공대생내지 물리학도들 밖에 없지만...
한나 - 공포영화는 어때요?
기억 - 음.... 글쎄? 공포영화는 별로 본 적 없는데....
한나 - 그럼 =그림자 귀신= 봐요. 요즘 인기라던데.
기억 - 그러지 뭐.
결국 공포영화로 최종낙찰을 본 우리.
영화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사람마다 그림자에 빌붙어 사는 귀신이 있는데
그 중 몇몇 성질 고약한 귀신들이
말썽을 일으킨다고 하는 설정.
=키링....키링...키링....=
기억 - 저 사람 곧 죽을 것 같은데?
한나 - ...... 자꾸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키링....푸욱!=
기억 - 거봐. 죽는다니까.
한나 - 꺄악!! 엄마야....
뻔한 타이밍에 나타나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광원비도달지역 따위가 뭐가 무섭다는 건지....
차라리 쏟아지는 총알 밭을 유유히 누비며
백발백중 무한탄환으로 수백 명을 학살하는
액션영화 주인공이 더 무서운 존재 같다.
기억 - 그리고 팔짱 좀 그렇게 끼지 마. 부담스러워.
한나 - 무서운 걸 어떡해요! 사람이 피도 눈물도 없어요?
기억 - 저게 뭐가 무서워? 그리고 자기가 보자고 해놓고....
전혀 현실감 없는 영화 내용에다
배경 좀 어두침침해졌다 하면 내 팔을 붙드는 한나의 행동에
스트레스를 제곱으로 받은 난
그녀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소리를 높였다.
조용한 극장 안에 울린 내 목소리에
이내 뒤에선 원성의 말들이 쏟아졌다.
관객1 - 거 좀 조용히 봅시다, 닭살 돋아서 못 보겠네.
관객2 - 영화관이 댁들 염장질 하라고 있는 곳이요?
관객3 - 다른 커플은 다 조용히 있는데 혼자 생색이야.
기억 - 큼... 죄송합니다.
하나 같이 굵직한 남자 목소리에
자칫하면 문제가 커지겠다 싶었던 난
그렇게 사과를 하고 영화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을 돌아보며 회심의 일격을 날려버리는 한나.
한나
-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남자분들끼리만 오셨나 봐요?
설마 전부 솔로는 아니시겠죠?
관객1 - ...... 흑..... 아, 아니야! 으허허허헝.....
관객2 - 앗! 정환아! 이잇.... 두고 보자!
관객3 - 흑... 에이씨.... 같이 가!
한나의 한 마디에 눈물을 훔치며
영화관을 뛰쳐나가는 세 명의 공대생(추정)들....
문득 영화 속의 귀신보다 그녀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 나였다.
영화가 끝난 뒤
근처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우린
댄스 연습을 위해 학교 스윙댄스 동아리 연습실을 찾았다.
나는 아무래도 익숙한 연극부 연습실이 좋지만
이곳이 오디오 설비가 더 좋다는 게 한나의 주장이었다.
한나 - 결국 탱고까지 오고 말았네요.
기억 - 그렇게 말하니까 꼭 다른 게 다 실패한 것 같잖아.
한나
- 아녜요~ 다른 춤에 비하면 탱고는 보스 같은 존재니까
입문에 앞서서 각오를 다지는 거죠.
기억 - ...... 그렇게 어려워?
한나
- 저도 탱고를 몇 년째 추고 있지만...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는 춤이에요.
물론 다른 춤도 어떤 경지를 이루긴 힘들겠지만....
탱고는 특히나 어려운 것 같아요.
언제나 가벼운 마음으로 춤을 즐기라던 한나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말 하는 걸 보면
정말 어렵긴 어려운가 보다.
한나
- 일단 탱고는 리듬을 잘 타야 해요.
그러려면 음악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그 강세라거나 흐름을 파악해야 해요.
탱고는 음악에 따라 박자를 다양하게 쪼개서 쓰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탱고의 불규칙한 리듬에 대해선
한나도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듯
제일 먼저 시작한 연습은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한나
-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슬로우~
슬로우~ 슬로우~ 퀵, 퀵, 퀵, 퀵...
그래도 한나의 설명과 음악을 같이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이유가 납득된 나였다.
한나
- 자, 리듬이 귀에 익었으면 나머진 몸으로 익혀야죠.
자, 손은 이렇게 마주 잡고,
반대쪽 손은 제 등 중간 정도에 놔주세요.
탱고의 상체는 언제나 full~up, 어깨는 반듯하게!
기억 - ..... 이렇게?
한나
- 네~. 그렇게 꼭 안듯이 받쳐줘요.
영화 볼 땐 팔짱만 껴도 진저리를 치더니....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기억 -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한나
-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알아 모셔야죠.
한 번 천천히 맞춰 봐요. 슬로우~ 슬로우~.
늦은 저녁 무렵 연습을 마친 난
그녀와 함께 전철역으로 향했다.
어느새 제법 어두워진 길을 따라 걷던 중
한나가 어깨로 날 떠밀었다.
기억 - 어? 왜 갑자기 밀고 그래?
한나 - 내, 내가 언제 밀었어요?
기억 - 방금 밀었잖아. 난 바닥에 뭐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한나 - 그게 뭐가 민 거예요! 좀 붙어 선 걸 가지고....
기억 - ...... 그럼 왜 붙어선 건데?
한나 - 그, 그야..... 아이씨! 됐어요! 관둬요!
그렇게 대뜸 역정을 내더니
큰 걸음으로 저만치 앞서갔다가
이내 더 큰 걸음으로 서둘러 내게 돌아오는 그녀.
기억 - 뭐해? 아까부터....
한나 - .....
이런 내 질문에도 그녀는 빨갛게 얼굴만 붉힌 채
발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곧 도착한 전철역.
서로 반대방향 전철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먼저 도착한 건 내 쪽 노선이었다.
기억 - 그럼, 들어갈게.
한나 - 아....네....
기억 - 오늘도 고마웠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전철 안으로 한 발 딛는 순간
뒤에서 날 지켜보던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한나 - 오빠!!
기억 - 응?
한나 - 나.... 나....
기억 - 왜? 빨리 말해.
한나 - 나 집까지 바래다줘요!
=푸쉭~=
그녀의 요청에 대한 결과값을 출력하는 작업에
잠시 동안 모든 리소스를 빼앗겼던 난
여지없이 닫혀버린 전철 문에 얼굴을 끼이고 말았다.
기억 - 억?!
=푸시~ 푸쉭~=
문이 다시 조금 열렸다 닫히는 사이
결과값 출력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 전철에서 내린 나.
내가 탔던 전철 칸에선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 .... 뭐야 갑자기?
한나 - 아...아까 본 영화 생각나서 무섭단 말이에요!
기억
- 에에? 한나야, 그림자라는 건...
빛이 물체에 가려 도달하지 못하는 지역이 검게 보이는 것뿐이야.
거기서 뭔가 솟아오른 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질량도 없는 영혼이 물리적인 공격을 하는 것도 불가능해.
모든 힘은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한나 - 어쩜... 언니가 부탁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기억 - 아니, 일단 말 안 해도 바래다줄 건데.
한나
- 아 오빠 이럴 때마다 정말 싫다...
가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란 생각 안 들어요?
난 오빠를 위해 기꺼이 댄스연습에 응하고 있는데
그거 몇 분 바래다주는 게 귀찮아서
작용이 어쩌고 반작용이 어쩌고....
기억 - 아니 난 어디까지나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한나 - 그래서 Yes 에요? No 에요?
기억 - .... 예....예스.
결국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느지막이 집에 돌아온 나.
침대 옆에 기대 앉아 쉬는 동안에도
전혀 예상 밖이었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거 잘하면 협상용 무기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지, 그래선 같이 영화 본 게 들켜버리니까....
아아~ 아깝네...
다음날 연습시간.
한나와의 특훈으로 무난히 기대치를 달성한 난
댄서킴의 호평 속에 연습을 계속해갔다.
댄서킴
- 헤드턴을 좀 더 빠르게!
완전히 한 박 쉬고 나가는 거예요!
슬로우~ 슬로우~ 퀵, 퀵!
기억 - 슬로우... 슬로우.... 앤 슬로우....
댄서킴 - 그렇죠! 아~ 자세만 조금 다듬으면 완벽하겠네요.
내가 이렇게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사이
민아 쪽 연습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댄서윤
- 퀵, 퀵, 슬로우~ 퀵, 퀵, 슬로우~.
아뇨, 거기선 잠깐 뒤를 돌아봐야죠.
돌아 봤다가 다시 앞에 봤다가, 뒤로 턴~.
민아 - ..... 이렇게요?
댄서윤 - 아뇨~ 슬로우에서 다시 앞으로, 퀵에서 뒤로 턴.
아직 초반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그녀.
아마 탱고를 먼저 마스터 하는 건 내가 될 것 같다.
열심히 해서 그녀를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좋을 텐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일단 발동이 걸린 난 빠른 속도로 탱고를 마스터해가고 있었지만
민아측 상황은 아직 지지부진...
댄서킴
- 댄서윤, 민아씨는 아직도야?
슬슬 한 번 맞춰봤으면 좋겠는데....
댄서윤
- 네.. 아무래도 탱고는 처음이라 다른 춤보다 좀 늦네요.
원체 어렵기도 하잖아요?
갑자기 정체에 빠진 분위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점차 민아의 행보에 집중되었다.
마치 예전의 내 상황을 보는 것 같은 걸....
다음날.
오늘 연습이 끝나면 남아서 같이 연습하자고 청할 요량을 하고
기본스텝을 복습해보고 있을 때
댄서윤이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댄서윤 - 기억씨~! 이리 와서 민아씨랑 맞춰볼래요?
기억 - 예? 아.... 예.
내 계획과는 달리 갑작스레 찾아온 합동 연습.
난 예전 룸바 연습 때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민아에게 물었다.
기억
- 나중에 사람들 없을 때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오늘 끝나고 잠깐 같이....
민아 - 걱정 마, 어제 많이 연습했으니까.
불안 반, 기대 반으로 시작 된 민아와의 탱고.
하지만 서주가 끝나고 스텝이 시작되는 순간
내 불안은 우스우리만치 가볍게 날아갔다.
기억 - ......
어제 봤던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망설임 없는 스텝, 분명한 리듬감....
부족한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민아 - 어때? 많이 좋아졌지?
기억 - 아.... 응. 연습 정말 많이 했나봐?
민아 - 응~. 명색이 주연이니까.
잠깐,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