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
키다리 아저씨
아주 행복한 날이에요! 지금 막 마지막 시험을 끝마쳤어요.
마지막 과목은 생리학이었답니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3개월의 농장 생활!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저는 농장이 어떤 곳인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본적이 없거든요(자동차의 창문으로 본 것 밖에는 한 번도 본 일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좋아질 거예요. 그리고 또 자유를 즐길 수 있으니까요.
저는 아직도 완전히 존 그리어 고아원 밖에 있다는 기분이 들질 못합니다. 언제나 고아원 일을 생각할 때마다 무언가가 등줄기에서 쫓아오는 듯한 한기를 느낍니다. 마치 리펫 원장님이 저를 데려가려고 팔을 뻗쳐서 쫓아오지나 않나 하면서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며 좀더 빨리, 더욱 빨리 달아나야 할 듯한 기분입니다.
이 여름에 저는 아무에게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겠죠. 아저씨의 명목상의 권한 같은 건 조금도 저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걸요.
리펫 원장님은 저에 관한 한 영원히 죽고 없으며, 셈플 씨들은 저의 품행같은 걸 감독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고 말고요.
저는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어 버린걸요. 만세!
그럼 이제부터 짐을 꾸리겠습니다. 주전자며 접시며 쿠션, 책 등을 세 개의 상자에다 꾸려 넣어야 하므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당신의 영원한
주디 올림
추신
생리학 시험 문제를 함께 보냅니다. 아저씨라면 합격될 것 같아요?
토요일 록 윌로 농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키다리 아저씨
지금 막 도착해서 아직 짐도 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얼마나 제 마음에 들었는가 이야기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군요. 여기야말로 정말 천국과 같이 멋진 곳입니다. 집은 이 그림처럼 네모난 것인데 매우 고풍스러운 건물입니다.
백년 이상이나 되었답니다. 옆쪽에 베란다가 달려 있지만 그림으로는 못 그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현관이 정면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진짜 모습을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새의 깃털로 된 먼지 떨이 같은 것은 단풍나무이고, 현관으로 가는 통로를 따라 심어져 있는 삐죽삐죽한 것은 바람에 솔솔거리는 소나무와 솔송나무입니다. 이 집은 언덕 위에 있어서 언덕과 언덕과 언덕이 끝없이 이어진 푸른 목장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코네티컷 주는 이처럼 물결 모양으로 주름잡힌 굴곡이 심한 물결 모양의 지형인데 록 윌로 농장은 그 물결의 꼭대기에 있습니다. 전에는 도로 저쪽에 창고가 나란히 있어서 전망을 방해하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친절한 번개가 그걸 태워 버렸습니다.
이 곳에 사는 사람은 셈플 씨 부부와 일하는 아가씨 한 명과 일꾼 두 명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부엌에서 식사를 하고 셈플 씨와 주디는 식당에서 먹습니다. 저녁에는 햄, 계란, 비스킷, 꿀, 젤리, 버터, 치즈를 먹고 홍차까지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는 처음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다 우스운 모양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이제까지 시골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저의 질문은 틀림없이 무식함을 드러내고 있을 테니까요.
앞 그림의 *표가 있는 곳은 결코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아닙니다. 제 방이에요. 크고 널찍하고 멋진 옛날식 가구와 막대기로 밀어서 열게 되어 있는 창문과 금빛 테두리를 한 녹색 차양- 잘못해서 이걸 건드리면 떨어집니다- 그 밖에 네모진 큰 마호가니 책상이 있습니다.
저는 여름 내내 이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소설을 쓸 작정입니다.
아저씨, 저는 아주 흥분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를 탐험하고 싶어 밤이 새기를 기다릴 수 없을 정도예요.
지금은 오후 8시 30분, 저는 촛불을 끄고 자려는 참입니다.
우린 5시 기상이에요. 이렇게 유쾌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게 진짜 주디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분입니다. 아저씨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저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많이많이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저는 매우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두고 보세요. 안녕.
안녕히 주무세요.
주디
추신
개구리 소리와 아기돼지의 울음 소리를 아저씨에게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초승달도 보여 드리고 싶고요. 저는 지금 오른쪽 어깨 너머로 초승달을 보고 있습니다(오른쪽 어깨 너머로 초승달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함).
7월 12일
록 윌로에서
키다리 아저씨
어떻게 아저씨의 비서가 록 윌로를 알고 있었는지요(이건 수사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저는 몹시 그걸 알고 싶은 거예요). 들어 보세요. 왜냐하면 이 농장은 전에 저비스 펜들턴 씨의 소유였던 것을 옛날 자기 유모였던 셈플 부인에게 주었다는군요. 이렇게 이상한 우연의 일치가 있을까요? 부인은 지금도 펜들턴 씨를 '저비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얼마나 귀여운 아이였는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펜들턴 씨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의 곱슬머리를 상자 속에 넣어 두고 있습니다. 빨갛다기보다는 불그스레한 빛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펜들턴 씨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안 뒤로부터는 저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습니다. 펜들턴 집안의 한 사람과 안다는 것은 록 윌로에서는 최고의 소개장이 됩니다. 더구나 저비 도련님은 가족들 중에 최고로 인기가 좋다는 군요- 줄리아의 집이 훨씬 격이 낮은 가문이라는 걸 듣고 저는 기뻤습니다.
농장 생활은 더욱더 재미가 있어집니다. 어제는 건초 마차를 타보았습니다.
이 곳에는 세 마리의 어미돼지가 아홉 마리의 귀여운 아기돼지가 있습니다.
그 왕성한 식욕은 아저씨에게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돼지처럼 잘 먹는다는 말은 정말 그럴 듯한 말이에요. 그리고 작은 병아리와 오리, 칠면조와 암탉 등이 많이 있습니다. 아저씨는 농장에서 사실 수 있는 신분인데 도시에서 사신다니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돼요.
저의 일과는 달걀을 모으는 일입니다. 저는 어제 검은 암탉이 숨어든 둥우리에 접근하려다가 창고 2층 대들보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무릎이 까져서 안채에 들어갔더니 셈플 아주머니는 개암나무 즙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면서 계속해서 "원 쯧쯧, 저비 도련님이 그 대들보에서 떨어지셔서 같은 데를 다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하고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근처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골짜기가 있고 시냇물이 있고 곳곳에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으며 저 멀리엔 입에 넣으면 녹아내릴 듯한 푸른 산이 솟아 있습니다.
우리는 1주일에 두 번 버터를 만듭니다. 그리고 크림은 냉장실에 넣어 둡니다. 그 곳은 돌로 지어져 있으며 밑에는 시냇물이 흐릅니다.
이 근처 이런 농가에서는 거의 다가 분리기를 쓰고 있습니다만, 우린 그와 같은 새로운 방법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냄비로 크림을 만드는 것은 힘이 듭니다만 그 대신 훨씬 비싼 값으로 팔립니다. 송아지가 여섯 마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녀석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1. 실비아- 숲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2. 레스비아- 카툴루스(로마의 시인)의 시에 나오는 레스비아의 이름을 따서.
3. 샐리.
4. 줄리아- 아무런 특징도 없는 얼룩 송아지.
5. 주디- 제 이름을 붙였어요.
6. 키다리 아저씨- 언찮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이 송아지는 순수한 저지 종이고 성질이 아주 온순합니다.
농장 일이 너무 바빠서 아직 불후의 명작을 쓰기 시작할 틈이 없습니다.
언제나 아저씨의
주디가
추신(1)
저는 도넛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추신(2)
아저씨께서 병아리를 기르실 생각이 있으시면 버프오핀튼 종을 권해 드립니다. 이 종의 병아리는 전혀 솜털이 없습니다.
추신(3)
제가 어제 만든 버터를 한 덩어리 보내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저는 훌륭한 젖짜는 아가씨예요.
추신(4)
이건 미래의 대작가 저루샤 애벗 여사가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입니다.
일요일
키다리 아저씨
매우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어제 오후 저는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키다리 아저씨'하고 쓰기 시작할 무렵, 저녁 식사에 쓸 검정딸기를 따오기로 약속했던 것이 생각나서,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 놓은 채 갔었지요. 그리고 지금 돌아와 보니 편지지 한 가운데 무엇이 앉아 계신지 아시겠어요? 그야말로 진짜 키다리 아저씨(장님 거미)였지 뭐예요!
저는 조심조심 다리 하나를 잡아 창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이 장님 거미의 다리를 하나라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걸 보면 언제나 아저씨가 생각나니까요.
우리는 오늘 아침 스프링이 달린 짐마차를 타고 읍내를 지나 교회까지 갔습니다. 교회는 조그맣고 아름다운, 흰 목조 건물로 뾰족탑이 한 개 있고, 정면에는 도리아 식(어쩌면 이오니아 식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언제나 혼동하고 말거든요)의 기둥이 세 개나 있습니다.
기분 좋게 잠이 솔솔 오는 설교인지라 모두가 반은 졸면서 종려나무잎 부채를 부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목소리 외에 들리는 것이라곤 정원의 나무에서 맴맴 우는 매미 소리뿐이었어요. 저는 일어서서 찬송가를 부를 때까지 눈이 떠지질 않았어요. 그 때서야 저는 설교를 듣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찬송가를 고르게 된 목사님의 심리 상태를 알고 싶었던 거예요. 그 찬송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어요.
이 세상의 즐거움과 위안을 버리고
천국의 기쁨을 나와 같이 할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친구여 지옥에 떨어져도
나는 그대를 돌아보지 않으리
저는 셈플 씨 내외와는 종교를 논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들은 하느님(글쎄 먼 옛날에 청교도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하느님이거든요)은 마음이 좁고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고, 천하며 복수심이 강한 고집스러운 인물입니다. 다행하게도 저는 누구에게도 하느님을 물려받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마음대로 제가 좋아하는 하느님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은 친절하고 동정심이 있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죄를 용서해 주고 이해심이 많으며, 게다가 유머를 아는 하느님이예요.
저는 셈플 씨 내외분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분들은 말보다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주 훌륭합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니까 두 분 다 몹시 당혹해하고 계셨습니다. 셈플 씨 내외분은 제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분들이야말로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우리는 종교를 화제 삼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일요일 오후입니다.
하인 애머사이는 보랏빛 넥타이에 화려한 노란색 사슴 속가죽 장갑을 끼고, 수염을 말끔히 깎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캐리(하녀)를 마차에 태우고 조금전에 놀러 갔습니다. 캐리는 푸른빛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머리전체를 파마머리로 바꾸어 가지고 장미꽃을 장식한 카다란 모자를 쓰고 갔습니다.
애머사이는 오전 내내 사륜 마차를 닦고 있었고, 캐리는 겉으로는 저녁 준비를 해놓아야 한다는 이유로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만, 정말은 모슬린 드레스에 다림질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앞으로 2분 동안에 이 편지를 다 써버리고 저는 다락방에서 발견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책은 '추적'이라는 제목인데 속표지에는 어린이다운 우스운 필적으로,
만약 이 책이 길을 잃고 돌아다니고 있으면
따귀를 때려서 집으로 돌려보낼 것.
저비스 펜들턴
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펜들턴 씨는 열 한 살쯤 되었을 때, 병을 앓은 후 한여름 동안 여기서 보낸 적이 있어 돌아갈 때 '추적'을 남겨 놓고 간거예요. 아주 즐겨 읽은 모양으로 더러운, 작은 손가락이 여기 저기 묻어 있습니다.
다락방에는 아직도 물레방아와 풍차, 그리고 활과 몇 개의 화살이 있습니다. 셈플 아주머니가 너무 저비 도련님 이야기만 하므로, 저는 이 도련님이 아직도 이 근처에 있는 듯한 기분이 되는군요. 실크해트를 쓰고 지팡이를 든 어른이 된 저비스 씨가 아니라 수선스럽게 계단을 우당탕 뛰어오르고, 덧문을 환히 열어 젖히기도 하며 언제나 과자를 달라고 졸라대는, 귀엽고 때묻은 머리가 마구 엉클어진 소년입니다(셈플 아주머니라면 조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과자를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이 소년은 모험을 좋아하고 용감하고 정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저비 도련님이 펜들턴 집안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유감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않았었다면 그분은 아마 좀더 훌륭한 인물이 되셨을 거예요.
내일부터 보리 탈곡이 시작됩니다. 증기기관이 오고 인부들도 올 것입니다.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만 버터컵(뿔이 하나 있는 얼룩소로, 레스비아의 어미입니다)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금요일 저녁때 과수원에 들어가서, 나무에 달려 있는 사과를 얼마나 많이 따먹었던지 머리가 멍해지도록 먹고, 이틀 동안 취해서 곤드레만드레입니다.
이건 정말이에요. 이런 고약한 소를 보신적이 있으세요?
애정이 넘치는 고아
주디 애벗 올림
추신
'추적'은 매우 유쾌한 책입니다. 제1장에 인디언, 제2장에 노상 강도가 등장합니다. 제3장에는 무엇이 나타날까요?
'붉은 독수리는 6미터 상공으로 날아올랐는가 싶더니 툭 하고 땅 위에 쳐박혔다.'
이건 책 첫머리 그림의 제목입니다. 주디와 저비는 매우 유쾌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9월 15일
키다리 아저씨
저는 어제 네거리에 있는 잡화점에서 밀가루 저울로 달아 보았는데 4킬로그램이나 늘었지 뭡니까?
록 윌로를 좋은 휴양지로서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변함 없는
주디 올림
9월 25일
키다리 아저씨
이제 저도 2학년이 되었어요. 지난 주 금요일에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록 윌로를 떠나는 것은 슬펐습니다만, 다시 또 교정을 보게 된 것은 기뻤습니다.
무엇이든 정든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저는 이제야 대학을 내 집처럼 느끼기 시작하여 마음 편히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저는 온 세상이 내 집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정심으로 마지못해 끼어 준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들어 있다는 기분이에요.
아저씨께서는 아마도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평의원님처럼 높으신 분들에게는 버려진 아이와 같이 비천한 자의 기분 같은 걸 아실 까닭이 없거든요.
그런데 아저씨, 잘 들어 보세요. 제가 도대체 누구하고 한방이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샐리 맥브라이드와 줄리아 펜들턴이에요. 정말입니다! 보세요.
우린 서재와 침실을 세 개 갖고 있어요.
지난 봄에 샐리와 저는 같은 방에 있자고 의논했었지요. 그러자 줄리아가 샐리와 같이 있겠다는 거예요. 어째서인지 저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조금도 공통점이 없거든요. 그러나 펜들턴 집안 사람들의 천성이 보수적이어서 변화를 적대시(멋진 말이죠?)하고 있어요. 어쨌든 우리 세 사람은 같은 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존 그리어 고아원 출신인 저루샤 애벗이 펜들턴 집안 사람과 한 방에 있게 되었다니까요. 확실히 여긴 민주적인 나라예요.
샐리는 과대표로 입후보하였습니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꼭 당선할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작전을 짜고 있는 이 분위기란- 우리가 얼마나 정치가적인가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랍니다. 앞으로 우리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그 때에는 아저씨들은 남성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크게 운동해야 될 거예요. 선거는 이번 토요일에 있습니다. 그 밤에는 누가 이기든지 횃불 행렬을 할 것입니다.
저는 화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매우 진귀한 공부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것은 본 적도 없습니다. 분자와 원자가 교재로 취급됩니다만, 다음 달이 되면 이런 것을 분명히 논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변론과 논리학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사도
또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도,
그리고 또 프랑스 어도.
이런 식으로 몇 년 동안 계속하면 저는 아주 영리해질 거예요. 사실은 프랑스 어보다 경제학을 하고 싶었는데,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왜냐하면 1년 더 프랑스 어를 계속하지 않으면 프랑스 어 선생님이 낙제점을 주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6월의 시험 때는 가까스로 낙제를 면했거든요.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 고등학교 때의 준비가 많이 부족했었어요.
우리 클라스에 프랑스 어를 영어나 다름없이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애는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외국에 가서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3년을 지냈다는군요. 그러니 클라스의 다른 학생들에 비해 얼마나 뛰어나겠는지 상상하실 수가 있겠지요. 불규칙 동사쯤은 장난감 다루듯 합니다. 생각할수록 나의 부모가 나를 고아원에 버리지 말고 프랑스의 수도원에나 던져 놓았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안 되겠지요. 만약에 그랬다면 저는 아저씨를 못 만났을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프랑스 말 같은 것보다는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훨씬 다행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저는 이제부터 핼리에트 마틴을 방문하여 화학 문제를 토의한 뒤에 슬쩍 이번 과대표 선거에 대해 두서너 마디 언급하고 올 작정입니다.
정치 운동중인
J. 애벗 올림
10월 17일
키다리 아저씨
만약 체육관 수영장에 레몬 젤리가 가득 차 있다면, 그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은 표면에 떠 있을까요, 아니면 가라앉아 버릴까요?
우리가 식사 후 레몬 젤리를 먹고 있을 때, 이런 문제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반 시간이나 이 문제에 대해 격론을 벌였습니다만, 아직도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샐리는 그 속에서 헤임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저는 아무리 수영에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가라앉고 말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젤리 속에서 익사하다니, 무척 재미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밖에 두 가지 문제가 우리 식탁에서 의제가 되었습니다.
첫째, 팔각형으로 된 집의 방은 어떤 형태가 될까요? 4각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파이의 한 조각 같은 모양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둘째, 거울로 만든 아주 커다란, 속이 빈 둥근 물체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안에 앉으면, 어디쯤에서 얼굴이 비치지 않고 등이 비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건 생각할수록 더욱 모르겠군요. 아저씨는 우리가 얼마나 깊이 있는 철학적 고찰로 여가 시간을 이용하고 있는지 잘 아셨겠지요?
선거에 대해 말씀드렸는지 모르겠군요.
3주일 전에 있었어요. 하지만 너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보니, 3주일 전에 있었던 일 따위는 고대사에 속해 버리고 맙니다. 샐리가 당선되었어요. 그래서 '맥브라이드 만세!'라는 글씨가 든 플래카드를 둘러메고, 14악기로 편성된 악대- 하모니카 3개와 콤(빗 모양으로 된 악기의 일종) 11개- 로 횃불 행진을 하였습니다.
258호실의 우리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줄리아와 저까지 그 후광을 입고 있습니다. 과대표와 한 방이라는 사실은 사교상으로 상당히 신경이 쓰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저의 경의를 받아 주시기를.
가슴 속 가득히 존경을 담은
아저씨의 주디 올림
그림 설명: 맥 브라이드 만세(치마 입은 여자아이 셋이 손을 잡고 있음)
11월 12일
키다리 아저씨
이제 농구시합에서 1학년을 이겼습니다. 물론 우리는 크게 기뻐했지요- 하지만 3학년에게 이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렇다면 저는 기꺼이 온몸에 멍투성이가 되어 개암나무 즙으로 찜질을 하면서 일주일쯤 누워 있었을 거예요.
샐리가 크리스마스 휴가에 저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샐리의 집은 메사추세츠 주의 우스터에 있습니다. 정말 친절한 아이예요. 저는 꼭 가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록 윌로 이외에는 한 번도 다른 가정에 들어가 본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또 셈플 씨 부부는 어른이고 나이가 든 분들이라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맥브라이드 집안에는 아이들이 가득합니다(적어도 둘 아니면 셋). 게다가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에 앙고라 고양이가 한마리, 그야말로 완전한 가정이지요. 짐을 꾸려 가지고 가는 것이 기숙사에 남아 있는 것보다 얼마나 유쾌한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 때를 기대하며 매우 흥분하고 있답니다.
일곱째 시간입니다- 연극 연습을 하러 뛰어가야겠습니다. 저는 추수 감사절 연극에 나가게 되었거든요. 우단으로 만든 웃저고리를 입고 노란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왕자가 되어 탑에 있는 것입니다. 멋있지요?
아저씨의 J. A
토요일
제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이것이 리오노러 펜턴이 찍어 준 우리 세 사람의 사진입니다. 얼굴이 희고 웃고 있는 것이 샐리, 또 한 사람 키가 크고 거만헤 보이는 건 줄리아, 그리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덮여 있는 것이 주디예요- 사실 저는 이보다 훨씬 미인이지만, 햇빛이 비쳐 눈이 부셨던 겁니다.
12월31일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 스톤 게이트에서
키다리 아저씨
좀더 빨리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감사 편지를 쓸 생각이었습니다만, 맥브라이드 집안의 생활이 너무도 마음을 빼앗는 일뿐이어서, 2분 이상 책상 앞에 앉아 있을 틈이 없었습니다.
저는 새 드레스를 샀습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가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저씨한테서 받은 것뿐이고 가족들은 사랑이 담긴 말을 보내왔을 뿐이에요.
저는 샐리의 집을 방문하여 아주 멋있게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샐리네 집은 흰 장식이 달린 고풍스러운, 벽돌집으로, 큰 길에서 좀 들어간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옛날 존 그리어 고아원에 있을 때, 호기심에 가득 차 바라보며, 그 안에 들어가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던 집과 꼭 같습니다. 저는 제 눈으로 그걸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게 마음에 들고, 차분하여 정말 가정다운 곳입니다. 저는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마음껏 가구들을 구경합니다.
그야말로 아이를 키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집입니다. 숨박꼭질하기에 꼭 좋은 어두컴컴한 구석과 팝콘을 만들기에 그만인 난로, 비오는 날 장난치기 좋은 다락방과, 매끈매끈한 난간 맨 아래에는 납작한 난간 기둥머리가 달려 있으며, 매우 넓고 양지바른 부엌이 있습니다. 13년이나 이 집에 있었다는 요리사는 항상 반죽한 밀가루덩이를 남겨 두었다가 아이들에게 줍니다. 얼핏 보기만 해도 다시 한 번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집입니다. 모든 가족들은 또 어떻고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일 줄은 미처 몰랐어요. 샐리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곱슬머리의 너무나 귀여운 세 살짜리 여동생과, 항상 발씻기를 잊어버리는 중간키의 남동생, 또 지미라고 하는 잘 생긴 오빠가 있답니다. 이분은 프린스턴 대학 3학년입니다.
식탁에서의 떠들썩함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모두가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고, 농담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 전에 기도 같은 것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한입 먹을 때마다 아무개 씨에게 감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정말 마음이 편합니다(저는 분명히 신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도 저처럼 진저리가 나도록 감사 기도를 강요당해 본 적이 있다면, 저와 똑같이 생각할 거예요).
무척 많은 일을 했어요. 어느 것부터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맥브라이드 씨는 공장을 가지고 계시는데,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종업원의 자녀들을 위해 트리를 세워 주셨습니다. 파티장은 공장의 길쭉한 포장실로서 사철 나무와 호랑가시 나뭇잎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지미 맥브라이드가 산타클로스로 분장하고 샐리와 제가 아이들에게 선물 나누어 주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아저씨, 정말 묘한 기분이에요. 어쩐지 제가 존 그리이 고아원의 평의원처럼 인자한 마음이 되었거든요. 저는 엿으로 얼굴이 진득진득해진 사내아이에게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이틀 뒤, 맥브라이드 씨 댁에서 저를 위해 댄스 파티를 열어 주셨습니다. 제게는 이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무도회였어요.
여자끼리 추는 학교의 댄스 파티 따윈 문제도 안 됩니다.
저는 흰색의 새 야회복을 입었습니다(이건 아저씨께서 보내 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희고 긴 장갑을 끼고 하얀 비단 무도화를 신었습니다. 흠 잡을 데 없는 완전한 행복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지미 맥브라이드와 팔을 끼고 맨 앞에 서서 춤을 추는 제 모습을 리펫 원장에게 보여주지 못한 점입니다. 아저씨가 다음에 존 그리어 고아원에 가시거든 리펫 여사에게 말씀해 주세요, 네?
언제나 당신의 벗인
주디 애벗
추신
어저씨, 만약 제가 앞으로 대작가가 되지 못하고 단지 평범한 여자가 되어 버린다면, 아저씨는 무척 서운해 하시겠지요?
토요일 오후 6시 30분
우리는 오늘 시내까지 걸어갔습니다. 비가 어떻게 억수같이 오는지! 저는 역시 겨울답게 비가 아니라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줄리아의 호감 가는 삼촌께서 오늘 오후에 또 찾아오셨습니다. 2Kg이나 되는 초콜릿 상자를 갖고 오셨습니다. 줄리아와 한 방에 있는 득을 톡톡히 보는 셈이지요. 우리들의 시시한 얘기가 재미있으신지, 삼촌은 예정했던 기차도 한 번 보내버리고 서재에서 차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허락을 받아내는 데 무척이나 힘이 들었어요. 기숙사 안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접하는 것도 쉽지 않고 보니, 삼촌쯤 되면 더 어렵지요. 형제나 남자 사촌쯤 되면 이건 이미 불가능에 가깝답니다. 줄리아는 공증인 앞에서 분명 삼촌이라는 걸 맹세하고, 또 군청 서기의 증명서를 교부받아야 했어요.
(제가 무척 법률에 밝죠?) 그 정도의 수속이 끝났어요, 만일 저비스 씨가 잘 생기고 젊다는 게 사감 선생님 눈에 띄었더라면,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군요. 어쨋든 우리는 검은 빵과 스위스 치즈의 샌드위치로 차를 마셨습니다.
저비스 씨께서는 그것을 거들어 주시고 네 개나 드셨습니다. 제가 이번 여름 록 윌로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자, 우리는 셈플 씨 이야기, 말과 소, 병아리 이야기를 하면서 매우 유쾌했습니다. 저비스 씨가 알고 있는 말은 다 죽고 그로버가 한 마리 남았을 뿐인데, 그 말은 저비스 씨가 마지막으로 농장에 가셨을 때엔 아주 어린 송아지였다는 거예요. 가엾게도 그로버는 이제 늙어버려 지금은 가까스로 절름거리면서 목장을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저비스 씨는 지금도 셈플 씨 댁에서는 맨 아래쪽에 있는, 파란 접시로 뚜껑을 닫은 노란 단지에 도넛을 넣어 두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야간용 목장의 바위를 쌓아올린 밑에 지금도 들쥐 구멍이 있을까 하셨습니다만, 있고 말고요! 지난 해 여름에 살찌고 큰 회색 들쥐를 잡았는데, 그것은 저비 도련님이 어린 시절에 잡은 것의 25대째 자손이었대요.
저는 그분 앞에서 저비 도련님이라고 말했습니다만, 별로 기분 나쁜 표정은 보이지 않으시더군요. 줄리아는 이렇게 부드럽게 행동하는 삼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여느 때는 상당히 사귀기 힘든 분이래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줄리아가 전혀 재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재치가 남자들을 다루는 데는 매우 필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털이 난 대로 살살 쓰다듬어 주면 목구멍을 울리며 좋아하고, 거꾸로 쓰다듬으면 씩씩 화를 내는 물건이에요(이건 그다지 고상한 비유는 못 되지만, 저는 비유로 쓴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마리 바쉬키르헤프(러시아의 요절한 천재적 여류 화가)의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한 번 들어 보세요. 정말 놀랄 일이에요. '어젯밤 나는 발작적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음 소리를 내었으나, 결국 참을 수 없어 식당의 시계를 바다 속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이걸 읽고 저는 제가 천재가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재같은 사람을 곁에 두었다가는 신경이 닳아 빠지고 말 거예요. 게다가 너무 파괴적인 것 같아요.
원 세상에 비가 잘도 오는군요. 오늘 밤은 교회까지 헤엄쳐서 가야 할까봐요.
언제나 당신의 벗인
주디 올림
그림 설명: 치마 입은 여자 아이가 빗 속에 우산 쓰고 가는 모습
1월 20일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는 혹시 요람 속에서 도둑 맞은 예쁜 여자 아기를 가진 적이 없으세요? 제가 그 아기인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소설이라면 이쯤 해서 대단원이 시작되겠지요.
자기의 출생의 비밀을 모르다니, 정말 이상한 기분입니다. 약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로맨틱한 느낌이에요.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지요.
저는 어쩌면 미국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런 아이들이 많이 있거든요. 고대 모라인 직계의 자손일지도 모르고, 북유럽 해적의 딸일지도 모르죠. 어쩌면 당연히 시베리아의 감옥에 있어야 할 러시아 사람의 아이일지도 모르며, 또한 집시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아저씨는 저의 경력 가운데에서 저의 부끄러운 오점을 알고 계시는지요? 제가 과자를 훔친 죄로 벌을 받고 고아원을 도망친 얘기 말예요. 이건 평의원님이라면 마음대로 보실 수 있는 기록부에 씌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이런 일들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배고픈 계집아이를, 바로 손이 닿는 비스킷 그릇이 있는 곳에서 칼을 닦게 해 놓고, 더구나 혼자 거기다 남겨 두고 나갔다가 느닷없이 들어와 보니, 그 아이 입가에 비스킷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겠지요... 그래서 그 아이의 팔을 잡아 흔들고 따귀를 찰싹 때리고는, 식탁에 식후의 푸딩이 나왔을 때 일으켜 세워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애는 도둑질한 벌을 받는다고 했으니, 그 아이가 도망치려고 한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저는 겨우 6킬로미터 정도 달아났다가 끝내 잡혀오고 말았습니다. 그 뒤 1주일 동안 저는 다른 아이들이 노는 시간에는 마치 장난을 한 강아지처럼 뒷마당의 말뚝에 묶여 있었어요.
아차! 예배 종이에요. 예배가 끝나면 위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이런 편지를 써서 죄송합니다. 이 다음 번에는 아주 재미있는 편지를 쓸 작정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사랑하는 아저씨에게 평화가 있으시기를
주디로부터
추신
단 한 가지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저는 중국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월 4일
키다리 아저씨
지미 맥브라이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기를 부쳐 주었습니다. 그건 우리 방의 한쪽 벽을 덮어 버릴 정도로 크답니다. 저는 매우 고맙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도대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연합니다. 샐리와 줄리아는 그것으로 방을 장식하는 것에 반대예요.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방을 올해는 빨간색으로 장식해 놓았으므로, 거기다 오렌지와 검정의 깃발을 걸면 어떤 결과가 되겠는가 상상하실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포근하고 따뜻한 아주 멋진 것이므로, 버려두는 것도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것으로 목욕 가운을 만든다면 괘씸한 일일까요? 지금까지 쓰던 것은 빨았더니 줄어들고 말았거든요.
요즘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려 드리는 것을 게을리했군요. 그러나 아저씨께서는 저의 편지에서 공부하는 자취를 발견 못하셨을지라도, 저는 시간을 대부분 공부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다섯 과목에 걸친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무척 어리둥절해지는 일입니다.
'참된 학생의 증거는 어떤 고통도 감수하고, 세밀한 것까지의 연구에 정열을 쏟는 데 있다.'라고 화학 교수님이 말씀하시는가 하면, 역사 교수님은, "세밀한 것에 사로잡히지 말고 전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화학과 역사 사이를 배워가면서 얼마나 교묘하게 피해가는지 잘 알 수 있으시겠지요? 저는 역사적인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가령 제가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에 건너간 것은 1492년이고,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것이 1100년 또는 1066년이라고 해도 역사 교수님은 너그럽게 보아 주신다는 거죠.
그래서 역사 공부에는 안전감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화학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여섯째 시간의 종이 울립니다. 이제 실험실에 가서 산과 염, 그리고 알칼리의 상태를 조사해야 합니다. 저는 화학 시간에 에이프런을 염산으로 태워서 구멍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론대로 된다면 이 구멍을 강한 암모니아로 중화시키면 메꿀 수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시험이 다음 주에 있습니다만,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언제나 당신의 벗인
주디 올림
그림 설명: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데요
벽에 시계가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음
3월 5일
키다리 아저씨
3월의 바람이 불고, 하늘에는 나직이 검은 구름이 바쁘게 움직이고, 솔밭에서는 까마귀떼가 요란스럽게 울어대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들떠서, 한몫 끼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로 소란합니다. 교과서 같은 건 탁 덮어 버리고 언덕으로 뛰어나가, 바람과 함께 달리기 시합이라도 벌이고 싶습니다.
지난 번 토요일에는 질척한 시골길을 7킬로미터나 종이뿌리기 경주를 했답니다. 여우(잘게 썬 종이를 30킬로미터쯤이나 가진 사람들 3명) 들은 27명의 사냥꾼보다 30분 미리 출발했어요. 저는 그 27명 가운데 하나인데, 도중에서 8명이 떨어져 나가 나중에는 19명이 되었습니다.
여우 발자국은 언덕을 넘어,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늪지대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높직한 발판을 찾아 깡충깡충 뛰어 넘어가야 했습니다.
물론 절반은 무릎까지 진흙탕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발자국을 잃어버려 늪지에서 25분이나 헤맸습니다. 그리고 나서 언덕을 오르고 숲 속을 빠져나가 닿은 곳은 어느 집 창고의 창문이었어요.
창고문에는 모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데다 창문도 높은 곳에 있고 아주 작은 거였어요. 이러한 것이 공평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 안 그래요?
하지만 우린 그따위 창문에 기어 들어가지는 않았답니다. 창고 주위를 보았더니, 나직한 헛간 지붕을 지나 울타리 밖으로 나간 발자국을 발견했거든요.
여우는 거기서 사냥꾼을 따돌렸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린 오히려 그들의 의표를 찔러 주었지요. 거기서부터 높았다 낮았다하는 목장을 3킬로미터나 추적해 갔으나, 색종이가 차츰 뜸해져서 발자국을 찾는데 무척 힘이 들었어요. 규칙상으로는 아무리 뜸해도 2미터 간격으로 색종이를 뿌려 놓게 되어 있었는데, 그 2미터라는 것이 이제까지 본 적도 없을 만큼 긴 거리지 뭐예요. 그러나 두 시간이나 끈기 있게 걸어다닌 결과, 마침내 여우 씨 일행이 크리스털 스프링 씨의 부엌으로 들어간 것을 알아 내었습니다(그 곳은 농가인데 우리 학생들이 흔히 긴 썰매나 건초 마차를 타고 가서 닭요리나 핫케이크를 먹고 오는 곳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세 마리의 여우가 태연하게 우유와 벌꿀과 비스킷을 먹고 있는 현장을 발견했죠. 여우들은 설마 우리가 거기까지 쫓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어요. 우리가 아까 그 창고 창문에서 걸리고 만 것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양쪽이 다 자기네가 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글쎄 우린 여우들이 학교에 돌아가기 전에 잡았거든요. 어쨌든 우리 19명은 메뚜기처럼 의자와 테이블에 달라붙어 꿀을 주세요! 하고 떠들어댔습니다. 꿀은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없었지만, 크리스털 스프링 부인(이건 우리가 붙인 애칭이고, 정말은 존슨 부인이에요)이 딸기잼 한 병과 지난 주에 만든 당밀 한 통과 검은 빵 3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학교에 돌아온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을 30분이나 넘긴 6시 30분쯤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옷도 갈아 입지 않은 채 곧장 식당으로 갔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매우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말이예요!
그리고 우리들 모두 저녁 예배는 생략했습니다. 우리 구두의 상태가 충분한 핑계가 된 거예요.
아직 시험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았지요? 저는 어느 과목이나 다 쉽게 통과했습니다. 이젠 요령을 터득했으므로 결코 낙제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1학년 때 그 얄미운 기하와 라틴어 산문 시험만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우등으로 졸업했을지도 모를 텐데... 하지만 저는 그런 건 상관없어요.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 밖에 무슨 말이 또 있으랴'예요(이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고전에서 잠깐 인용해 본 거예요).
고전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아저씨는 햄릿을 읽으신 적이 있으세요?
만일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꼭 읽어 보세요. 정말 멋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셰익스피어에 대해 들어 왔습니다만, 이렇게 멋있게 씌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명성만 높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겁니다.
저는 그 전에, 비로소 독서하는 것을 배운 뒤로 멋진 유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밤 잘 때에 자기가 읽고 있는 책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는 거예요.
현재 저는 오필리아입니다. 그러나 매우 생각이 깊은 오필리아예요. 저는 항상 햄릿을 즐겁게 해주고, 그 응석을 받아주고, 나무라고, 감기가 들면 목에 찜질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울병 같은 건 완전히 고쳐 주고 말았어요.
그 뒤 임금님도 왕비도 둘 다 죽었지요. 바다에서 조난당한 거예요. 그래서 햄릿과 저는 아무런 지장도 없이 덴마크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지금 두 사람은 왕국을 훌륭하게 다스리고 있답니다. 햄릿은 정치 쪽을 맡고 저는 자선 사업을 맡고 있어요. 저는 모범적인 고아원을 몇 군데에 세울 생각입니다. 아저씨나 아니면 다른 평의원님이라도 참관을 희망하신다면 기꺼이 안내해 드리겠어요. 평의원님들이 이 곳을 견학하시고 나면 많은 것을 느끼실 거예요.
당신에게 가장 상냥한
덴마크의 왕비 오필리아로부터
3월 24일 - 25일인지도 모름
키다리 아저씨
저는 아무래도 천국엔 갈 수 없을 것 같군요. 이 세상에서 너무 좋은 것을 많이 받고, 죽은 뒤에까지 좋은 것을 받는다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겼는지 들어 보세요.
저루샤 애벗이 우리 학교 교지에서 해마다 모집하는 현상 단편소설(상금 25달러)에 당선된 거예요. 더구나 2학년으로서! 응모자는 대개 4학년생이거든요. 제 이름이 나붙은 걸 보았을 때, 저는 이게 정말인가 믿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저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곰곰이 생각할수록 리펫 원장이 왜 저에게 저루샤 애벗이라는 시시한 이름을 붙여 주었나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여류 작가 같은 냄새가 나지 않아요? 그렇죠?
그리고 올 봄의 야외극 '뜻대로 하세요(세익스피어의 작)'에 뽑혔습니다.
저는 로절린드의 친사촌인 실리아가 됩니다.
끝으로 이번 금요일에 줄리아와 샐리와 저는 뉴욕에서 봄상품을 사기 위해 하룻밤 묵고, 이튿날은 저비 도련님과 극장에 가기로 되어 있습니다. 저비스씨의 초대랍니다. 줄리아는 자기 집에 가지만 샐리와 저는 마더 워싱턴 호텔에 갑니다. 이보다 더 멋진 일이 또 있을까요?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연극 구경이나 호텔에 간 적이 없거든요. 언젠가 한 번 카톨릭 교회의 축제 때 고아들을 초대해 주었지만, 그 때의 것은 정말 연극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러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햄릿이에요. 좀 생각해 보세요. 세익스피어 클라스에서 4주일 동안이나 공부했으므로 저는 모조리 외어 버렸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기대 때문에 저는 마음이 들떠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저씨 안녕, 세상은 참으로 즐거운 곳이에요.
언제나 당신의 벗인
주디로부터
추신
지금 달력을 들쳐 보았더니 그 날은 28일이에요.
추가추신
오늘 시내 전차에서 한쪽은 푸르고 한쪽은 갈색 눈을 한 안내원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탐정 소설의 악당에 안성맞춤이 아닐까요?
4월 7일
키다리 아저씨
정말 놀라고 말았어요! 뉴욕이란 도시는 정말 아주 큰 곳이로군요. 우스터 따윈 비교도 안 됩니다. 아저씨는 정말로 그렇게 눈이 빙빙 도는 혼잡 속에서 살고 계시나요? 거기서 지낸 이틀 동안 놀랄 일만 계속되어 그 흥분에서 완전히 깨어나자면 앞으로 몇 달이나 더 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본 눈이 휘둥그래지는 멋진 일들을 일일이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아저씨는 다 알고 계시겠지요. 직접 뉴욕에 살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어느 거리에 가도 재미있는 일뿐이에요. 사람들도, 가게도, 진열장에 진열되어 있는 것만큼 아름다운 걸 저는 아직 본 일조차 없답니다. 그런 걸 보면 누구든지 죽을 때까지 옷치장에만 정신을 쏟고 싶어지기도 할 거예요.
샐리와 줄리아와 저는 토요일 아침 같이 쇼핑을 했습니다. 줄리아는 제가 난생 처음 보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하얀 색과 황금색의 벽, 푸른 양탄자, 푸른 비단 커튼, 번쩍번쩍하는 황금색 의자, 그리고 나무랄 데 없는 금발의 미인이 검은 비단 드레스 자락을 길게 끌며 나와, 애교 있게 미소를 띠며 맞이해 주었습니다.
저는 인사하러 남의 저택을 방문한 것으로 착각하여 하마터면 악수를 할 뻔했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자를 사려고 온 것뿐입니다.
적어도 줄리아는 그랬습니다. 줄리아는 거울 앞에 앉아서 모자를 한 다스나 써 보았습니다. 그런데 쓸 때마다 앞의 것보다 더 아름다웠어요. 그리고는 그 가운데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으로 두 개를 샀습니다.
이렇게 거울 앞에 앉아서 마음에 드는 모자를 값 따위는 따지지도 않고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니, 인생에 이보다 더한 기쁨이 또 있을까요!
정말이에요, 아저씨. 뉴욕이라는 곳은 존 그리어 고아원이 그렇게도 끈기있게 훈련시켜 준 이 훌륭한 금욕적 성격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말 것 같습니다.
우리는 쇼핑이 끝나자 셸리 레스토랑에서 저비 도련님과 만났습니다.
아저씨도 셸리 레스토랑에 가본 일이 있으시겠지요? 그럼 먼저 셸리 레스토랑을 상상해 주세요. 그리고 또 기름 먹인 천으로 덮은 테이블과 깨어질 염려가 없는 하얀 사기그릇과, 나무손잡이가 달린 나이프와 포크가 있는 존 그리어 고아원의 식당을 상상해 보시고, 그 때 제가 어떤 기분으로 앉아 있었겠는가 상상해 봐 주세요!
저는 생선 포크를 잘못 썼으나, 심부름하는 사람이 친절하게도 살짝 다른 포크를 갖다 주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채 넘어갔습니다. 점심이 끝난 뒤 우리는 극장에 갔습니다. 눈이 부시게 황홀해서 이 세상 같지가 않았습니다.
앞으로 매일 밤 그 곳의 꿈을 꿀 정도예요.
셰익스피어는 정말 훌륭해요!
햄릿은 교실에서 배웠을 때보다도 무대에서 보는 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전에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좋아졌어요! 저는 아저씨만 허락해 주신다면 작가가 되기보다는 여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대학을 그만두고 배우 학교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배우가 되면 공연하는 동안은 언제나 아저씨에게 관람석을 하나 마련해 드리고, 조명등 너머로 아저씨께 미소를 보내겠어요. 그 때엔 단추구멍에 빨간 장미를 꽂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제가 틀리지 않고 아저씨를 알아보고 미소지을 수 있게요. 잘못 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소를 보낸다면 정말 민망할 테니까요.
우리는 토요일 밤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녁은 기차 안 핑크색 램프를 켠 작은 테이블에 앉아 흑인 안내원의 시중을 받으면서 먹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기차에서 식사가 나온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므로, 저도 모르게 그만 그 말을 입밖에 내고 말았어요.
"도대체 넌 어디서 자랐니?"
하고 줄리아가 제게 말했습니다.
"응, 조그만 마을이야"
저는 머뭇머뭇 대답했어요.
"하지만 여행한 일도 없니?"
줄리아가 또 묻잖아요.
"대학에 올 때가 처음이었어. 그것도 겨우 250킬로미터의 여행인걸 뭐. 식사 같은 건 하지 않았어"
하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줄리아는 제가 이상한 소리만 하므로 차츰 제게 흥미를 갖기 시작했어요.
저는 뚱딴지같은 말은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무엇에 놀라거나 하면 그만 입 밖에 튀어나오고 마는 군요. 게다가 저는 1년 내내 놀라고만 있지 뭐예요.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18년이나 살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에 뛰어들다니, 정말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경험이에요.
아저씨, 하지만 저는 차츰 익숙해지고 있어요. 이젠 전에 저지른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조금도 불안해지지는 않습니다. 전에는 누구든 저를 보면 머뭇머뭇하곤 했지요. 가짜 새 옷을 통해 체크무늬의 무명 옷(고아원의 제복)이 들여다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무명 옷 따위로 괴로움을 받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고생은 그 날로서 족하다'예요.
꽃다발 이야기를 하는 걸 잊고 있었군요. 저비 도련님이 우리 모두에게 오랑캐꽃과 백합 꽃다발을 주셨습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에요. 저는 이제까지 남자는- 평의원님들로 판단하여-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그 생각을 고쳤어요.
11장이나 썼군요. 세상에, 이런 것을 편지라고 쓰다니! 하지만 참아 주세요. 이제 이 정도로 끝낼 테니까요.
항상 당신과 함께 하는
주디로부터
4월 10일
부자 아저씨께
보내주신 50달러짜리 수표를 여기 같이 동봉합니다. 매우 감사합니다만, 이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매달 부쳐 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 필요한 모자를 사기에는 충분합니다. 모자점에 관해 그와 같이 시시한 소리를 쓴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까지 그런 곳을 보지 못했다는 것뿐이었어요.
어쨌든 저는 돈을 얻으려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니까요. 저는 꼭 필요로 해서 받는 돈 이외의 것은 받고 싶지가 않아요.
당신의 안녕을 바라며
저류샤 애벗 올림
4월 11일
가장 좋아하는 아저씨
어제 드린 편지는 아무쪼록 용서해 주십시오. 우체통에 넣고 난 뒤 바로 후회스러워 되찾으려고 했지만, 그 얄미운 우편 배달부가 돌려 주지 않았어요.
지금은 한밤중입니다. 저는 제가 얼마나 못된 벌레 같은 인간이었나 하고 생각하니, 몇 시간이나 잠도 못 자고 있습니다.
벌레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발이 천 개나 달린 징그러운 벌레- 이 이상 더 나쁘게 말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줄리아와 샐리가 잠이 깨지 않게, 살며시 서재의 문을 닫고 침대 위에 앉아, 역사 공책을 잘라서 아저씨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아저씨가 보내 주신 수표에 대해 그런 무례한 태도를 취한 걸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아저씨가 친절한 마음에서 보내 주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자 따위의 시시한 일에까지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다니, 아저씨는 정말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돌려 드리더라도 좀더 정중하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돌려 드려야 했어요. 제 경우는 다른 사람과는 사정이 다르니까요. 다른 소녀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남에게서 물건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아버지나 오빠나 삼촌이나 숙모가 계십니다.
그러나 제게는 아무도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아저씨가 저의 친척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만, 단지 그런 생각을 즐길 뿐이지 아저씨가 친척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외톨박이입니다. 사실 아무런 뒷받침도 없이 벽에다 등을 대고 세상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서 쫓아 내고 여전히 그런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알아 주시겠지요? 저는 아무래도 필요 이상의 돈을 받을 수가 없군요. 왜냐하면 저는 언젠가는 돈을 돌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설사 대작가가 된다 할지라도 너무 많은 부채가 있으면 곤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자와 그 밖의 아름다운 일용품을 매우 좋아하긴 합니다만, 그것을 사기 위해 자기 장래를 저당잡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무례했던 것을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저는 무슨 생각이 나면 앞뒤 가리지도 낳고 곧장 써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서는 후회하는 거예요. 만약에 때때로 제가 하는 일이 생각이 없고 배은 망덕하게 보이더라도, 결코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지금의 생활과 자유와 독립을 주신 아저씨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길고 음침한 반항심의 연속이었으나, 지금은 이렇게 하루의 1분 1초가 너무도 행복해서 도무지 이것이 진실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는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과 같은 기분입니다.
벌써 2시 15분입니다. 저는 이제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서, 우편함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 편지를 넣고 올 겁니다. 아마 먼저 보낸 편지 바로 뒤이어 배달될 테니까, 아저씨가 저를 나쁘게 생각하신다 해도 그다지 오랜 시간은 아니겠지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언제나 아저씨를 사랑하는
주디 올림
5월 4일
키다리 아저씨
지난 주 토요일은 운동회였어요. 정말 아주 볼 만한 광경이었어요. 맨 먼저 전교생이 새하얀 운동복을 입고 행진하였습니다. 4학년생은 푸른색과 금색의 일본식 종이 우산을 들고, 3학년생은 흰색과 황색의 기를 들고, 우리 학년은 빨간 풍선을 들었는데, 자칫하면 실이 끊어져 날아갈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어요. 그리고 1학년생은 녹색의 셀로판지 모자에 긴 꼬리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색 제복을 입은 악대도 시내에서 초청해 왔고,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구경꾼을 웃기려고 서커스의 광대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열 두명이나 나왔습니다.
줄리아는 마직의 헐렁한 코트를 입고, 수염을 달고, 고물 우산을 들고, 디룩디룩 살이 찐 시골 영감으로 분장했습니다. 팻시 모리아티(정말은 패트리샤라고 하는데, 아저씨는 이렇게 괴상한 이름을 들은 적 있으세요? 리펫 원장님도 미처 못따라 올 정도죠?) 라는 비쩍 마른 키꺽다리가 이상야릇한 초록빛 모자를 한쪽 귀가 가려질 만큼 비스듬히 쓰고 줄리아의 마누라가 되었어요. 이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웃음보가 터지는 것이었어요.
줄리아는 특히 그 역을 잘 해냈습니다. 저는 설마하니 펜들턴 집안 사람이 이런 희극적 재질을 발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답니다.- 저비 도련님에게는 실례되는 말이지만- 하긴 제가 아저씨를 진짜 평의원으로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비 도련님도 진짜 펜들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샐리와 저는 경기에 나가기 때문에 행진에는 참가하지 않았어요. 아저씨, 어떠세요. 우리 두 사람 다 우승했답니다! 적어도 어떤 종목에서는 말이에요.
넓이뛰기에서는 두 사람 다 졌습니다만, 샐리는 장대높이뛰기(2미터 20센티미터) 에서 1등이었고 저는 50미터 단거리 달리기에서 8초를 뛰어 우승했습니다. 나중에 무척 숨이 찼지만 클라스 전체가 풍선을 흔들면서,
주디 애벗은 어떻게 되었니!
이겼다!
누가 이겼니?
주디 애벗이 이겼다!
하고 외치며 응원을 보내 주는 것은 정말 유쾌했어요.
아저씨, 이건 정말 명예로운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탈의실로 되어 있는 천막으로 달려가서 온몸을 알코올로 마사지해 받고, 레몬을 입에 넣고 빠는 거예요. 우리는 이처럼 모든 일을 본격적으로 했답니다. 자기 반을 대표해서 우승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에요. 제일 우수한 반이 그 해의 우승컵을 차지하기 때문이에요.
올해는 4학년이 일곱 종목에 우승해서 우승컵을 땄습니다. 체육부에서는 우승자들을 위해 체육관에서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게튀김과 농구공 모양의 초콜릿아이스크림이 나왔습니다.
저는 어젯밤 한밤중까지 자지 않고 제인 에어를 읽었어요. 아저씨는 60년 전의 일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노인이신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말씨를 썼나요?
거만한 여인 블랑쉬가 하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시시한 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내가 하라는 대로나 해!"
그리고 로체스터 씨는 하늘을 금속 창공이라고 합니다. 또한 미친 여자는 하이에나와 같은 웃음 소리를 내며, 침실 커튼에 불을 지르고 결혼 의상을 찢고,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마구 무는 등 정말 멜로드라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역시 정신 없이 읽게 되는군요.
젊은 여성이, 더구나 교회 안에서만 자란 몸으로 어떻게 이런 것을 쓸 수 있었을까,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이 브론테자매(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엔 브론테 세 자매는 19세기 영국의 여류작가) 에게 저는 마음이 끌립니다. 쓴 소설에도, 그 생애에도, 또 그 정신에도. 도대체 이 세 자매는 어디서 이런 지식을 몸에 익혔을까요.
제인이 자선 학교에서 고생하는 대목에 오자 저는 너무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어서, 산책을 나가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어요. 제인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저는 잘 알 수가 있었거든요. 리펫 원장님을 알고 있는 제게는 브로클허스트 씨(제인 에어 속의 등장인물)가 눈에 선히 보이는 듯했습니다.
아저씨,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마세요. 저는 뭐 존 그리어 고아원이 로드 자선 학교와 같다고 비꼬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거기에는 먹을 것도 충분하고 옷도 많았고 세숫물도 많았으며, 지하실에는 난로까지 있었거든요.
그러나 단 한 가지 존 그리어 고아원과 아주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생활이 너무 단조롭고 변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거기서 지낸 18년 동안에 만난 모험이라면 장작 창고에 불이 났던 일 한 가지뿐이었어요.
그 때는 본관에 불이 옮겨 붙었을 경우에 대비해서 우린 한밤중에 일어나서 옷을 입었지요. 그러나 불을 옮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누구든 약간은 신기한 일을 좋아합니다. 이건 인간이 타고난 욕구입니다. 하지만 저는 리펫 원장님으로부터 사무실에 불려 가서 존 스미스 씨가 저를 대학에 보내 주신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한 번도 놀라운 일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때마저도 리펫 원장님은 그 뉴스를 서서히 들려 주었으므로 그렇게 충격은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말예요, 아저씨. 저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은 우리를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바꿔 놓아 줍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아져서 남을 잘 이해할 수가 있지요.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상상력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는 조금이라도 상상력이 비치면 얼른 밟아 끄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장려하는 것은 의무뿐이었어요. 저는 아이들에게는 의무 같은 것은 알려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무란 기분 나쁘고 호감이 안 가는 말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무엇이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제가 원장이 될 고아원을 구경해 보시겠어요. 이건 제가 매일 밤 자기 전에 하는 가장 좋아하는 놀이에요. 저는 아주 작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계획을 세우고 있답니다. 식사, 옷, 공부, 오락, 그리고 벌칙까지도요-
아무리 착한 고아일지라도 때로는 장난을 하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아이들은 모두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될지라도, 적어도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고는 행복했다는 추억을 갖도록 해주어야 하니까요. 만약에 제가 어린아이를 갖는다면 자신이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아이들에게만은 성장할 때까지 고생을 시키지 않을 작정입니다.
(예배 종이 울립니다- 가까운 장래에 이 편지의 끝을 맺겠습니다)