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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자들에 대하여.. 비토리섬 학살사건의 진실..

장홍석 |2008.08.03 13:04
조회 80 |추천 0

 불편한 진실들비토리 섬 학살사건 2008/03/20 오후 10:33 | 불편한 진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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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7월 18일
'비토리 섬 학살'은 국가의 사주이거나 직무유기

과거사를 청산하려면 노근리 주민 살해사건 뿐 아니라 우선 비토리섬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부터 밝히는 것이 그 순서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고통 받고 멸시받았던 한센인들에 대하여 국가가 사과하고 배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근리 주민 살해 사건은 미군에 의한 일반 주민의 살육 사건이지만 비토리섬 학살 사건은 우리 주민에 의한 우리 주민에 대한 학살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우리주민이 차별을 받았던 한센인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더욱 심도있게 진상을 밝히고 우리의 잘못된 과거사를 반성해야 한다. 그러한 움직임은 한센인에 대한 인권보고가 있었던 작년 11월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언론에서도 한센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선 비토리섬 학살 사건에 대한 요즘의 기사들을 보자

주간 동아 2005년 2월 8일자 발행 472호의 기사의 일부이다. 한센병력자 강모씨의 증언 내용을 그대로 발췌한 것으로 되어있다.

1967년 9월의 일이구먼. 경남 삼천포 영복농원에 모여 살던 한센병력자 40명이 삼천포 앞바다의 비토리섬을 개간하려고 했어. 어떻게든 먹고살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어느 날 옆동네 주민들이 낫과 대창을 들고 몰려왔어. 우리들이 큰 천막에 숨자 화가 난 주민들은 그곳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지. 매캐한 연기에 질식하거나 모진 매질에 죽어간 사람이 20명은 족히 넘어. 나는 가까스로 배를 타고 도망을 쳐 목숨은 건졌지만 아직도 매질 후유증에 시달려. 머리에 검은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구먼. 보상받았냐고? 누가 그 사건에 책임을 지겠어.”

다음은 2004년 11월 11월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의 내용이다.

제목 90년만에 드러나는 소록도의 진실

1957년 8월, 나병환자 28명 사망! 그러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57년, 정부기록보존소 어디에도 그때 당시 판결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간지에 실린 기사 한 단, 아직 생존해 있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 그리고 마을 한 켠에 자리잡은 28명의 묘. 이것이 그때 사건을 풀 수 있는 실마리의 전부였다. 경남 서포항에서 300미터 떨어진 비토리섬 주민들과의 마찰로 한센병 환자 28명이 폭행당해 사망했다. 그러나 가해자 3명만이 2년형을 살고 집행유해로 풀려나 버렸다. 그렇게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 돼버렸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한센인들은 전국 88개의 정착촌에 자신들만의 생활터전을 만들어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간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들의 인권이 무시된 채 사회의 냉대와 차별 속에서 살아가는 현장을 추적해 본다.

앞의 동아의 기사의 67년이란 년대가 틀렸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기사로서는 큰 오류에 해당하지만 이것조차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이 더 큰 문제인가? 그것은 KBS 다큐멘타리의 나레이션 내용에서 볼 수 있다.

KBS 다큐는 비토리섬의 사건 시발을 한센병력자들과 주민들 간의 마찰에 의해서라고 보도한다. 주간 동아의 증언에서는 주민들이 낫과 대창을 들고 침입했다고 했다. 이미 마을 주민들은 휘발유를 들고 들어와 한센병력자들이 천막을 친 곳에 뿌리고 불을 질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디 민간인과 한센인들 간의 마찰인가? 마찰로 인한 폭행으로 벌어진 사망이 28명이라 했는데, 마찰로 인한 폭행으로 28명이나 죽을 수 있고 방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국영방송의 이런 제작자세는 처음 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군인과 시민들의 단순한 마찰 정도로 보도했던 것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항상 기존의 권력과 체제의 눈에 거슬리는 것을 주저한다. 그래서 마찰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폭력과 학살을 마찰 정도로 밖에 보지 못하는 초등학교 이하의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태도가 그들의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면(결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지금의 민주화시대에 와서도 모든 사람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는 언론인이 아니라 아직도 기득권자들의 눈치만을 보는 어용 방송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의 무의식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한센인들에 대한 비토리섬의 학살 사건은 삼천포 마을 주민들의 의도적인 한센인 학살이다. 오늘에 와서 이런 문제를 놓고 아무도 작가나 연출가의 작품에 검열이나 제제를 하지 않을 터인데도 KBS 다큐 작가나 프로듀서의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건을 마찰로 인한 폭행으로 규정한다. 그런 규정은 90년 만에 진실을 밝힌다는 제목을 써놓고도 진실을 외면하는 그들의 안이한 태도롤 보여주고 있다. 이 안이한 태도는 한센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차별의 예에 해당한다. 한센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차별만이 아니다. 이 나라 모든 힘없는 자들의 권리와 인권에 대해 그들은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그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때에만 시청율과 국민의 눈초리를 의식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척 했을 뿐이다. 그들이 학살에 대한 진실을 외면하고 그것을 마찰로 인한 폭행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일반 사람들의 천인공노할 학살과 방화 살인에 대한 비판과 반성보다는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숨겨주고 문00라는 천형을 받은 한센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 주겠다는 자신들의 거만함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라 할 수있다.

이런 언론인들과 지식인들의 자만과 거만함과 인권에 대한 무관심이 비토리 섬의 학살 사건이 역사 속에서 묻히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그 학살의 진실을 파헤친다면서도 그 사건을 마찰로 인한 폭행이라고 무마해나가는 걸 보면, 48년 전의 그 당시에는 어땠을 것인가가 가히 짐작이 가고 남을 만한 일인 것이다.

비토리 섬 학살사건의 진실

필자가 조사하고 증언을 들은 바에 의하면 삼천포의 영복 농원의 한센인들만 비토리 섬으로 간 것이 아니다. 진주에 모여 있었던 한센인들 70 여명도 거의 모두 비토리 섬으로 갔다. 그들이 비토리 섬으로 가게 된 이유는 도시의 중심에 한센인들이 교회를 짓고 거기서 짐자리(한센인들이 구걸하고 나서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잠을 청하는 장소)를 하는 것에 대해 주민들의 반대가 너무나 거세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경찰 서장이 한센병력자들에게 와서 차라리 섬으로 가 줄 것을 제안했다.

비토리 섬은 소록도 보다 조금 작은 섬이고 지금은 비토연육교로 이어져 있으나, 당시에는 서포 항에서 300 미터 떨어져 있는 섬이었고, 이미 일제 시대 때부터 주민들이 어느 정도 살고 있었던 섬이었다. 당시의 지방단체장들의 입장에서 보면 문00들이 거리에서 구걸행각을 하고 다니는 것보다는 육지에서 떨어진 섬에서 개간을 하고 사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한센인들 입장에서도 나중에 자신들의 땅이 될 수 있는 섬을 개간하는 것이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57년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 한센인들의 인식 속에 소록도는 그저 죽으러가는 땅이었다. 한센병에 걸려 소록도에 가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인식 아래서 소록도로 간 사람들 보다는 죽기싫어서 소록도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소록도처럼 관리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들만이 정착하고 살 수 있는 섬을 주겠다는 지방 관리들의 말은 그곳 한센인들에게 있어서는 꿈과 같은 이야기였고 당시의 삼천포와 진주, 고성 등에 있던 한센인들은 너도 나도 모여서 비토리 섬으로 갔다. 하지만 각 지역의 사람들은 같은 지역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는 알아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니 당시의 학살사건으로 수많은 한센인이 죽어도 한 지역의 살아남은 한센인의 입에서는 자기지역에서 온 사람들 중 죽은 사람들의 숫자만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사건을 축소하기를 원하는 관리와 언론에 그대로 적용되어 겨우 28명이 죽었다는 것으로 보도되었고 사실화 되었던 것 뿐이다..

비토리 섬으로 한센병력자들이 모여드니 당연히 비토리섬 앞의 서포항 주민들에게서 난리가 났다. 바로 앞 섬에 문00들이 모여 살면 비토리섬 주변 갯벌에서 생산되는 모든 해산물들의 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점이 그들 주민들에게 당면한 문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관공서와 단체장들의 주민들에 대한 교육과 계도로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방 관료들은 아무도 주민을 무마하는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그들이 관리하는 지역에서 문00들이 빠져 나갔다는 사실만을 만족했을 뿐이었고, 문00들이야 죽든지 살든지 간에 더 이상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문00들이 다시는 자기들이 관리하는 땅으로 돌아오지 않기만을 바랬을 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문00들이 생산하는 돼지와 닭과 계란을 먹고 살아왔다.

우리는 우선 이것부터 알아야 한다. 모르면 약이라 했던가? 일반 사람들 중 한센병력자들이 키운 돼지와 닭과 계란을 먹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한센병력자들이 키운 돼지와 닭과 계란인줄 알았다면 과연 먹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걸 먹게 하고 유통하시키기 위해서 국가나 관공기관에서 한센병이 치유되는 병이며, 전염되지 않으며, 재발하지 않는다는 3가지의 진실을 대국민 홍보에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국민들에게 돼지와 닭과 계란이 한센병력자들의 정착촌에서 생산된다는 사실만을 숨기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은 중간 상인들과 도매상들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했다. 문00들이 키운 돼지와 닭과 계란이라 해서 일반인들이 키운 것에 비해 훨씬 낮은 가격으로 수매하여 이익을 남겨왔는데, 문00들이 돼지와 닭과 계란을 생산한다는 것이 알려지고 나면 일반 사람들이 생산한 돼지와 닭과 계란 가격까지도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처음에는 약간의 파동이 있었겠지만 다시 돼지와 닭과 계란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정상화 될 것이었다.

한센인의 3가지 진실을 대국민 홍보를 하지 않은 것은 소를 제외한 축산물 가격에 있어서 중산 도매 상인들의 중간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위계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거기에 정부관료들이 철저히 편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센인들에 대해서라는 어느 것에서도 그들을 도와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용해먹고 착취해먹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 일반 사람들이었고 지배관료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비토리섬의 학살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토리섬의 학살은 관료들에 의한 섬주민의 학살 방조 및 선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에 살고 있는 김모 장로가 비토리섬에서의 학살사건을 당하고 살아남은 생존자이다. 김모 장로는 경상도 하동의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13살에 발병을 하였고, 집안의 골방에서 숨겨져 살다가 동네사람들 눈치에 집안이 고립되자 부모님에 하직인사를 올리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어디로 갈지 몰라 하동 강변을 헤메는데 다른 한센병력자들이 자기를 찾으러 왔다한다. 아들이 나병에 걸려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평소에 부모님들이 문00들에게 후하게 밥을 주고 했는데 그들도 자신이 나병에 걸려 골방에 갖혀 지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아들이 떠났다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자신을 찾아나섰다고 했다.

그때 그는 어린 나이에 동병상련이 무엇인지를 깊게 느꼈다고 했다. 그는 그 때 만난 한센인들 무리와 함께 어울리며 진주에 있는 짐자리에 자리 잡고 구걸을 통해 일단 생활을 영위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 덕분에 그나마 공부를 한 것이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도 조리있게 말을 할 줄 알았고, 따질 줄도 알았다고 한다.

당시 진주에 모여 있던 한센인들을 받아주는 교회가 없어 자신들이 교회를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교단의 노회에서는 교회를 짓는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가 장문의 글을 써서 노회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 때 그가 기억하기로는 당시 유명했던 김두영 목사의 가족을 도왔을 정도로 한센인들의 신앙심이 깊었다는 글을 썼다고 한다. 김두영 목사는 1953년 대구 총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했던 목사이며 소록도의 목사로 부임했고 부흥목사로 한 시대에 그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의 저서로는 '몰래 익은 포도송이'라는 회고록이 있다: 뒤에 소록도 교회 건립 사건에 대해 다시 언급될 것임) 당시 진주에 있었던 한센인 중에 이북에서 내려왔던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김두영 목사의 부인은 3자녀를 데리고 1948년에 월남 하였음: 김두영 목사의 회고록에서 참조함)

진주에서 조그맣게 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예배당에 불가한 조그만 방에 지나지 않았고 한센인들의 구걸하여 모이는 짐자리에 지붕을 올려놓는 방에 불가했다고 한다. 그런 한센인들이 모이는 곳을 진주 시민들이 마땅치 않았했던 것이었고, 당시 진주경찰 서장으로부터 삼천포의 비토리섬으로 옮겨 사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그는 주장했다. 서장의 제안에 진주의 한센인들은 모두 환호했다고 했다. 그 중 몇사람은 드디어 살 땅을 얻은 것 같다고 집의 아내에게 편지를 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비토리섬 학살 사건에 섬 주민들이 천막을 치고 있었던 한센인들을 무차별하게 낫으로 베어죽이고 죽창으로 찔려 죽였는데, 그 중 한 여인은 “자신은 문00의 아니지만 문00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제발 살려 달라”고 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여인마저도 “문00와 같이 있으며 다 문00이지”라고 하면서 그 여인마저 죽였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걸 보면 집으로 편지까지 하면서 비토리섬으로 식구들을 불러들인 한센인이 있었다는 김장로의 말에서 자신이 개간하여 먹고 살 수 있는 땅을 한센인들이 얼마나 원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센인들은 비토리섬으로 가게한 당신의 지방단체의 관료들은 왜 주변 주민들에게 그들이 제안해서 비토리 섬으로 보낸 것이니 이해해 주고, 한센병이 주변 주민들에게는 전혀 피해가 없는 병이라는 사실을 홍보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에서 한센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일단 도심의 중심지에서 문00들을 사라지게 한 다음, 그 다음은 그들이 어떤 억압에 피해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00 들이 당해야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님 비토리섬 주변 육지 주민들로 하여금 비토리섬으로 몰아넣은 문00들을 모두 죽여도 좋다고 오히려 충동하였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비토리섬에서 사망한 한센인은 28명이고 중상자만 100여명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눈으로 살해당한 시신으로 확인 한 것만을 상정한 것이다. 김노인은 육지에서 죽은 사람보다 바다로 헤엄치며 도망치다가 배위에서 치는 노와 죽창에 찔려서 죽은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 때 죽은 시신은 삼천포 다도해 사이를 흐르는 거센 물살에 떠내려 가서 사라져버렸을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김노인은 비토리 섬 천막 한쪽에서 방화가 일어나가 진주쪽에서 온 사람들은 다 해안가로 도망을 쳤다고 했다. 육지까지는 300미터밖에 안 되고 8월의 한 여름이었기에 헤엄을 쳐서 육지로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육지의 주민들은 그렇게 도망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도망가는 한센인들을 다 때려잡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학살과 추적을 통한 살인이 마찰로 인한 살인이란 말인가?

김노인도 주민들이 때리는 노에 맞고 기절했다고 한다. 그도 이틀 동안 정신 잃을 정도로 맞았다고 했다. 그가 깨어났던 것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를 시체 화장하는 나무더미에 밀어넣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그 장작불에 우선 다리부터 들어가지 그 다리의 뜨거움에 몸을 사리며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에 심한 화상이 다리에 남아있다고 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많은 시체들이 장작에서 타고 있더란다. 이런 김장로의 말을 통해서 보면 비토리섬에서 학살 당한 한센인의 수는 28명이 훨씬 넘을 수도 있다. 김장로는 백 여 명은 안 되어도 수십 명은 죽었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 사건에서 다치고 살아남은 한센인들에 대해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았다 한다. 이 사건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수에 있는 애생원에서 보살피는 수녀님들이 다친 한센인들을 치료하러 왔다고 했고, 김장로도 그 수녀님들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 했다. 그 당시 그는 그 수녀님들이 마치 선녀 같았다고 말한다.

김장로는 비토리섬의 학살사건이 단순히 한센인들과 일반 주민들 간의 마찰로 인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주민들에 의해 철저히 준비되어졌던 집단 학살극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KKK단이 흑인들을 겁주고 위해 모의하고 준비한 것 보다 더 무자비한 행위를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KKK는 겁주기 위해 흑인 한두 명을 시범적으로 죽였지만, 당시 삼천포의 주민들은 처음부터 수십 명을 집단 학살했고, 경찰과 관공서는 이런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도 손을 뒤로 잡은 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지방 괸리들이 주민들을 사주하고 학살을 방관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그랬기 때문에 수십 명을 죽인 집단 살인 사건에 형 집행으로 처벌 받은 사람은 고작 3명이다. 그것도 수십 명을 죽인 집단 살인죄에 3명이 겨우 징역 2년이란다. 나머지는 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이 사건에 대한 판결을 언급하는 것은 비토리섬의 집단 학살에 참여했던 사천시민들의 죄를 지금 와서다시 조사하고 물어서 그들을 처벌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 주민들이 집단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살육의 광기에 빠질 만큼 그들을 충동했던 주범들이 과연 누구였겠는 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의 경찰과 관공서의 사주였거나 그들의 의도적인 직무 유기였을 가능성을 밝혀보자는 것이다. 그 진실을 밝힌다면 국가는 모든 한센인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의 말을 전 국민 앞에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무자비한 압살을 받은 모든 한센인들에게 그 배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김근태 보건 복지부 장관이 1월 말에 소록도를 찾았다고 했다. 지금 그는 소록도를 찾는 쇼맨쉽을 발휘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수많이 당한 한센인들에 대한 잔혹한 살육과 폭력을 방기한 것에 대해 이 때까지 이 나라를 이끌어온 정부를 대신하여서라도 전국민 앞에서 한센인들에 대해 사죄부터 해야 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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