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告解聖事)
고해 성사만큼 개신교 신자들로 하여금 가톨릭 교회를 오해하게 하고 비방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하지만 고해성사만큼 가톨릭 신자로 하여금 이 고해성만큼 주님께서 주신 마음의 평화와 은총이라고 느끼게 하는것도 없다.
이 모든것은 일찍이 주님께서 인류의 붉은 죄를 당신 십자가의 공로로 눈같이 희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에 따라 세우신 성사를 감히 사람이 교만하게도 이것을 없애 버린 데 기인(p.226)한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로써 받은 하느님의 생명을 죄로 말미암아 잃었을 때 인간의 회심과 하느님의 용서로써 이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화해와 치유의 성사(p.226)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나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태 1,21) 성서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최대사명은 사람의 영혼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데 있으며, 그 이름을 말할 때에부터 이 진리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도데체 예수님은 지상생활을 마치시고 죄인인 우리에게 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사죄의 은혜를 베푸실까? 아마 2가지로 생각해 볼수가 있겠다.
첫째는, 회개하는 죄인이 있을때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처럼 말씀하시는 것과,
둘째, 사죄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세우신 당신 대리자인 성직자들에게 사죄권을 일임하시는 것(p.227) 일것이다.
하지만 성서에서 예수님은 회개하는 인간이 요청할때마다 그에게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약속하진 적도, 사죄 선언을 하기 위해 나타나신 적도 없으시다. 다만 주님께서는 구약시대이든 신약 시대이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늘 보여주시던 모습 그대로 당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성직자들에게 사죄권을 맡겨 대행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셨음은 성서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그 인자하신 계획의 실권을 인간인 대리자에게 맡기셨다;
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구해 내신 대업을 맡기신 일, 신약에서 예수님 승천 후 사도 바오로가 신자들을 박해하기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때 하느님께서 직접 치유하거나 회개시키거나 세례를 베풀지 않고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어 눈을 뜨게하고 세례를 베푸셨음.
예수님께서는 고해성사를 세우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 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 22-23)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써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이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는 말씀입니다. (2고린 5,19-20)-->말씀중의 우리라는 말은 곧 사도 바오로와 같은 사제, 즉 오늘날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거행할 수 있는 사제(신부, 주교)(p.229) 들을 말한다.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일꾼으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의 직무를 맡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기쁘게 받아 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 15, 16)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은총의 샘이시고 목자이실 때, 성직자(신부, 주교)들은 이 은총의 생명수를 신자들의 영혼에 나누어 주는 물길이며 예수님께서 양떼를 부르실 때 사용하는 나팔이자 양치는 개라고 할 수 있다.
고해소에서 사죄경을 외우는 성직자들의 목소리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정화하시던 성령의 소리의 반향인 것이다.(p.229)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아무리 설명해도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1고린 2, 14) 법이다. 죄를 지은 죄인들이 사도들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지 않고도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기 위한 자비의 보고 열쇠를사도들에게 맡기실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이를 통해서 우리는 사죄함의 은혜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사죄권 행사로 인해서만 받게 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고해성사만 보면 쉽게 죄사함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더욱 양성한다.'라는 일부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말은 고해성사를 체험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로써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물론 고해성사후에 같은 죄를 또 지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의 약함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진정 주님을 믿고 죄를 미워하는 신자라면 같은 죄를 자신의 입으로 하느님의 대리인인 사제에게 또 고백한다는 것은 사제에게 말하기 때문이라기 보다 (비밀이 확실히 보장되므로) 같은 죄를 자꾸 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복한다는 데서 오는 인간적인 싫증때문에 또 다시 고해성사를 받기 싫어서라도 죄에 저항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세우신 이 성사에는 특별한 치유의 은총이 따르기 때문에 다시 범할 죄의 기회마저 멀리 해주는 신비가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서울 가본 사람과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언쟁을 하면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p.230) 그러므로, 신자로써 가톨릭 의식 않에서의 신비를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하고 감히 성사에 대해 헐뜯는 다는것은 합당하지 않다.
고해 성사를 받은 후의 느끼는 기쁨과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평화와는 다르고 성사를 받아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느낄수 없는 것이다.
이런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중요한 요소들이 몇가지 있다.
첫째, 지은 모든 죄를 정확히 알아내고 (성찰)
둘재,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며(통회)
셋째,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정개)
넷째, 알아낸 죄를 겸손되이 숨김없이 고백하고 (고백)
다섯째, 사제가 주는 보속을 주는 보속을 실행해야 한다.(보속=기워갚음).(p.231)
위의 요소 중 한가지라도 소홀히 할 바엔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마도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말은 위의 요소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빠뜨린 극 소수를 두고 전체로 오인한 말일 것이다.(p.231)
몇가지 교부들의 증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1세기의 [12사도 교리]에는 "여러분의 죄를 고백한 다음 빵을 떼며 감사하십시오...죄를 고백하십시오. 더러워진 양심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Didache c. iv;xiv). 3세기의 치프리아노는 "형제 여러분 자기 죄를 고백하십시오. 사제로 인해 이루어지는 사죄와 보속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후세에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현세에서 죄를 고백하도록 마련하셨다...누구든지 '나는 하느님께 직접 죄를 고백한다'든가 '하느님 앞에서 고백하겠다' 는 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하늘의 열쇠를 교회에 맞기신다'는 말씀은 헛소리인가? 우리가 무엄하게도 복음서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대로 없애 버리겠다는 것인가?"(Hom xx. Semo cccxcii)(p.232)이렇게 고해성사는 초대 교회 때부터 전래되어 온 은총의 성사로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성사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라고 말씀하셨다.(p.232)
헌데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던 날 저녁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며 "목욕을 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너희도 그처럼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요한 13, 10)라고 하신 말씀은 앞으로 고해성사의 사죄권을 받을 베드로와 동료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 뒷부분(모두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은 장차 이 고해성사를 배척하고 심지어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이 고해성사를 부인하는 '죽음의 힘'에게도 하신 말씀임을 명심해야 한다.(p.232)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에게 죄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고해성사와 뉘우침 그리고 보속을 통해 세례 때 받았던 순결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킬 수 있다.(p.232)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1, 18). "그러나 우리의 뉘우치는 마음과 겸손하게 된 정신을 받아 주소서" (다니 3,39).(p.232)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단 한 번의 범죄로 낙원에서 쫒겨나는 원죄를 범했고, 주님의 천사 루시퍼도 단 한번의 범죄로 사탄이 되었는데,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주님께서 이룩하신 고해성사로 말미암아 두번, 세번 또 여러번의 범죄를 용서받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죄 사함 받기 위해 혼자 소리지르며 기도하며 땅만 친다고 되는 일은 결코 아닌 것이다.(p.233)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p.g.226~233
-주님 저를 가톨릭교회로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김 안토니오 지음, 동진 A.(안토니오)TNP(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