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생머리의 그녀 ......은아가 석준을 기다리고 있었다.재혁의 시야에 은아가 들어오자 그의 눈이 이글이글 거리고 있었다.그녀쪽으로 다가가자 고개를 든 은아가 놀란눈으로 재혁을 쳐다보았다.
"오빠.....여긴....어쩐일로....”
재혁은 은아 옆자리에 앉으며 웨이터에게 잔을 한잔 달라는 시늉을 했다.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야?”
“......”
웨이터는 익숙한 손으로 재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술잔을 들자마자 단숨에 들이키는 재혁이었다.
“석준이 기다리냐?”
재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아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석준씨는 왜?오빨 보냈지?....은아는 재혁이 그쪽으로 온게 속상한게 아니고 석준이 재혁에게 자신이 여기있다고 얘길했다는게 더 속이 상했다.
“나에겐 전화 한통화 없더니...”
재혁이 낯게 내뱉었다.
“오빠 그게 아니야...석준씨와 우연히 통화되서 약속이 정해진것 뿐이야...다른건 없어...”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떨구는은아였다.......5년만의 재회....그가 변한건 더 말쑥해진 외모와 칼날같은 성격뿐이었다.그와 단둘이 있었을때 은아는 숨이 막히는줄 알았다.그런데 그녀와는 달리 의외로 석준은 더 담담한 모습이어서 못내 아쉬움이 남는 만남이었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자 재혁이 테이블위를 탁탁 두드렸다.이미 여러번 은아를 불렀었다.
“무슨생각해?석준이?”
단번에 은아는 재혁을 노려보았다.
“무슨말이 그래요?왜?불안해?나와 석준씨랑 무슨일을 저지를까봐 불안한거야?”
그녀말에는 귀담아 듣지 않는듯 했다.그는 다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그모습을 지켜본 은아가 술잔을 빼앗아 들었다.
“대체 뭐가 불안한건데 난 아직도 오빠 밖에 없어,석준씨가 자신한테 다시 오라고 그래도 난 안가...”
“꼭 그러기를 바란사람같구나...”
재혁은 자신의 잔을 들고 있던 은아의 손에서 잔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그리고 웨이터에게 병채든 술을 달라고 하자 웨이터는 두말않고 재혁앞으로 술병을 내밀었다.
그는 술을 쉴새 없이 마셔댔다.나중에는 술잔에 술이 넘쳐 흐르는것도 모른체....그의 모습을 본 은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상해 오빠 이럴때마다...나 갈께...”
빽을 들고 은아가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재혁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멈춰선 은아가 재혁을 쳐다봤다.
“갈거라고 했잖아...”
“석준이 누구랑 있나 안물어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은아였다.
“휘진씨랑 있어”
갑자기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은 은아였다.내가...내가 왜이러지?석준씨가 누구랑 있든 그게 나랑 무슨상관이지?은아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가슴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벌써 여러잔을 마시고 있던 재혁이 약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은아쪽으로 다가갔다.
“난 널 절대 놓치지 않아...절대로 놔주지 않을거야”
다짐을 하듯 그렇게 재혁은 쓸쓸한 뒷모습을 한 채 오렌지하트를 나갔다.은아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마음이 아팠다.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석준이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은아는 씁쓸하게 웃었다.마지막으로...재혁이 한말이 뇌리에 떠나지 않았다......난 아직도 오빨 사랑하는데.....왜 한쪽 가슴이 텅빈듯한 느낌을 받을까....은아는 자신의 양손으로 머릿속을 헤집어보았다.
바닥은 밝은 회색 대리석의 느낌을 받아서 그런지 시원하게 느껴졌고 벽쪽 양옆으로는 잔잔한 등이 두 개씩 켜져있어서 아늑해보였다.넓은 거실에는 기역자로 된 검은색 소파와 맑은 유리잔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남자 혼자 살기에는 엄청 넓은 집이었다.욕실쪽에서 석준이 하얀 수건을 가져왔다.닦으라며 휘진쪽으로 던져주었다......그냥 주면 좀좋냐?짜아식이...맨날 터프질이.....
“닦아라 너 몸 다 마른다음에 집으로 바래다 줄테니까”
약간의 한기는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참을만했다.석준이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휘진앞으로 가져왔다....치이 이런면도 있었네?
“참 너네 어머니도 고생이시다..”
“갑자기 울엄마 는 여기서 왜 나온데요?”
“왜 나오긴 인마”
소파에서 일어나며 휘진의 이마에 손으로 가볍게 꿀밤을 매겼다
“허구헌날 일만 저지르니까 그렇치.....있어라..나좀 씻고 나올테니까 너두 좀 씻어?”
양손으로 엑스자 표시를 하며 휘진이 놀란 눈으로 석준을 올려다보았다
"시...싫어...요..집에..가서 씻을래요...”
석준은 어이 없다는듯 코 웃음을 쳤다
“니가 그러니까 웃긴다”
석준은 양복상의를 벗어 던지고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내가 그러니까 웃긴다구?뭐...뭐야..저자식?하튼 진짜 사람 가지로 무시해요...진짜...속상하다...내가...여자로써...매력이 없나?코코아를 양손으로 들고는 휘진은 자신의 입술을 비틀며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김이 욕실안을 덮치고 있었다.뿌연 김 때문에 석준은 샤워하다 보이지 않는 거울을 손으로 쓰윽 문질렀다.그러자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한 자신이 여지없이 보여졌다.세면대 양쪽에 자신의 손을 갖다댔다.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갈수록 귀여워진다....저 여자......처음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니....내 시야에 어느새 조금씩 들어오고 있다 니가.....그리고는 또다른 여자 은아를 생각했다.자신을 애절한 눈으로 쳐다보던 은아가 그때 실수였다고....자신에게 고백한게...아직도 눈에 선했다....
“석준씨가 없어서....2년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줄 알아?엄마 돌아가시구...너무도 힘들때 내옆에는 석준씨가 아닌 재혁오빠가 곁에 있었어..든든하 아빠같은사람...친오빠 같은사람...재혁오빠가.....”
석준은 머리를 쎄게 흔들었다.그래서 그런가 물방울이 욕실 사방으로 튀었다.비눗물을 제거하기 위해 석준은 샤워기부쓰물을 쎄게 틀었다.말끔하게 비눗물이 없어지고 석준은 수건으로 아래쪽만 간신힌 가렸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석준은 아차 했다...혼자 있을때처럼 이런식으로 나가려 했다니...
석준은 목욕탕안에 걸려져 있던 반바지와 하얀색면티셔츠를 잽싸게 입고 욕실 문을 열었다.뿌연김이 거실밖으로 세어나오고 있었다.걸어나오면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석준이 멈칫거렸다.휘진이 소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수건을 바닥으로 던져놓았다.가까이 다가가던 석준은 휘진을 흔들어 깨울까 하다 자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바싹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너무도 천진난만한 모습을 하고 자는 휘진이었다.미인은 아니어도 어딘가는 모르게 끌리는 그런 여자였다.양옆으로 붙은 휘진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만져주었다.조금은 움찔한 휘진이었지만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웅얼웅얼 거리며 자는 그녀였다.
...간댕이가 배밖으로 튀어나왔구만...아무 남자집에서나 덥썩 잠이나 자고 말이야...안되겠네 이 여자....석준은 그러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자꾸 떠나지 않았다.자신을 보며 항상툴툴거리는데도 전혀 밉지 않은 여자였다.석준은 세우잠을 자고 있던 휘진을 안아서 자신의 침실에 눕혀주었다....보기보단 가볍네?아기를 다루듯 휘진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도둑놈이 훔쳐가도 모르고 자고만 있다니.......불안하다...이여자.......내가 아니면 안될것 같은 생각이 든다....아무데서나 잠이나 자고... 외진곳에서 비도 오는데...택시하나 붙잡아서 타고 올줄도 모르는 이여자....어쩌면 좋을까?석준은 바닥에 앉아서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훓어보았다.내면에 숨겨져 있는 들끓던 욕망이 자꾸만 솟아났다.
석준은 침실에서 나와 쎄게 문을 닫고는 문에 기대고 서 있었다....너도 어쩔수 없는 사내놈이냐?석준은 담배를 찾았다.깔끔하게 정돈된 거실에는 담배가 보이지 않았다.석준은 어제 침대옆에다 논 담배가 생각났다......젠장.....또 저 험한곳을 들어가야 된단 말인가?석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걸 반복적으로 했다.그래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갈증 때문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얼음을 여러조각 넣은뒤 숨도 쉬지 않은채 한컵을 다 마셔버렸다.이제서야 조금 갈증이 가시는것 같았다.컵을 식탁에 내려놓은뒤 소파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소파에 텁썩 누운 석준은 조심히 눈을 감았다.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소리만 거실에 울려퍼졌다.......휘진....서휘진.......머리속에서 그녀의 이름이 떠나지 않았다......미쳤군......단단히 미쳤어.....김석준 너....석준은 한쪽팔을 이마에 걸쳤다.이리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며 시간이 흘러가는듯 했다.
언듯 설잠이 든 석준이 초인종벨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황급히 일어난 석준이 누구냐고 물었을때 대답이 없었다.석준이 문을 열었을때 문앞에는 은아가 서있었다.
“너?”
은아 역시 비에 흠뻑맞어 서있었다.양쪽눈은 울었는지 충혈되어 있었다.
“무슨일이야?”
“석준씨”
양손으로 은아는 자신의 팔을 감쌌다.석준이 본 은아의 모습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들어와”
안으로 들어선 은아는 현관앞에 여자 구두가 나란히 놓여있는걸 보고 이를 깨물었다.석준은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은아앞으로 내밀었다.아까부터 은아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듯 했다.
“무슨일인데 비까지 흠뻑 맞은거야?”
약간은 걱정스런 말투였다.잔을 만지작 거리며 은아가 석준을 애처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냥...답답해서...”
“왜?그자식이 힘들게 해?”
그자식이란 말에 은아는 주춤 거렸다
“아니...오빤 잘해줘 나에게...”
“뭐가 문젠데?마르거든 돌아가라”
석준의 말에 은아의 눈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석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 있어요?”
예기치 않은 은아의 질문에 석준이 걸어가려다 멈칫했다.
“내가 그런거 까지 너에게 보고 해야 하나?”
“그렇죠...나에게...”
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던 은아가 비틀거렸다.그바람에 석준이 은아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
다정다감한 말이었다.은아는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이제서야 그가 다시 그리워 지는 이유가 뭘까?나에겐 자상하고 멋진 재혁오빠가 있는데....왜이렇게 흔들리지?은아는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석준을 뒤로 한 채 현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그러자 석준이 은아의 팔을 낚워채 덥썩 은아를 안아버렸다.순간적이었다.석준이 은아 자신을 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석준씨”
석준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앞에서는 강한모습을 보여야지 어쩌자는거야 지금”
안고 있던 석준의 팔이 더 쎄게 조여들었다.포근했다....얼마만인가...그와 이렇게 안겨보는 것이....은아역시 석준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초인종벨소리가 울릴때부터 휘진은 깨어 있었다.그리고 흐느끼는 소리와 석준이 은아를 걱정해주는 소리까지....그리고 그가 은아를 안고 있는 모습까지 휘진은 씁쓸하게 지켜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